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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4). 짐승과 음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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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4). 짐승과 음녀의 비밀

요한계시록 17:7-18, 요한계시록 20:1-8, 에스겔 23:11-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1-24

말씀내용
지난 시간에 우리는 짐승을 탄 음녀의 환상을 본 요한의 반응이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긴’ 것이었음을 보았습니다(7). 그래서 이제 요한이 본 환상을 설명해주려는 천사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사실 책망에 가깝습니다. 요한은 국가 권력과 연합한 사악한 경제-종교 체제의 위용을 보고 놀랐고 두려웠고 번민했습니다. 요한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볼 것을 기대했는데(1), 점점 세력이 강성해지는 음녀를 보았으니 이해할만도 합니다. 그래서 천사가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7). 이 말처럼, 우리는 음녀와 짐승에 관한 비밀을 이제 듣게 될텐데, 내용이 쉽지 않습니다. 이 본문의 해석에서 디테일한 부분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히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닫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짐승의 비밀 (8-14; 1:4,8; 4:8; 1:18; 2:8; 13:12-13; 20:3,7-8; 11:7; 13:1)
먼저 8절에서 짐승에 대한 말로 시작합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8).”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치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짐승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에 대한 삼중 묘사의 패러디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 1:4)”로, “(나는…)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계 1:8)”로, 그리고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 4:8)”로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살아계신 어린 양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합니다(계 1:18; 2:8).
이 짐승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그가 치명상을 입었으며 그 효과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짐승은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아서 이적을 행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계 13:12-13). 그런데 여기서 짐승에 대한 묘사가 20:3에 묘사된 사탄의 이력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요한계시록 20:3).”
사탄도 전에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정적 패배를 당한 뒤 무저갱에 갇혀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잠깐 놓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표현은 지금 사탄이 자기 수하인 짐승을 데리고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서, 하나님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하기 위하여 마귀가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일을 주권적으로 억제하신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세상 끝에 잠깐 옥에서 놓여 나라들을 미혹하고 끌어모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20:7-8). 그러므로 사탄이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장차 올라올 것인데, 사탄의 수하인 짐승도 이 패턴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그러신 것처럼 말입니다.
짐승도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것을 11:7에서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요한계시록 11:7).” 그가 올라오는 시기는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복음증거의 사역을 마치게 되는 때,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었을 때에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와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 짐승은 13장에서 본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고(13:1) 국가적 권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짐승은 물론 역사의 한 시점에 일어날 특정한 존재(독재자나 정권)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더라도 그 그림자 혹은 유사 세력들이 역사상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적그리스도들이 이미 나타났지만(사도들의 시대에도) 하나의 적그리스도가 장차 나타날 것이라는 점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존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강력한 정치적 세력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애굽의 바로, 앗수르의 산헤립,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같은 자들이 있었고, 신구약 중간시대에는 유대인을 학살하고 박해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와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의 유아들을 학살한 헤롯 대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나라와 정권을 치시고 그들을 왕위에서 쫓아내시기까지 그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향한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라고 표현됩니다. 하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약 시대에 로마의 네로 황제 같은 존재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이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기는 짐승의 성공은 이전보다 더 커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요한이 놀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짐승은 무저갱에서 올라와 ‘한동안’ 권세를 부리지만(12) 결국 ‘멸망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8,11). 마지막 때에 결정적인 그 짐승이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오기까지 교회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통해서 복음은 전세계로 전파될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 전파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올 때, 땅에 사는 자들은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길’ 것입니다(8). 이들은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대신 짐승을 섬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짐승의 등장에 열광합니다. 필립 휴즈의 말입니다. “세계 지배를 열망하는 전제적 제국은 언제나 바벨론 제국 시민들의 놀라움과 숭배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짐승의 특징이었습니다. 짐승은 반기독교적인 세계 제국을 꿈꿉니다. 히틀러의 나찌가 독일에 등장했을 때, 분별 없는 독일 국민들이 열광했던 것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이상에 취해서 꽃다운 젊은이들이 가미가제라는 자살 특공대를 자원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짐승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8절은 짐승을 숭배하는 것, 우상 숭배의 종교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일곱 머리 (3, 9-11; 13:12)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고 했습니다(3). 천사는 9절부터 일곱 머리를 설명하는데,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해석하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지혜를 가진 자들만이 이제 설명하는 비밀을 깨달을 것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게 만듭니다. “주님,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9b-10a)”고 했습니다. 도시 로마는 일곱 개의 구릉이 있는 곳에 세워진 도시였기에, ‘일곱 언덕의 도시(seven-hilled city)라 불렸습니다. 그래서 ‘일곱 산’은 로마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을 받은 성도들은 이 말을 로마로 이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로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모든 적대와 반대의 전형이었고 짐승은 이제 무저갱에서 올라와 일곱 산 위의 도시가 중심이 되어 다스리는 적대적 세계 질서의 화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더 확장된 이해가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이고, 산은 힘을 상징합니다. 즉, 일곱 산은 나라가 가진 절대권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며 일곱 왕이라고 했습니다. 일곱 왕은 압제하는 정치적 권력의 충만함을 가리킨다고 본다면, 그레고리 비일처럼 “일곱 산과 일곱 왕은 신적 특권을 사칭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국가의 거짓 주장에 복종하지 않을 때 그들을 박해하는 모든 시대의 세상 정부의 압제 권력을 표상한다.”고 좀 더 넓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10절은 일곱 왕을 설명합니다.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10).” 다섯은 망했고, 하나(여섯째)는 현재 있고, 다른 하나(일곱째)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르면 ‘잠시 동안’만 머물 것입니다. 망한 다섯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의 황제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문제는 지나간 로마 황제 5명을 꼽을 때, 누구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아주 짧게 통치한 황제들도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데서 너무나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현재 있는 황제가 누구냐, 아직 이르지 않은 일곱째는 누구를 가리키는가도 복잡한 문제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일련의 제국들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애굽, 니느웨,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제국 등을 언급할 수 있을텐데, 이 해석도 황제 해석과 비슷한 문제를 피할 수 없을 뿐 더러, 본문이 일곱 왕이 왕국이 아닌 왕을 의미한다는 점도 난점입니다.
가장 만족스러운 해석은 묵시문학의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망한 다섯 왕이 누구냐하는 퀴즈를 내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17:10에서 요한의 우선적인 관심은 독자들에게 포악스런 일곱 통치자들의 마지막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리는데 있다.” 말하자면, 이제 다섯이 지나갔고 현재는 여섯째이며, 일곱째 곧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신자들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이 될 것이라는 위로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주님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일곱 교회는 물론 실재했던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일곱 왕도 이런 원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물론 실재하는 로마의 황제들일 수도 있지만, 모든 시대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통치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마지막 때가 가까운 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이고, 영적 경계심을 풀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1절이 또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11).” 일곱 머리에서 다시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 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짐승은 ‘여덟째 왕’인데 ‘일곱 중에 속한 자’입니다.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는 말은 강조하기 위한 반복입니다. 여덟째 왕인 이 짐승은 일곱 머리에 속하지만 일곱 머리와는 구별되고 짐승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즉 이 존재는 또 하나의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적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말합니다. “여덟째 머리는 다른 머리들과 동일하게 악한 본성을 갖고 있지만 사탄의 권능을 훨씬 더 충분히 구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머리들과 다르고, 또한 그의 통치에서 역사가 끝난다는 점에서도 다른 머리들과 다르다.”
앞의 일곱 왕은 인물을 가리킬 수 있겠지만, 이 짐승—여덟째 왕은 악한 세력이 인간 통치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 그 자체, 악의 화신일 것입니다. 이점에서, 짐승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역사에서 드러나는 통치자나 세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적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저갱으로부터 나오는데, 메시아의 재림 직전, 잠깐의 시간 동안 활동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는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여덟’이라는 숫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덟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주님은 안식후 첫날 즉 여덟째 날에 부활하셨고, 그것이 우리가 모이는 주일입니다. 여덟이라는 숫자를 사용한 것은, 짐승도 주님의 부활을 패러디하여 자신의 부활을 알리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이 짐승은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입니다(13:12).
B. 열 뿔 (12-14; 16:12-16)
이어지는 12-14절은 짐승이 가진 열 뿔을 설명합니다. 열 뿔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12).” 열 뿔은 열 왕입니다. 아직 나라와 권세를 갖지 못했지만, 나중에 짐승의 등장과 함께 한동안 임금의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열 뿔과 열 왕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활동하는 보편적으로 충만한 불경건한 왕적 권세의 마지막 단계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단계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1세기 말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보면, 열 왕은 아마 로마가 다스리던 식민 속주들의 가신-왕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헤롯 대왕처럼 로마가 정복한 나라에서 로마의 허락을 받아 다스렸던 소위 가신-왕들입니다.
여기서도 열 왕이 구체적으로 어느 왕들을 가리키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본문의 의도는 아닙니다. 숫자 10은 7처럼 완전수입니다. 이는 과거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던 유럽연합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16:14을 보지요.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14).” 바로 이들 온 천하 왕들이 열 왕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지막 때의 전쟁을 치르려는 사탄과 짐승에게 동조하여 아마겟돈 전쟁터에 모여듭니다. 여섯째 대접 심판에서 보았던 소위 아마겟돈 전쟁입니다(계 16:12-16). 그리고 한 뜻이 되어 자기들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바칩니다(13). 미혹당한 연고입니다. 로버트 마운스의 말로 열 뿔을 정리하면, “열왕은 적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는 땅의 만국의 권세들의 총체를 대표하는 순전히 종말론적인 인물들”인데 그 인물들은 정치적 세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모여서 싸우려는 대상은 어린 양입니다. 그러니 승패는 뻔합니다. 14절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4).” 그들이 싸우려는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에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길 것입니다.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천사가 설명해준 짐승에 관한 비밀입니다.


2. 음녀의 비밀 (1,4,15-18; 겔 23:11-29; 왕하 9:36-37)
15-18절은 음녀에 대한 비밀을 말합니다. 1절에서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았다고 했는데, 15절은 그 물이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보편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음녀의 영향력은 전세계적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천사는 놀라운 것을 말합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
모두 한편인 줄 알았는데, 악한 세력 가운데 분열이 발생합니다.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일곱 인의 심판 가운데, 둘째 인의 심판에서 본 바, 내전, 분열의 양상을 보여줍니다(계 6:3-4).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망하게 한다는 이 묘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사랑했고 바벨론에게 더럽힘을 당하고 애굽 땅에서 음행을 저지른 유다의 파멸을 선고하는 에스겔 선지자의 생생한 풍유를 연상하게 합니다(겔 23:11-29). 즉, 짐승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벌거벗기고 살을 먹고 불로 사르는 것은 심판에 대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음녀는 구약의 악녀 이세벨의 운명(왕하 9:36-37)처럼 될 것입니다.
결국 음녀와 짐승의 악마적 동맹이 해체되고, 짐승은 정치 군사적 힘으로 음녀가 가진 경제 체제를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17).”
열 뿔과 짐승은 한 뜻을 이룹니다. 그리고 열 뿔은 자기들의 권세를 짐승에게 바칩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17절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렇게 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목적—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고 천사는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 18절은 음녀의 정체를 밝힙니다.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18).”
음녀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입니다. 18장은 이 음녀의 존재와 멸망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음녀는 1세기 말에는 바벨론이라고 불리는 로마제국을 카리켰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이 큰 성은 존재합니다. 아직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녀는 역사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악한 경제적, 종교적 세상 구조 전체를 가리킵니다. 로마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퇴폐적 음행, 우상 숭배, 사치, 권력 남용은 역사에 대대로 수없이 반복되어 재현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음녀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고 구현합니다. 그 특징을 우리는 지난 주일, 그녀의 사치와 함께, 그녀가 가진 매혹적 금 잔에 가득 담긴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에서 보았습니다(4). 한 마디로, 돈이 지배하는 세상, 경제 논리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세상이 바로 큰 성인 음녀인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A. 때를 분별하고 살라—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를 조심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라.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봅시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때를 분별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있는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9). 오늘 이 말씀은 전체적으로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끝이 매우 가까운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이 살아가는 자세이고, 그 핵심은 때를 분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재림의 때를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일을 말씀합니다.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도 일어나지만, 짐승이 패배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부활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세력을 확장하고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리석게도 짐승의 출현을 확인하려고 억지로 말씀을 풀려고 합니다. 그것이 과거 유럽연합이나 바코드에 가해진 의심들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우리는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짐승과 음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상에 통용되는 힘의 논리(짐승)와 경제의 논리(음녀)에 지배를 당하면서 살지 않도록 은혜를 구하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권력 지향적인 삶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치와 물질 추구의 삶, 바벨론의 삶을 버리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곧 망해 없어질 세상과 권력에 기대어 살지 마십시오. 소위 번영 신학과 같은 거짓 복음,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교회가 힘과 돈의 논리에 무너져버리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누구이고 음녀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호기심에서 벗어나(이것은 지혜 있는 뜻이 아니라 어리석은 정신입니다), 이미 우리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짐승과 음녀의 본질과 정신을 파악하고 거기에 매이지 않는 삶,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신자의 마땅한 반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세력은 잠깐 동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짐승은 8절과 11절이 거듭 강조하듯이, 멸망으로 들어가고야 말 것입니다.
B. 성도가 누릴 위로—하나님의 주권
성도의 위로가 여기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짐승은 해봤자 예수님처럼 되려고 위장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성도는 그의 모든 공격에서 지키심을 받습니다. 설령, 짐승의 세력이 우리 육체의 목숨을 끊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 영혼은 안전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지키심을 받을 것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정이 17장을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모든 악의 세력의 간계와 부패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이 전체 과정을 통제하고 계시고 심지어 짐승이 음녀 바벨론에게 등을 돌리고 파멸시키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어린 양이 사탄과 짐승과 열 뿔의 세력을 다 꺾으실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혜롭게 살도록 주의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