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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9).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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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9).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

요한계시록 4:1-11, 에스겔 1:26, 28, 스가랴 4:2, 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4-05

말씀내용
1. 요한계시록 4장의 두 개의 이미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마 4:17; 막 1:15)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로 같은 본문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4장에 나타나는 두 개의 큰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살펴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의 하나님의 보좌 환상은 크게 두 개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로 나타나는 정치적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시며 모든 피조물은 그 주권에 복종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오늘도 그 주제의 어떤 요소들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큰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이미지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적 존재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정치적 이미지와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라는 일차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마 4:17),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심으로써(막 1:1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와 “회개하라”는 명령입니다. 나라가 왔다는 표현은 대단히 정치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만 35년의 한반도에서의 일제의 강제 지배가 종언을 고하였습니다. 많은 대한의 백성들이 저마다 기뻐 감격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이제 이 땅을 다스리던 권력, 정치세력, 일제의 세력은 물러가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이때, “새로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전의 정권, 그전의 정부는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는 과거의 나라를 심판할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 한국 역사는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역사적 심판을 행하지도 못했습니다. 진정 새로운 나라가 왔다면, 그 나라와 주권은 과거 일제에 기생하던 주구(走狗)에 대한 심판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새 나라가 왔다는 것은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는 여기까지입니다. 친일을 하다가 애국자로 변신한 기회주의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 진정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새 나라, 새 나라가 섰는데 여전히 무너진 나라에 충성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이제 너희 충성의 대상을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것은 정치적 함의를 가지는 것이었고, ‘회개하라’는 명령도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당시 로마 제국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교회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충성의 대상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비유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너희가 제대로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는지의 여부를 마지막 심판의 때에 다룰 것이라는 내용이, 므나 비유, 달란트 비유,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등 많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진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여 세상의 왕이고 너희 충성의 대상인, 돈과 권력, 성공으로부터 돌이켜,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메시지가 어떤 이들에게는 한 없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권력은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는 메시지는, 정치적으로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충성을 드린 신자들, 비록 환난과 고난이 그 대가로 주어진다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을 지킨 신자들에게는 무한한 위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815 해방이 왔을 때, 대한독립을 위해 가족들과의 생이별,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왔던 분들에게 얼마나 큰 감격과 위로였겠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비록 고난 가운데 있으나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하늘 보좌 환상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정치적 이미지와 예배의 이미지, 두 가지 모두를 보아야 합니다. 내 충성의 대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시고 온 세상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맞나?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혹 남편이, 또는 자녀들이나 부모님이 여러분의 충성의 대상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로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회개한 사람이라면, 하늘 보좌 환상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만큼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충성스럽게 잘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와 무너짐과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셨고 이기신 주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긴 자들입니다. 우리 연약함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믿음과 복음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2. 보좌에 앉으신 이(3; 출 24:10; 겔 1:26,28; 딤전 6:16; 계 21:11,18,19)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을 읽을 때 정치와 예배의 두 가지 이미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유념하면서, 우리는 계속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인데 3절입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요한계시록 4:3).”
요한은 2절에서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진 것을 보았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3절에서는 ‘앉으신 이’를 묘사하는데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거나(창 6:6-7), 뜻을 돌이키기도 하신다고(욘 3:10) 한 표현들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감정에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보좌에 앉으신 이의 형상을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본 것은, 우리와 유사한 하나님일 수 없고, 너무나 초월적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와 찬송과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특이한 방식으로 묘사하는데, 벽옥, 홍보석 그리고 무지개가 둘려 있는 보좌의 녹보석 등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 각각의 보석들이 상징하고 드러내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살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보석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요한계시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출애굽기 24:10은 모세와 대제사장 아론과 그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인의 장로들이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던 기이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 장면을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출애굽기 24:10).”
하나님의 발 아래에는 청옥(사파이어)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부름을 받을 때 보았던 환상도 오늘 말씀과 유사합니다. 에스겔 1:26, 28절입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에스겔 1:26,28).”
하나님의 존재는 이렇게 진기한 보석으로 표현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생기셨다, 저런 성품이시더라 하는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을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 바울 사도가 썼듯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초월적 특성들이 보석들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 보석 각각을 통해서 의미하는 바를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먼저 벽옥을 생각해 봅시다. 벽옥은 영어로는 재스퍼(jasper)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보석은 가장 선호하는 보석이었답니다. 요한계시록 21:11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할 때,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계 21:11). 또 이어서 “(새 예루살렘의)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고 했습니다(계 21:18). 이뿐이 아닙니다. 그 성곽의 기초석 열 두 개를 소개하는데 “그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라고 썼습니다(계 21:19). 유난히 벽옥은 하나님의 성에 비추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는데 대표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홍보석인데, 홍보석은 영어로는 사디어스(sardius)인데 헬라어에서 온 명칭입니다. 이 보석이 발견된 곳이 사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천연 요새였던 사데는 트몰로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에서 건져내는 사금으로 큰 부를 누리던 도시였다는 것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사금과 함께 사데를 유명하게 한 것은 또한 이 홍보석이었습니다. 홍보석은 보통 루비(ruby)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고 보는데, 이것이 붉은 빛을 띄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세번째로 보좌에 앉으신 이를 묘사하는 보석은 녹보석, 에메랄드(emerald)입니다. 녹색을 띈 이 보석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상징한다고 보는데, 녹보석에 대해서는 부연적 묘사가 있습니다.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는 것입니다. 무지개가 보좌에 둘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중에서도 긍휼과 자비가 베풀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무지개와 녹보석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보석이 진노와 심판을, 무지개와 녹보석이 은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이 둘이 합하여 벽옥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무지개는 노아 홍수 이후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였듯이, 여기서도, 하나님은 보석들과 무지개를 통하여 이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심판과 새 창조를 통해 일어날 것이고, 계시록의 남은 부분은 그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3. 보좌의 광경(5a; 출 19:16; 계 8:5; 11:19; 16:18; 13:1; 11:7; 사 51:9-10; 계 21:1; 22:1)
이제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보좌와 보좌 주변에 관한 묘사를 보려고 합니다. 5절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은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광경과 소리입니다.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반포하시려고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광경을 출애굽기 19:16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애굽기 19:16).”
그러니까 ‘번개, 음성,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그런 광경이 벌어졌다면 하나님이 항상 앉아 계시는 보좌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요한계시록에는 3번 더 나오는데, 3번 모두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봅시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5).”이것은 일곱 인의 심판이 마치고 일곱 나팔의 심판이 시작되는 장면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 이 말씀은 일곱 나팔의 심판이 마치는 장면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세번째입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요한계시록 16:18).” 이것은 일곱 대접 심판이 마치는 장면입니다.
이 세 경우가 모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되는 심판의 시리즈가 하나씩 마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4:5의 광경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모든 심판들이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 다음, 6절에서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 모든 말씀들이 하나의 상징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읽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정확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보좌 앞은 수정과 같이 맑은 유리 바다와 같(았)다.” 새번역성경은 “보좌 앞은 마치 유리 바다와 같았으며 수정을 깔아놓은 듯 했습니다”라고 잘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바다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아서 알고 있듯이,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을 풍성하게 인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다 이미지는 무엇을 전달하는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다는 요한계시록에서 악의 실재를 상징합니다.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3:1).” 짐승이 나오는 곳이 바다입니다. 바다는 짐승의 진원지인 무저갱(11:7) 같은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풍부한 배경을 가집니다. 이사야 51:9-10입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이사야 51:9–10).”
여기서 바다는 용이나 바다 괴물의 거처입니다. 사실 이사야의 말씀은 홍해를 연상시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를 가로막은 바다였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말리시고 거기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런 바다의 개념은 시편 74:12-15와 에스겔 32:2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좌 앞이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와 같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그 혼돈한 바다와 바다의 세력을 이미 완전히 정복하셨고 잠잠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히 혼돈의 세계를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는 22:1에서 바다가 아니라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대적하는 사탄적 악의 근원인 바다가 보좌에 근원을 두는 구원의 강에 의해 제거되고 대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이 본 보좌 앞의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 같은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적대적 악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이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다 이미지는 구약성경에서 또 하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바다라고 불리던 물두멍입니다(왕상 7:23-26; 대하 4:2-5). 이것은 성막의 물두멍에 비하면 규모가 너무나 커서 ‘바다’라고 불렸습니다 열 두 마리의 황소가 받치고 있었고 직경이 5m, 둘레는 약 15m, 높이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2.5m에 이르는 둥근 수조인데, 물이 4.5톤에서6톤까지 담겨졌습니다. 이 거대한 바다 외에, 열 개의 작은 규모의 물두멍도 솔로몬 성전에는 있었습니다. 이것의 용도는 제사장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에 손발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제사장들의 정결함, 신약적 의미로 말하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보좌 앞의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솔로몬 성전의 바다와 연결된다면,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정결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에서 하나님의 승리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이 사도 요한이 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보좌 주변에 대한 묘사들입니다.


4.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5b; 1:4; 3:1; 5:6; 슥 4:2,6)
우리가 4장을 읽을 때, 주목하게 되는 존재는 보좌에 둘린 이십사 보좌들에 앉은 이십사 장로와(4)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6)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우리는 1:4에서 이미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라는 묘사를 보았고 이는 성령님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영’이라는 표현은 3:1에서 사데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영’에 대한 묘사가 한 번 더 나오는데, 5:6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요한계시록 5:6).”
성령님을 일곱 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오늘 5절에서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으로, 또 ‘일곱 눈’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스가랴 4장을 보아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 중에 순금 등잔대를 봅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스가랴 4:2).”
순금 등잔대는 성막에 있는 순금등대, 히브리 말로 ‘메노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 중에 이것을 보는데, 그 모양이 성막의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의 등잔대 위에 큰 기름 그릇이 있습니다. 그 기름 그릇으로부터 일곱 등잔이 나가고, 일곱 등잔은 각각 일곱 관으로 나뉘어져서 모두 합하면 49개의 심지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입니다. 49개의 심지에서 불이 타고 있는 순금 등잔대의 환상은 정말 장관이었을 듯 합니다. 이 환상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4:6에서 천사가 환상을 설명합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성령의 능력으로 성전 재건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4:10에서는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부연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알다시피 완전과 충만을 의미합니다. 일곱 눈은 세상을 완전하게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6절에서 설명했듯이, 이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에서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온 세상을, 특히 교회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그들을 핍박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감찰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셨다”고 표현한 대로(3:1)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교회에게 부어주셨습니다(행 2:33). 주님은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인 일곱 별을 당신의 전능하신 손에 붙들고 계시고, 또한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흑암 속에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 환히 비추시고, 진리를 밝히 드러내 흑암에 붙잡힌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5. 교훈과 적용
요한은 이렇게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이, 성부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인간적인 어떤 모습으로도 형언될 수 없기에, 성령의 영감으로 그는 벽옥, 홍보석, 녹보석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와 속성을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또 보좌로부터 온 세상에 부어질 심판의 전조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보좌 앞은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온 세상의 모든 악을 다 정복하고 이기셨고, 이제 바다는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처럼 평안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성령님께서는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 처럼 계셔서 온 세상을, 특별히 고난을 겪는 주의 백성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온 우주에서 하나님의 일곱 눈이신 성령님을 피할 수 있는 존재도 없고 사건도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본 하늘 보좌의 환상을 아직 다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만 보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도 요한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의 예배를 드릴 준비가 되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저 하늘 보좌에 앉아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만왕의 왕이라는 타이틀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무소부지하셔서 모든 것을 아심에도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저 먼 하늘에만 앉아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본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만왕의 왕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고, 그 무한히 광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이 작은 피조물들의 모든 일상까지도 보고 알고 계시며,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악의 세력들을 허용하시고 우리로 고난 당하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최고의 반전을,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최고의 유익을 위해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의 마음은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벅차올라, 하나님께 영광의 예배를, 경배를 마음을 다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알고, 매일 매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충성의 대상임을 알고 충성을 드리며 사십시오. 세상의 성공과 부와 권력이 여러분의 충성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돌이키십시오. 그 삶은 위험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보고 사십시오. 거기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충성을 드러십시오. 땅의 일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인 양, 땅의 일들이 내 삶을 결정할 것인 양 생각하고 거기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