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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9C). 언제까지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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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9C). 언제까지니이까?

시편 89:38-52, 요한계시록 6:10, 예레미야 32:38-4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12-01

말씀내용
우리는 이제 시편 제3권의 마지막 시편인 89편의 마지막, 세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89편은 일반적인 시편의 흐름과 달리, 찬송으로 시작해서 불평으로 마칩니다. 즉,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마지막 본문인 38-51절은 불평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엄연히 있지만 눈 앞의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하나님의 약속을 무색하게 하는 현실 앞에서 신자는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지를 이 시편은 잘 보여줍니다. 이 시편이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정황에서 쓰여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유다의 멸망이나 그에 버금가는 국가적 현실에서 쓰여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은 하나님이 주신 다윗 언약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1-37절이 주로 과거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었다면, 이제 살펴볼 38-51절은 현재의 처절한 상황을 주목합니다. 독자들은 본문에서 시인이 경험하는 현실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불평 (38-45)
38-45절은 불평 그 자체입니다. 38절은 ‘그러나’로 시작함으로써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현실을 보는 시인은 하나님 앞에 불평을 쏟아냅니다. 여기서 그가 사람들에게 불평을 쏟아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들이 잘못되고 가고 있을 때, 사람들 앞에서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것이 시인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점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이렇게 틀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을 파기하셨습니다. 38-4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2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당신, you)를 18번 사용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대부분 ‘주’로 번역되었습니다. 리처드 필립스는 이 본문에서 주연배우는 하나님이시고, 핵심 구절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당신(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만 그 상황이 하나님의 백성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시인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지 보지요.
38절은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라고 세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불편한 심기, 백성들을 향한 진노와 그들을 거절하고 버리기로 작정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누구를 향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맥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다윗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위에 오른 왕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셨고 물리치셨으며 버리셨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느낄만한 이유는 39절 이하에서 설명됩니다.
먼저 39절입니다.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시편 89:39).” 하나님께서 언약을 미워하시고 왕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만드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왕위가 그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 다윗 언약이 무효가 됨으로써 유다는 주변 나라들에게 별 볼 일이 없는 하찮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깨뜨리셨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40-41절입니다.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시편 89:40–41).” 불평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보호해주시기는 커녕, 도리어 울타리를 파괴하시고 요새를 무너뜨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자들 즉 주변의 나라들이 유다를 탈취하게 하셨고 왕과 왕국을 조롱하게 하셨다고 시인은 불평합니다. 이 일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의 불평은 45절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시편 89:42–45).”
하나님은 대적들을 강하게 하셨고 원수들이 기뻐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말처럼 보이는 상황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43절에서 시인의 불평은 한층 더 강력해집니다.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라는 말에서 칼의 ‘날’은 바위를 의미하는데 아마 칼처럼 날카롭게 연마해서 사용하던 부싯돌 때문에 이런 용례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이 하나님께서 칼날을 둔하게 하셨다고 말할 때, 특별한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뢰의 대상인 반석,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필요로 하는 이 때, 하나님은 반석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느냐는 실망감을 표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의 날에 칼날을 둔하게 하셨으니 전장에서 적들을 맞서 버틸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왕의 영광을 그치게 하셨고 그 왕위를 땅에 엎으신 것입니다.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영광이 끝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왕의 젊은 날들을 더욱 단축시키셨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습니다. 이렇게 시인의 불평은 거침 없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렇게 불평을 쏟아놓은 시인이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지 봅시다.


2. 언제까지니이까? (46-51; 사 6:11; 합 1:2; 계 6:10; 창 12:3)
시인은 46절에서 하나님께 세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첫째는 “언제까지니이까”, 둘째는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셋째는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입니다. 첫 질문은 사실 완성된 문장이 아닌 끊어진 문장인데, 이것은 시인의 좌절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이 시인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선지자의 사역이 열매 없는 사역이 될 것이라는 주의 말씀을 듣자,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사 6:11).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도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정의가 굽어지고 악인들이 강포를 행하는 것을 지켜만 보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구원하여 주지 않으시겠냐고 물었습니다(합 1:2). 이런 기도들은 시인의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순교한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의 제단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요한계시록 6장에서 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이 질문과 함께 시인이 물은 것은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원히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수사적 표현입니다. 숨긴다는 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일어나서 도와주기를 거절하신다는 의미입니다. 38-45절에서 시인이 불평했던 그 모든 일들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그 일하심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세번째 질문,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라는 말에서는 주의 진노가 초래한 현재의 고통과 아픔이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시인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그러나 이 세 질문은 모두 “언제까지니이까”를 묻는 시간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사실이 이 질문들에는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제 47-4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속히 응답해 주셔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죽은 뒤에 주어지는 응답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는(47) 단순히 하나님께서 기억만 해주시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동사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수반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억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일어나서 행동하시라는 매우 강력한 촉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의 수명이 짧음 만을 말하지 않고, 48절에서 지금 자기 생명이 원수들의 손 안에 있으니 죽기 전에 응답해달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자기 영혼을 무덤에서 건져낼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손에서 자기를 건져줄 분도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 없으면 사람은 죽음과 무덤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시인의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49절에서 시인은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지 않았냐고 항변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과거의 은혜를 계속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의 모습,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은 찾아볼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억하시길 바랍니까?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시편 89:50–51).” 주의 종들이 많은 민족의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비방을 기억하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기들을 비방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당신 자신과 자기 백성을 동일시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3).”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긴 시편의 기도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에 기대어 그 언약 안에 표현된 하나님의 보장을 암시하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행동하셔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3.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가? (욥 1:20-21)
시인에게는 이 긴 기도를 드리는 내내 가지고 있던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46절에 기록된 “언제까지니이까?”라는 질문들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시인이 이 시편의 기도를 드리는 내내 가진 질문은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편에서의 죄로 말미암아 무효화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스스로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대답은 38-45절의 불평에서 드러나지만, 결정적으로 39절에서 “(당신께서는)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라고 말할 때 시인은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파괴된 것과 같이 여겨지는 현실을 경험했던 것은 이 기도를 드렸던 시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이 꼭 우리가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은 종종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약속들과는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 문제입니다.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고 기대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신자들은 대개 자기의 죄의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깨우신다거나 징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고 범죄한 일을 회개하고 그 일을 고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겁니다. 호전되기는 커녕, 도리어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합니다. 이쯤 되면 내가 더 회개해야 할 일이 있는 건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회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조금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도 그 징계가 너무 오래 간다 싶은 겁니다. 더 이상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건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그리고 더 심각해지면,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되었나 생각합니다. 본문 38-4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범죄가 정말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는가?” 우리가 세 번에 걸쳐 살펴본 시편 89편은 이런 심정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신자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으로부터 부르짖은 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시인이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신 성품을 기억했고 그 성품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은 은혜가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신실한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이런 태도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욥이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했던 고백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기 1:20–21).”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현실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은혜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37절을 지배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옛적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둘째로 시인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이 자신이 겪는 국가적 현실에서 기억한 것은 다윗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일컬어지지만, 결코 시인이 맞닥뜨린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언약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었기에,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51절입니다. 주의 종들이 받는 비방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라는 말로써, 시인은 이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비방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언약의 내용을 시인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분명하게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인이 겪은 현실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삶에서 그리고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4. 영원한 언약 (렘 32:38-41)
예레미야 32:38-41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예레미야 32:38–41).”
제가 구약의 복음,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여기는 구절입니다. 38절 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언약의 말씀은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한 마음과 한 길, 하나의 목적, 하나의 방향을 주시겠다는 것인데, 그 목적은 그들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의 복, 즉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복을 위함이라는 말은, ‘그들의 선을 위해, 그들의 유익을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것이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실 것이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 일을 성취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되고 좋은 소식입니까? 늘 넘어지고 범죄하는 죄인들에게 이것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당신을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을 당신의 백성의 가슴에 심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하나님은 없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우리의 냉랭한 가슴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기어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 언약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현실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그 영원한 언약이 성취될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성취될 날을 기다리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시인은 “언제까지니이까?”라고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 믿음이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사람은 이 믿음과 소망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는 언약 (52; 계 5:12; 6:10)
데렉 키드너가 말한 것처럼, 다윗에게 주어진 성취되지 않은 약속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통치에 대해 생생한 생각을 하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시인은 38절에서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다”고 말했고, 51절에서는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정확하게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언약을 파기하시고 무효화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에게 노하셨고 그를 물리치셨으며 그를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무한히 자비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당신의 영원한 언약을 파기하시는 대신 그 언약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모든 비방을 다 받으셨습니다. 실로 우리가 받을 비방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받는 비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한 결과를 그 기름 부음 받으신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파기되지 않고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에게 진노하시시는 대신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향해 진노하셨고, 우리 대신 그를 물리치셨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살았던 시대에 성취되지 않았던 다윗 언약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원히 완성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확증된 이 확실한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비록 눈 앞의 현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우리가 전능자의 자녀들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에 기대어 그 영원한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언제까지니이까?”라고 물으면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제단에서 기도하는 순교자의 영혼들과 함께 말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이 소망이 있기에, 시인은 89편의 기도와 시편 제3권을 마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시편 8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