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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8). 하나님의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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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8). 하나님의 주권

요한계시록 4:1-11, 이사야 61:1-3, 에스겔 1:26-2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3-29

말씀내용
모든 사도들이 다 죽고 홀로 남은 노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왔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계 1:10). 요한은 외롭게 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영광을 입으신 주를 환상 중에 보게 됩니다.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저는 이 장면을 말로 형언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환상은 이어졌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처음에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게 네게 보이리라(계 4:1b).” 그리고 요한이 본 하늘의 환상은 한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 그리고 주변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하늘의 예배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이 쓴 이 말씀을 우리는 읽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오늘 교우 여러분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 모두는 이 기록된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요한 (사 6:1-3; 겔 1:26-28; 단 7:9-10)
먼저 요한이 본 보좌 환상이 구약 성경의 몇 본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살펴봄으로써, 본문에 대한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6장은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잘 알려진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1-3을 보겠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이사야 6:1–3).”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고 천사들인 스랍들이 모시고 서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송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본 것이 요한이 본 환상과 얼마나 비슷한지 아시겠습니까?
두번째는, 에스겔입니다. 역시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입니다. 에스겔 1:26-28을 읽겠습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에스겔 1:26–28).”
에스겔은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을 보았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한 형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습니다. 불과 광채, 그리고 무지개 같은 것도 보았습니다. 이 본문 앞에서는(겔 1:4-14) 네 생물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요한이 본 환상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번째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7:9-10입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다니엘 7:9–10).”
다니엘은 왕좌를 보았고, 거기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 불을 보았고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판을 베푸는데 사용된 책들이 펴져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실 다니엘 7장의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 4-5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다니엘이 본 환상은 요한이 본 환상과 가장 깊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와 에스겔, 다니엘과 요한이 본 환상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 중 유독 이들에게 하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까?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으면서 성전에서 그 환상을 본 것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는 유다 역사에서 52년을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남북 왕국을 통틀어 가장 오래 통치한 왕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유다는 부강했고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런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이사야 만이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번영을 준 것은 웃시야 왕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서 만유를 다스리는 나 여호와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어떻습니까? 에스겔은 이 환상을 본 것은 유다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백성의 정착지인 그발 강가에서 이 환상을 보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권세 앞에 무력하게 짓밟혀버린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유다 백성들과 함께 비참한 포로로 먼 길을 걸어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본 그 무서운 바벨론의 권세가 너희를 다스리는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이 환상을 통하여 선지자 에스겔에게 “내가 그들 위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노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포로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에스겔과 그 상황이 비슷합니다. 소년 시절,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하기 전에 다니엘은 인질로 바벨론에 끌려와 바벨론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장수하게 하시면서, 다니엘에게 많은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들과 페르시아의 왕들 앞에 서서 섬기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는 그들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있음을 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통해서, 그리고 계시를 통해서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무엇이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과 요한을 묶어주는 요소인지, 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하늘 보좌 환상을 보게 하셨는지를 조금 더 이해하시겠습니까?
요한도 이 구약의 인물들과 비슷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절한 대가로, 노구를 이끌고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해 온 요한은 어느 주일에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은 로마 제국과 그 보좌에 앉는 황제 가이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 때, 그는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상의 존재들처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 4:11).”라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요한도 당대의 교회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1세기 말의 교회들은 모두 로마 황제의 절대적으로 보이는 권세 아래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특정하여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13).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 요한계시록 4-5장에 기록된 하늘 보좌 환상을 통해서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 포인트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는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로마의 황제가 아니고, 사탄도 아닙니다. 그 절대 권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의 의미 (시 115:3; 22:28; 딤전 6:15; 시 99:1; 대상 29:11)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는 그의 걸작인 『하나님의 주권』(1918년 초판, 1921년 개정, 1929년 재개정)을 32세의 나이에 처음 썼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권과 왕권과 신격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이라는 말은 그는 가장 고귀하셔서 하늘에서 천군 가운데에서 또 땅의 만민 가운데에서 당신의 뜻대로 행사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이라는 말은 그는 전능하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를 잡으셔서 아무라도 그의 계획을 꺾으며 그의 목적을 좌절시키거나 또는 그의 뜻을 물리칠 자가 없다(시 115:3)는 말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이라 함은 그는 열방의 주재(시 22:28)시니 열국을 세우시며 제국들을 폐하시며 또 당신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대로 모든 군왕들의 행로를 작정하신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는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시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이 분이 여러분이 알고 섬기는 하나님이 맞습니까? 여러분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주권적인 하나님이신 것이 맞습니까? 아더 핑크는 이 책을 32세 때인 1918년에 썼습니다. 그리고 1921년과 1928년에 두 차례 개정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책은 1928년에 개정한 3차 개정본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개정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더 핑크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그가 쓴 책 이름도, 관념도, 지식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성경 교사요 목사는 42세가 되던 해부터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그가 간절히 원했던 목회의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영국 북서부의 아우터 헤브리디즈(Outer Hebreides) 제도의 외딴 섬, 루이스 섬의 스토너웨이(Stornoway)에서 설교를 쓰는 일에 전념하다가 그를 장례를 치러줄 교회도 없이 외로이 66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이언 머레이(Iain Murrary)는 아더 핑크의 전기(『아더 핑크: 하나님의 숨은 보석, 20세기 위대한 성경학자』, 복있는사람, 2013)를 이런 말로 마칩니다.
“핑크에게 주권적인 은혜는 하나의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그의 전 존재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었고, 그가 장차 이르기를 소망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었다. 1908년에(22세) 마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이 찬송을 그는 영원히 부르기 원했다.

나사렛 예수 앞에
서서 놀라네
멸망할 부정한 이 죄인을
어찌 주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지.
기이하고 놀랍도다!
나 영원히 찬송하리라.
기이하고 놀랍도다.
내 구주의 사랑하심이.”

물론, 이사야,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고 3년 동안 동행했던 요한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이들에게 하늘 보좌 환상을 보여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진 시련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위에 있는 권세는 실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짓밟고 성전을 파괴한 바벨론의 주권이 두려웠고,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고 인도까지 포함하는 세상 127도를 다스렸던 페르시아 제국의 권세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고 황제들은 신격화되어 숭배받기를 요구했습니다.
보좌 환상은,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일어난 일들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그러하며, 장래에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고 확정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와 현재에 그들이 겪은 참담한 일들 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높아진 모든 악한 권세를 심판하고 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렇게 이루실 것을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겪는 고난이 깊고, 공동체가 직면하는 환난이 클수록, 이것을 확신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요한에게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아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너희가 겪는 시련은 로마 황제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주는 시련임을 알거라. 모든 상황은 내가 허락하고 내가 주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라. 나는 너희를 구원하고 너희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심판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우리의 유익을 이루실 것이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니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천군천사들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시편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편 99:1).”
아더 핑크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머릿말 앞에 역대상 29:11 말씀을 써넣었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역대상 29:11).”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요한계시록 4:1에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기 보다,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을 말씀하실 수 있으시고, 우리는 그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이 성도에게 주는 위로 (욥 1:21; 롬 8:28)
그렇다면, 요한이 이 환상을 통해 무엇을 느꼈으리라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여러분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하는 것은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밧모 섬에 유배당한 노사도 요한에게 이 환상을 주신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성도에게 주는 유익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대로 알고 믿는다면, 그것은 무엇 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면, 그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일을 행하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 잠잠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고난 속에서 종종 하나님을 향해 “이해가 되질 않아요. 왜 이래야 하는거지요?”라고 묻는 말들이 우리 입술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욥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도리어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성도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큰 슬픔에 휩싸여 분노해야 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충만한 위로로 감싸줍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쓴 뿌리가 내릴 때 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은 물론 이해가 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하신 데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를 배워서 알고 이해함으로써 위로가 충만해지는게 아닙니다. 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그 무한하신 권세를, 그 주권을 봄으로써 요한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한 것입니다. 1세기 말 초대 교회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일일이 요한이 본 환상을 다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대신 주께서는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친히 조명하여 주심으로, 깨닫게 하시고 요한이 보았듯이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한 충만한 하나님의 위로를 얻어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찰스 2세(1660-1685)의 적대적 탄압으로 큰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언약도(Covenanter) 알란 카메론(Alan Cameron)의 일화가 감동적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다른 언약도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스코틀란드 왕의 권위를 거부한 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가 처형을 하루 앞두고 있던 날, 찰스 2세는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 Cameron, 1648-1680)를 같은 죄목으로 먼저 처형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그 잔인 무도한 관리들은 아들 리처드의 절단된 머리와 두 손을 알란에게 가져와 이것들을 알아보겠냐고 묻습니다. 알란은 “알지요. 알고 말고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와 손들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알란의 믿음은 그들이 바랬던 대로 비통함과 분노에 압도당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알란은 주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묵상함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이오. 주님의 뜻은 선하시니 그분은 나에게나 내 아들에게나 잘못된 일을 행하실 수는 없소.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언제나 따를 뿐이오.”(Richard Phillips, Revelation,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ies, P&R)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기뻐하고 큰 시련을 견뎌낼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 말씀으로 고난 중의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요한에게 보여 주심은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단지 당대의 교회와 성도들만을 위해서 이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포함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지금 온 세계가 인류 역사에 전례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인해 당황하고 있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똑똑한 지성들은 저마다 뭔가를 말하지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확신을 갖고 단정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 지성은 속수무책입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국의 권력도, 중국의 권력도 이 바이러스의 감염을 멈추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이 지구를 몇 바퀴 돌게 하실 수도 있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지금 당장 오늘 밤이라도 이 모든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 주석의 능력과 권한에 있지 않습니다. 또한 어느 뛰어난 지성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이 이 불확실한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말도 안 되는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 떨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삶의 무게와 두려움이 여러분을 짓누를 때, 또는 분노와 낙심에 눌릴 때마다 잠시 여러분의 눈을 들어 요한이 본 하늘의 보좌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읽으십시오. 성령님께서 조명하심으로 이 말씀에서 요한이 본 환상을 보여주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온 세상을,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루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평안과 위로를 누리도록,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이 일은 밧모 섬에서 어느 주일에 홀로 예배하던 사도 요한에게 보여진 환상입니다. 그 주일에 요한의 곁에는 같이 예배하는 형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도 없었고 허름한 예배당 조차 없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노사도 요한은 비참한 인생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청년 시절,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을 만난 이래, 주님을 따르고 섬겼던 요한은 이제 90대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밧모 섬에 유배 당해 온 비참한 노인입니다. 이것이 평생 주님을 따른 대가란 말입니까?
주님은 그 주일에 그 하늘 보좌 환상을 보게 하심으로써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위로하십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여러분은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 인생을 마치고 주님께로 가게 될 때, 주님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부르시면, “오 사랑하는 주님! 영광의 주님을 섬기다가 이제 갑니다.” 라고 감격하여 고백하면서, 요한이 환상으로 보았던 그 하늘 보좌에 직접 올라가 영광의 주님을 뵈올 준비가 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은 불현듯 옵니다. 오늘 그날을 준비하고 사십시오. 매일 그날을 준비하고 사는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그런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을 감당하고 살다가 가는 사람입니다. 요한, 그분처럼 말입니다. 영광의 주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