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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6). 바벨론 멸망의 장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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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6). 바벨론 멸망의 장송곡

요한계시록 18:9-24, 에스겔 26:1-21, 에스겔 27:1-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3-28

말씀내용
1. 본문 이해의 배경 (겔 26-27)
찬송가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를 보면 3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세상 나라들은 멸망 당하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8장이 이 가사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이 로마의 멸망을 예언한 이 말씀이 로마 제국의 전성기인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주전 27년—주후 180년)의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이 과거의 일인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당연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을 처음으로 읽고 들었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20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감격하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영적 음행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했을 뿐 아니라,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성도들을 핍박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로마 제국의 멸망 예언은 분명히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제국으로서는 이미 멸망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 숭배와 영적 음행으로 유혹하고 심지어 박해하기까지 하는 현존하는 세상 나라들—이들이 바벨론이고 로마 제국입니다—이 반드시 멸망하고 만다는 확증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듣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18:1-8에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천사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9-24절의 주된 내용은 바벨론에 붙어 권력과 부와 사치를 누리던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상 숭배적 경제 제도와 연합하여 번영을 누리던 자들로서 로마 제국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세 집단을 대표합니다. 첫째는 ‘땅의 왕들’입니다(9-10). 이들은 로마 제국의 가신 왕들 그러니까, 로마가 정복한 지역의 도시들을 통치하였던 자들이고, 로마의 지방 관리와 귀족들을 포함하는 부류들입니다. 이들은 부패한 정치 질서 가운데서 권력과 사치를 마음껏 누리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교만한 자들입니다. 두번째는 ‘땅의 상인들’입니다.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최고의 물품들을 수입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의 영토 밖인 중국에서도 비단을 수입하였으니, 그야말로 사치와 향락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품을 수입하여 팔아 어마어마한 이익을 남기던 상인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만족할 줄 모르는 사치스런 탐욕을 채워주었던 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부르는 장송곡의 내용이 11-17절 상반절까지 입니다. 세번째 부류는 주로 바다 무역과 관련 있는 자들인데,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17b).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로마 제국의 해상 무역을 통해 제국이 원하는 것들을 조달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취하였고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장송곡이 17b-19절 입니다.
이 세 부류의 장송곡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상적으로 불타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멀리 서서’(10,15,17) 울고 애통하며(10,17,19),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외칩니다(10,16,19). 그들 모두는 멸망의 갑작스러움을 ‘한 시간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10,17,19).
하지만 구약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가 해상무역으로 부강함을 이룬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겔 26-27). 바벨론이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불린 로마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군사적인 면 보다 경제적인 면을 크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경제 대국을 이루고 교만했던 고대의 두로에 대한 심판의 내용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2. 땅의 왕들이 부르는 장송곡 (9-10; 겔 27:33)
첫번째 장송곡은 땅의 왕들의 것으로 9-10절입니다. 9절은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라고 묘사합니다. 물론 ‘그’는 본문에서 바벨론이라 불리는 로마 제국입니다. 땅의 왕들은 로마 제국과 더불어 ‘음행하고 사치하던’ 자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포함하는 음행은, 로마 제국이 이 왕들의 정부(情夫)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육욕적 사치에 빠져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사치에는 많은 평민들의 희생이 따랐고, 그들의 희생 위에서 왕들은 축적한 부를 누렸던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두로에게 전한 예언이 정확하게 이 왕들에게 들어맞습니다. “네 물품을 바다로 실어 낼 때에 네가 여러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음이여 네 재물과 무역품이 많으므로 세상 왕들을 풍부하게 하였었도다(에스겔 27:33).”
이들은 바벨론에 피어 오르는 심판의 불타는 연기를 보고 가슴을 치며 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부(情夫)인 제국이 받는 고통이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애통하며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들이 바벨론을 ‘큰 성, 견고한 성’이라고 지칭하듯이, 로마 제국은 난공불락의 성, 결코 망할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멸망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이란 것이 이런 상황일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이 영원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크고 견고했으니까 말입니다. 사실, 견고하다는 이 표현은 바로 앞인 8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고 할 때 ‘강하신’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여기 ‘견고한’과 같은 말입니다. 견고한 성이 강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크고 견고함만을 알았지, 하나님께서 강하신 분임을 몰랐습니다. 이 왕들은 자기들의 정부인 로마 제국을 사랑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더 이상 기대어 권력과 부와 사치를 보장받고 누릴 수 있는 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왕들은 세상에서는 심판자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땅의 상인들이 부르는 장송곡 (11-17a; 겔 27:12-24; 계 17:4,18)
두번째로 땅의 상인들이 부르는 장송곡이 이어집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모든 곳과 심지어 중국으로부터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수입하여 누렸습니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수많은 상인들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물건들을 공급해주면서 상인들은 부를 긁어 모았습니다. 주후 69년 로마 황제였던 비텔리우스는 공작새의 뇌와 꾀꼬리의 혀 같이 특이한 별미에 집착했고 그가 1년 간 음식비로 지출한 것이 현시가로 200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당시 은욕조에서만 목욕을 하겠다고 고집하는 부인들, 전쟁터에서조차 은그릇으로만 식사를 하는 장군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사치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그 배후에는, 상인들의 물자 공급이 있었고, 상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을지라도 부를 끌어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상인들이 울고 애통하는 이유는 단 하나,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11). 그들에게 부를 안겨주던 거대 시장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12-13절은 상인들이 다루던 상품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이유가 로마 제국의 과시적이고 이기적인 물질주의였음을 보여줍니다. 로마 제국의 죄는 경제적 착취였고, 사치의 죄였습니다. 이 상품 목록은 에스겔 27:12-24에 나오는 두로 제국의 상인들이 다루던 목록과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먼저 보석과 귀금속 목록인데, ‘금, 은, 보석, 진주’입니다. 주로 스페인에서 수입한 금은 부의 상징이었고 은은 침상, 목욕통, 접시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인도에서 수입하는 보석은 여성들의 장신구로, 진주는 다이아몬드와 함께 가장 비싼 보석으로 홍해와 페르시아 만, 인도에서 수입했습니다.
둘째로 사치스러운 옷감들인데, ‘세마포, 자주 옷감, 비단, 붉은 옷감’입니다. 세마포는 부자들의 옷으로 당시 보통 노동자의 2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7000 데나리온을 호가하는 세마포 옷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주 옷감은 그 염료의 희소성 때문에 고가에 판매되었고, 비단은 1세기말과 2세기 초 중국으로부터 수입이 되어 상류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소아시아에서 생산되던 붉은 옷감은 주로 왕족이나 부자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는 고가의 나무와 건축재료들로, ‘각종 향목, 각종 상아그릇, 그리고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입니다. 당시 상아그릇의 인기는 코끼리를 멸종 위기로 만들 정도 였으니, 로마인들의 사치는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넷째로 향료와 향수들인데,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입니다. 계피는 동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입해서 고가의 향수, 방향제, 포도주 양념으로 쓰였습니다. 인도에서 배로 수입한 향료와 향은 머리에 뿌리는 향수로 사용되었고, 소말리아에서 수입한 몰약이라고 불리는 향유는 최고가의 향수로 사용되었으며, 같은 소말리아에서 들여온 유향(향유의 절반 값)은 시신의 냄새 방지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식품류인데 ‘포도주, 감람유, 고운 밀가루와 밀’입니다. 이것들은 사치품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포도주는 시실리와. 스페인에서, 감람유는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주로 아프리카와 스페인), 밀은 이집트에서 수입하였는데 특별히 고운 밀가루는 부유층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물과 종들로, ‘소, 양, 말,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식용으로는 인기가 없었던 소는 일과 우유 공급을 위한 용도였고, 양은 고기 보다는 양모로써 부를 증식 시켜주는 수단이었으며, 말은 주로 제국의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마차 경주용으로, 그리고 군대와 일을 위해 대량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수레는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4륜 마차인데, 은이나 상아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는 말은 ‘종들 곧 사람의 영혼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몸을 의미하는 ‘쏘마(σῶμα)’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종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의 영혼들’이라는 표현은 종들이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 있는 종류(의 재산)’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당시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20%가 종—노예였다고 하는데, 전쟁이나 채무, 또는 죄수가 받는 처벌로 종이 되기도 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수입되어 팔리는 거래의 대상이었습니다.
이것들이 ‘땅의 상인들’이 다루던 상품들인데,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로마에 공급해줌으로써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망하자, ‘네 영혼(바벨론)이 탐하던 과일’이 떠났고, 끝 없이 요구하던 인간 욕망의 시장이 사라진 것입니다. ‘맛 있는 것들’은 사치품들의 값어치를, ‘빛난 것들’은 감각적 사치품들의 화려한 매력을 강조합니다. 이제 다시는 그것들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들도 왕들과 다르지 않게,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말하기를,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외칩니다(15-16). 여기서 상인들이 묘사하는 바벨론은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존재인데(16), 이는 17:4절에서 음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요한계시록 17:4).” 이 음녀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17:18). 다시 한 번 여기서 바벨론이 음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이제 곧 등장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대조하여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4. 뱃사람들이 부르는 장송곡 (17b-19; 겔 27:29)
세번째 장송곡은 뱃사람들이 부릅니다. 그들은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17b). 이들은 로마의 해상 무역을 통해 이득을 취하던 자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두로 멸망 예언도 비슷한 내용을 전합니다. “노를 잡은 모든 자와 사공과 바다의 선장들이 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서서(에스겔 27:29).”
앞의 왕들이나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바벨론을 큰 성이라고 부릅니다. 크다는 것은 바벨론이 추구하는 정신이고 가치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라고 자신들을 표현합니다(19). 로마 제국의 멸망은 곧 해상 무역의 멸망이었고 이들 뱃사람들의 멸망이기도 했습니다.


5. 심판을 즐거워하는 성도들 (20)
세 편의 장송곡이 마치고나자, 20절에서는 일종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요한계시록 18:20).”는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맥락상 흐름을 깨뜨리는 이 구절의 삽입은 의도적입니다.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던 자들은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즐거워함을 보여줍니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던 자들이 최종적으로 합당한 심판을 받기 때문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로마 제국의 심판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땅의 왕들이나 땅의 상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에는 성도들의 주소지로 ‘하늘’이 등장합니다.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즐거워하라고 하는데, 선지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라기 보다, 초대 교회의 선지자들(22:9)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들의 즐거움을 19장에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6. 바벨론의 멸망 (21-23a; 사 24:8; 겔 26:13)
21절에서는 드디어 ‘힘센 천사’가 심판을 시행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그는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21). 여기 큰 맷돌은 가정용 맷돌이 아니라 나귀가 끄는 엄청난 무게의 큰 맷돌로 주님께서 형제를 실족하게 한 사람이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연자맷돌입니다(막 9:42). 이어지는 심판 묘사에서는, ‘다시는 보이지(들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5차례 반복됩니다.
먼저 사라지는 것은 음악 소리입니다.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22). 음악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회가 삭막하고 으스스한 적막 만이 흐르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심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두로에 대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들도 이것을 표현합니다.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이사야 24:8).” “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를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에스겔 26:13).” 음악은 주로 부자 계층이 누리는 취미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음악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경제적 심판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그들의 모든 사치스러운 삶이 그칠 것을 암시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세공업자가 없으면 도시도 없고 경제도 없다고 말할 만큼, 세공업자들은 로마 사람들의 사치와 향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멸망한 로마에서 그들의 존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로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먹을 곡식이 사라지고 경제가 망한 것을 표현합니다.
네번째는 등불 빛이 더 이상 비추지 않을 것입니다. 한때 불야성 같이 밝았던 제국이 어둠의 제국, 어둠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 ‘등불 빛’은 가로등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작은 등잔을 가리킵니다. 그런 작은 빛 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결혼과 그 즐거운 소리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뒤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7. 바벨론의 세 가지 죄목 (23b-24; 2:20; 12:9)
바벨론이 이렇게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3-24절은 세 가지 죄목을 지적합니다. 첫째, 경제적 학정(虐政)입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로마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군대의 힘만이 아니었습니다. 상인들의 힘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의 사치와 풍요는 피정복국의 백성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누린 것이었습니다. 상인들을 비록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스스로를 왕족이라고 여길 만큼 실질적 힘을 가졌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재물로 말미암아 교만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경제적 정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바벨론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바벨론 멸망의 이유는 복술(마술과 속임수)로 만국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23). 음행과 우상 숭배로 이끄는 이세벨의 교훈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2:20). 이뿐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도록 만국을 이끄는 거짓 삼위일체의 미혹도 넘쳐 났습니다(12:9; 13:14; 19:20; 20:3,8,10). 그 핵심은 우상 숭배와 영적 음행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바로 이런 속임수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전세계의 사치품을 안방까지 제공하는 것이 비단 1세기 로마로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1세기의 로마 보다 훨씬 더 바벨론적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벨론 멸망의 죄목은 살인입니다. 24절은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은 성도들의 순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도들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사악한 제국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힘이 곧 정의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라는 말까지 부끄럼 없이 합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정권이 무고한 생명들의 피 흘림 위에 세워졌습니까? 가깝게는 전두환 정권이 그랬고, 지금은 미얀만에서 그런 무참한 피 흘림이 한 달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수많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내쫓고 죽임으로써 그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북한과 구 소련, 중국과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많은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8. 교훈과 적용 (4,10,17,19)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시 4절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물질이나 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1세기 말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이라고 불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경제적 폭력과 불의, 세상이 제공해주는 물품들이 우리들의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기는 우상 숭배적 삶의 방식, 그리고 누가 죽어가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가득한 바벨론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크고 견고하여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바벨론의 정신과 생활 방식에서 얼마나 자유하십니까? 우리는 바벨론의 체제와 가치와 정신에 이미 파묻혀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두려움 가운데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이 제공하는 사치, 덧 없는 쾌락에 삶을 맡기는 생활 방식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런 바벨론의 죄악들에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은 이 땅에서 물질주의적 삶, 사치와 허영에 마음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영적 주소지는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큰 성 바벨론입니까,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까? 여기에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멸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왕들과 상인들과 뱃사람들이 하나 같이 말합니다.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10),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9)”라고 말입니다. 그날 여러분은 멸망하는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는 자리에 설 것입니까, 아니면 하늘의 성도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자리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개개인들로서 바벨론의 삶을 저항할 힘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합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서게 될 때, 우리는 바벨론에 저항할 힘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우리 벧샬롬의 모든 교우들이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막강한 로마 제국의 정죄를 받고 밧모 섬에 유배 간 노사도 요한은 그 제국의 절정기에 제국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말의 고난 받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고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무너진다는 생각만 해도, 벌써 아까운 것들이 생각나서 끔찍합니까? 두려워하십시오. 언젠가 우리는 미국의 멸망을, 중국의 멸망을, 일본과 러시아의 멸망의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멸망도 볼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체제가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모두 무너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의지할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의 삶을 배우십시오. 거기에 점점 더 익숙해집시다. 세상 나라들은 멸망 당하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