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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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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다니엘 11: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8-09

말씀내용
1.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강하여 용맹을 발한다(단 11:32).
제임스 패커는 그의 명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서론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증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먼저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증거가 아닌 것들을 두 가지 지적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기도하는 법, 증거하는 법, 성경을 읽는 법,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 헌신하는 법,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법 등등).
그렇다면 참으로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그는 다니엘 11:32 말씀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배교의 시대에, 하나님을 제멋대로 믿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고 시대의 흐름이 되어버린 시대에, 참으로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고 용맹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를 패커는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A.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큰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는 왕성한 에너지가 있다.

B.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힘과 진리, 개인과 나라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의 행위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거룩하신 엄위,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함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신실하심에 대한 이런 엄청난 느낌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 하여금 겸손하게 의존하고 경외하고 순종하게 한다.

C.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결과와 상관없이 기쁘게 순종할 수 있고, 순종이 가져올 큰 손해를 감수하려 한다.

D.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평안함)을 얻는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삶의 상황에 의해서 만족과 기쁨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죽음을 넘어 영원토록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준다는 확신이 주는 평안함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다.

2.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호 4:6; 6:6)
호세아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밝히는 명백한 멸망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고 그럽니다. 무슨 지식입니까? 6:6을 봅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 것입니다. 이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이게 가능한 말입니까? 여기서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쓰여졌는데, 이 말은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 관계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물론 관계적이고 경험적인 앎이 지식적인 앎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3. 위험
A. 이런 하나님은 아니다.
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신, 나의 이해에서 비롯된 신, 그리고 나의 체험에서 비롯된 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신은 성공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도와주는 신입니다. 나의 이해에서 비롯된 신은 자기가 만든 공식에 맞추어 만들어낸 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의 체험에서 비롯된 신은 은사주의 교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복음이 소위 내적 치유의 복음이라고 말해야 할 만큼 심리학과 상담이 복음을 대치해버린 시대에 수많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상처를 주목하면서 하나님은 상처를 치유하는 친절한 신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레미야 6:14을 봅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의 중한 상처를 대충 피상적으로 고쳐주었다는 말인데, 말하자면 암인데 살이 좀 벗겨진 것이니까 걱정 말라고 하면서 반창고를 하나 발라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샬롬, 샬롬.”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오늘날 이런 목회자들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 메시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코 참된 복음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와 함께 그 말을 기뻐하여 따라간 자들도 망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한 바, 말세의 한 징조는 자기 귀를 긁어줄 스승을 많이 둔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거리는 바로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나를 좇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B. 잘못된 개념, 잘못된 권면
때로는 이렇게 지식을 말하게 되면 반작용으로 잘못된 권면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세 가지로 그것을 정리하고 간단히 대답하려고 합니다.

i. “머리만 커진다.”
“머리만 커진다”고 말하면서 바른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회피하는 사람들은 결코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합니다. 신앙은 언제나 바른 지식, 즉 신앙의 내용을 가질 때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ii. “나는 느끼고 싶어.”
열쇠는 감동이 아니라 믿음이고, 그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의 내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의존하는 것이고, 이 내용은 우리가 배워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iii. “이제는 그만 배우고 사역을 하라.”
때로는 우리가 배움보다 사역을 강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역은 참된 믿음의 지식 위에서 이루어질 때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그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 자신의 믿음도 성장하게 됩니다.

4.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여러분은 얼마나 이해합니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뿐 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신학 박사입니까?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그는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가령, 하나님의 전지하심으로 시작해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와 같이 시간에 매여서 아시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하나님의 아심 안에 있습니다. 또한 공간적으로도 하나님의 지식과 아심으로부터 숨겨질 수 있는 영역은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아십니다. 내 생각을 아시고 내 미래를 아십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안심이 됩니까,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역사와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롬 8:28). 내 지혜로는 도무지 계산이 안 나오는데,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다는 것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안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 무한하신 지혜로 계획하신 일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본래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신 분입니다.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마치 우리의 이해와 느낌 속에 넣을 수 있는 양, 혹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양, 혹은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피조물은 그 앞에서 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꿇어 엎드림, 두려워 숨는 모세,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하는 이사야의 외침, 완전히 쓰러진 사울의 모습,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진 요한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서만 드러나는 하나의 특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왜 말하지 않는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일까요? 누구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씀합니다(요일 4:8). 그러나 제가 그것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나 말하고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대개가 자기가 원하는 사랑의 정의에 따라서 만들어낸, 믿고 싶어하는 모습의 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좀 서둘러서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가려고 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참된 복음의 진리와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모든 지식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할 자명하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복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배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다시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어떤 체험이나 신비로운 기적을 주시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그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믿게 하고 믿을 뿐 아니라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의도하고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배워서 알라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을 뿐 아니라, 교회에 교사와 목사를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11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지도자의 직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도와 선지자의 고유한 직분은 교회가 세워지고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지만, 복음 전도자나 목사와 교사는 지속적으로 주어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목사와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으로 목양을 하는 직분이 아닙니까? 여기에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목사와 장로는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목양해야 하며, 교인들은 열심히 배우는 것보다 이 목양을 잘 따르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그 말씀을 먹는 일입니다.

C.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설명을 하실 때,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17).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그 하시는 일을 설명해주셨습니다(요 14:26). 그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입니다(요 15:26). 이상이 주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전부입니다. 성령님은 신자들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로 말씀을 배워 깨닫고 경험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경을 주셨고, 목사와 교사들을 주셨으며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을 주신 것을 생각한다면, 신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 아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인 것입니다. 목사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의무인 것입니다.

6.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여러분은 얼마나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과연 배우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난 수년 동안 성경을 정기적으로 매일 읽어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에 관한 애매모호한 지식에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에 관한 교리를 바르고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오래도록 신앙 생활을 해 왔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온갖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교회를 허물고 수많은 교인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현실이 그 하나의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믿는 도리를 분명하게 배워서 알고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기 전에 교회의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가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제가 보고 경험한 것들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침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설교는 교회의 삶에서 점점 비중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예배에서 설교 시간이 짧아진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시간들은 감각적이고 화려한 프로그램들로 대치되었습니다. 더구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고 깨닫고 이해하기 보다는 느끼라고 도전합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의 내용을 가르치는 대신, 소위 ‘먹히는’ 프로그램들으로 검증된 것들을 가져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점차 짧은 본문을 묵상하는 큐티로 바뀌었고 몇 년이 지나도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지 않은 신자들로 교회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자기가 나름대로 느끼고 원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놓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현상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는 유일하고 참되신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일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마음 속의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고 섬기는 격이 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노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적 욕망과 죄성이 만들어낸 하나님 상에 맞추어 그런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비유를 맞추어 진리를 파는 목사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가치 조차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웠습니다. 이후 삼사십 년이 지나는 동안 저는 그런 교리 교육을 시키는 교회에 대해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요즘에 와서야 교리교육이 한국교회에 그 어느 때보다도 다시 살아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저는 기뻐합니다. 교회에 구름 떼와 같이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와 같은 단어들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와 복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거나, 그 지식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피상적 지식에 불과합니다. 지난 2006년 10월 <타임>지는 지난 20~30년 동안의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의 청소년 사역에 대해서 분석한 글을 실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해왔던 사탕발림의 프로그램들로 청소년들을 교회로 끌어당기려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그 기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입맛에 맞추어 청소년 사역이 많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결국 그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마는 더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소수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과 예배라는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는 교회들의 청소년 사역은 도리어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도 싣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농구대와 당구대와 온갖 게임기기들로 아이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아이들을 인도하는데 효과적인 수단도 아닐 뿐 더러 교회가 가야 할 부르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기사는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단 청소년 사역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가 가르침을 그 사역의 중심에 두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교회는 소비자 친화적 교회가 되어 온 것이지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확신에 서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드문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바른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므로 수많은 오해들 위에 그들의 신앙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결코 견고한 신앙으로 세움을 입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견고한 신앙은 진리에 대한 확신 위에서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평가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신앙의 도리를 배우기 위해서 다른 중요한 일들을 내려놓는 교인들은 심히 적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참된 지식이 없이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뿌리 깊은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근거 없는 오해 위에서 신앙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런 나태함 속에 자신의 영혼을 방치해 오셨다면, 여러분은 단지 자신의 영혼만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도 허물고 있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는 교회의 배후에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들이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교정되고 바른 이해에 이르게 될 때, 그리고 여러분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추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이 비로소 견고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래 믿어왔을지라도 여전히 흔들리는 신앙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는 치료책입니다.

7. 더 풍성한 지식을 추구하라.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일에서 우리가 핑계 댈 것이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도록 추구하고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적당한 지식의 수준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와 신자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확신이 희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5~6을 봅시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모든 지식에 풍족함’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성경을 가지고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곧 전도입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얼마나 성경에 기초해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사도 바울은 그저 사랑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지식 없이 자라지 않고 풍성해지지도 않습니다. 이 지식이 없을 때,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은 정체됩니다. 이 지식이 풍성해질 때, 설교를 들어도 하나를 배워 열을 깨닫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에 대해서 열심을 품으시고 지식이 풍성하고 차고 넘치기까지 추구하는 벧샬롬의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