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오해에서 확신으로 20 - 율법과 복음 (2015) - (8/최종)

오해에서 확신으로 20 - 율법과 복음 (2015) - (8/최종)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20 - 율법과 복음 (2015) - (8/최종)

빌립보서 2:12-13, 에스겔 36:26-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12-27

말씀내용
<율법과 복음>(8) 빌 2:12~13; 겔 36:26~27



이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의 마지막에 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이 되었고, 그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와 죄의 형벌 그리고 죄의 세력에 매인 존재가 아닙니다. 지난 주에 칭의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라면 중생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칭의는 마음에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신분에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분은 변했지만, 전과 다름없이 죄의 권세에 눌려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의 마지막에 다룰 중요한 주제는 신자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중생의 능력입니다.

1. “네가 거듭나야 한다(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주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은 칭의뿐 아니라 거듭남, 곧 중생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중생을 웨인 그루뎀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중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하시는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는 것이 중생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입니다. 영적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져서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고 또 우리는 어떻게 중생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중생 자체는 신비스럽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신자가 반드시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인식이 됩니다. 죄 용서의 확신이라든지, 주 예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었다든지, 성경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고 싶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즐거워지는 것과 같은 변화를 통해서 사람은 중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생의 핵심은 마음의 변화, 즉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중생, 근본적인 변화: ‘새 마음을 주되’(겔 36:26~27)
에스겔 선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아래서 주실 중생의 역사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여기 ‘새 마음을 준다’고 한 것이 중생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마음의 성향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중생을 확인하게 되고, 자기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영혼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깊은 소원을 불러일으키시며,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십니다. 그는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모든 마음은 때때로 선한 생각을 품었다가 본래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 본성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변한 것입니다.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의 소원하는 바, 그 마음이 바라는 성향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중생한 자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항상 그리고 평생토록, 그가 어떤 환경과 상황에 처할지라도 지속되는 성향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선한 소원들을 품을 수 있지만, 교회를 떠나 있을 때, 혼자 있을 때에는 도무지 내 안에 그런 거룩한 성향을 느끼거나 경험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분위기로 인한 일시적 느낌을 가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자신을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듯이,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중생의 증거는 없습니다. 중생의 증거는 새 마음입니다.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13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마음에 가지게 됩니다.

3. 중생한 신자와 율법의 관계: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겔 36:27)
중생한 신자에게 율법은 더 이상 그의 참된 본성과 욕구에 모순되는 외적 규정이 아닙니다. 더 이상 율법이 돌판에 써있는, 혹은 나 자신의 바깥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중생한 신자에게는 율법이 내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중생의 기적을 통하여 그의 마음 속에 율법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시는’ 일이 성령님께서 죄인을 중생하게 하시는 기적입니다. 이 중생의 기적이 죄인 안에 일어나자, 이제 율법이 밖에서 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내적 소원이 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표현했습니다(고후 5:1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의 예언 가운데,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겔 36:27). 그래서 중생한 신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원이 율법을 따르게 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편 1:2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인데, 바로 이 사람이 중생한 신자입니다. 그 전에는 부담스럽기만 하고 싫었던 율법을 이제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은 시편 기자의 고백들을 공감하게 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6).”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시 119:47).”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62).”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7~11).” 이것이 중생한 신자가 경험하는 새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기뻐하시는 뜻을 중생한 신자의 마음에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중생한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하십니다. 그 법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4. 중생한 신자 안에 죄성의 작용
자,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풀고 가야 합니다. 중생한 신자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때로는 깊은 낙심에 이르며, 심지어는 마귀의 정죄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은 그 이유가 아직 완전히 구속 받지 못한 ‘죄의 몸’ 곧 ‘죽을 몸’ 안에 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롬 6:6,12). 좀 더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죄책(죄의 형벌)과 오염(죄의 세력)을 타고 납니다. 그가 거듭날 때 칭의로 말미암아 죄책의 문제(죄의 형벌)는 해결되지만 부패한 본성인 오염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중생으로 죄의 절대적 지배가 종식되지만 죄의 영향력은 잔존하는 것입니다. 이제 중생한 신자들 안에 여전히 잔존하는 부패한 본성은 성령의 역사인 성화로 순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신자들의 싸움은 죄의 왕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율법에 대해서 죽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그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싸움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하셨고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순종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물이 가득한 늪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이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온 몸에 오물을 뒤집어 쓴 더러운 상태입니다. 그가 ‘아, 나는 살아났으니까 이제 그냥 살자’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는 당연히 오물을 씻어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형벌, 죄의 저주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살아났으니 죄 가운데서 살자’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6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참된 칭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자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새 마음 때문에 새롭고 거룩한 소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신자는 자신이 거룩해지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는 새로운 소원이 있기 때문에 죄와 싸울 힘, 이길 능력을 얻게 됩니다. 빌립보서 2:12~13은 이런 중생의 전제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5.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면 이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이 명령을 이룰 근거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은 이 명령을 이룰 근거와 능력을 신자에게 제공합니다. 칭의가 율법의 저주와 죄의 왕노릇에서 신자를 해방시킬 뿐 아니라, 중생이 새 마음을 주고 율법을 지키고 싶어하는 새 성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에 중생한 신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의 불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너희가 해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시제적 차원을 말해줍니다. 로마서 8:28~30의 논리와 같이, 구원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심으로써 이미 영화로운 완성까지 다 이루어진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이미 완성된 일입니다. 다만 우리 편에서 볼 때, 시제적으로 경험적으로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지혜로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 마음, 거룩한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을 우리로 행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까?

6. 신자는 율법을 필요로 한다(딤후 3:16).
여기에 다시 율법이 요구됩니다. 율법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길이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계시합니다. 물론 구약 율법 가운데 의식법(ceremonial laws)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신약 성도들이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정사회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고 살아야 했던 시민법(civil laws)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 사회나 교회에서 동일한 구속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령, 국가나 교회가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moral laws)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지금 제가 설명 드린 것이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분류하고 신약적으로 적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설명이 가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이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간에도 어떤 율법 규례에 대해서는 이것이 어느 법에 속하는지 정확한 일치를 보지 못합니다. 또 여기서 우리는 구약 율법에서 도덕법만 필요하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구약은 읽을 필요가 없다거나 공부하거나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고 했을 때 ‘모든 성경’은 구약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모든 성경’ 곧 구약의 모든 말씀이 현대의 신자들에게 유익합니까?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과 기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계시적 측면입니다. 율법은 하라는 명령과 규칙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분명하게 계시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오늘날 뜨거운 이슈가 되는 동성애의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율법은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신정사회가 아닌 현대 국가나 교회에서 그렇게 죽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금하시는 뚜렷한 기준이 계시되고 있고, 이것은 오늘날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말씀으로 유효합니다. 중요한 원리는, 구약 율법에서 죄라고 한 것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죄라고 한 것을 신약 성경에서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특별히 구약의 도덕법 규정들은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순종해야 할 중요한 삶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약 성경을 볼 때, ‘이것은 구약의 규정이라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또 구약 성경에서 계시된 율법의 도덕적 기준들은 신약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요구되고 있고, 서신서들에서 사도들도 강조하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봅니다. 중생의 기적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권능 곧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분의 기뻐하시고 거룩하신 뜻을 따라서 행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 ‘소원’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신자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 곧 성화입니다.

7. ‘두렵고 떨림으로!’
그러면 신자는 어떤 자세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12). ‘두렵고 떨림’이란 말은 우리의 순종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의심과 불안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으로서 바울 사도는 ‘두렵고 떨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존경심과 경외감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사랑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한 시편 119편의 기자는 동일한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떨림은 중생의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이런 두려움과 떨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구원의 은혜를 참으로 아는 자가 어찌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삼고 살 수 있으며, 이전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중생한 신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주신 거룩한 소원을 따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히 알기를 원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넘어질 때에는 다시 정죄함의 자리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며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신자가 이 구원의 도리를 알게 될 때, 다시는 율법 아래로 들어가 정죄감에 빠져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머물 수 있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불순종함으로 넘어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그는 좌절로 미끄러져가거나 교만함으로 우쭐대지 않고,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신자로서 말입니다.

8. 은혜, 너무나 큰 은혜!(고전 15:10):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빌 2:13).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희들을 로봇이나 물건과 같이 다루지 않으시고,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루시기를 기뻐하셔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안에서 우리를 이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바울 사도와 같이 많은 수고를 하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말할 수 없이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15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열어주시는 2016년 새해와 앞으로 우리 인생에 남은 모든 시간이 이 고백으로 채워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은혜가 우리 벧샬롬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 가운데 풍성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