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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9).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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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9).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

요한계시록 21:22-27, 예레미야 3:16-17, 이사야 6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7-18

말씀내용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그 성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립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제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성의 이름도 예루살렘이니, 과거 역사 속의 예루살렘은 하나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은 평강의 터, 평강의 기초라는 뜻을 가진 평강의 도시였습니다. 샬롬이 완전히 성취되는 도성이고 나라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우리 자신의 영광스러운 미래이고 우리가 장차 영원히 누릴 복락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치지 않는 어려움과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의 예루살렘의 영광을 요한에게 보이심으로써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1. 성전이 없는 성 (22; 요 1:14; 2:19,21; 계 21:3,16; 렘 3:16-17; 학 2:9; 막 13:2; 요 4:21; 왕상 8:27; 행 7:48; 히 9:1-5, 11-15; 출 40:34-35; 왕상 8:10-11; 겔 43:4-5)
조엘 비키의 말을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 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지성소이며 영화롭게 된 신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는 가운데 온전히 복을 누릴” 곳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8문). (거기서) 그들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즐기고, 그분 안에서 살며, 그분의 미소를 느끼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그분의 영광을 호흡하며 그분을 영원히 기뻐하게 될 것이다!…거룩한 성에서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그가 동서남북을 모두 지배하신다. 안식일도, 주일도, 예배 시간도 없고, 복음을 전할 목사도 없으며, 은혜의 수단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즉각적인 면전에서 영원히 살 것이며 그의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즐겁고 압도적인 임재의 순간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조엘 비키는 스프로울 박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스프로울 박사에게는 아픈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종종 아버지가 식탁으로 걸어가는 것을 도와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프로울 박사는 꿈에서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는 아버지를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에도 그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늘에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병이 없고 완전히 활력이 넘쳐 보였습니다. 스프로울 박사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아버지, 영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 주세요.” 그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영광이란다! 모든 것이 다 영광이지!”
이것이 요한이 성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다고 한 이유입니다. 모든 곳, 모든 것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b).” 이 말씀은 상징이 실재로 대치된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요한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한 게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건축된 성전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는 성전이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상징이 실재로 대치된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초림하셨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14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초림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장막을 치고 거한다’는 뜻으로, 구약의 성막을 가리키는 전문 술어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성육신과 초림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주님 자신이 성막의 실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으로 가면, 주님은 헤롯 대왕이 건축을 시작하여 46년이 지났지만 완성되지 않은 성전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요 2:21).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마 27:51) 예수님의 영단번의 속죄제사를 통해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성전이라는 상징이 이제 실재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었음을 인친 것입니다. 결국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헤롯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만큼 파괴되었고 다시는 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전통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환상의 성전을 거대한 규모의 물리적 성전으로 세워주시리라고 늘 기대했습니다(겔 40-48). 유대 전통에서 예루살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은 언제나 성의 중심이었기에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없는 예루살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물리적 구조물인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놓쳤습니다. 요한계시록 21:3에서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최종적이고 영원하기에 더 이상 상징으로서의 성전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 안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사실 생소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예레미야 3:16–17).”
주님은 헤롯 성전의 멸망과 파괴를 예언하셨고(막 13:2),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예배의 때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 4:21).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말처럼(왕상 8:27) 스데반도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행 7:48). 히브리서 기자는 장막의 기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새언약으로 대체되었다고 선언합니다(히 9:1-5, 11-15). 성막과 성전에 대한 이런 말씀들을 살펴보면, 성 안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만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성전은 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하늘에 있는 성전입니다(7:15; 11:19; 14:17; 15:5). 예외는 요한에게 성전을 측량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인데(11:1-2), 여기서도 성전은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전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성의 형태로 내려옵니다.
본문 22절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구속 받은 성도들을 새 예루살렘 성과 동일시한 것과 같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전의 거룩함은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전은 성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특별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공하였을 때,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애굽기 40:34–35).”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사람(신 34:10) 모세도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성막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쉐키나 구름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할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열왕기상 8:10–11).” 여호와의 영광을 상징하는 쉐키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해지는 현상은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에서 본 성전에서도 일어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에스겔 43:4–5).”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는 말씀은 이제 성전이라는 매개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성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성이지만 큰 성이 아니라 거룩한 성이라고 불립니다. 에스겔은 성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관한 규례들도 상세히 묘사했지만, 요한은 성전이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더 이상 성전의 언어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2. 해와 달의 비침이 없는 성 (23; 약 1:17; 요일 1:5; 사 60:1-3, 19)
요한이 본 성 안에는 물리적 성전만 없는 게 아니라, 해와 달의 비침도 없었습니다. 23절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요한계시록 21:23).”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는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친히 성전이실 뿐 아니라 빛이십니다. 빛의 근원이 드러나자 피조된 빛인 해와 달은 그 효용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묘사하고(약 1:17)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선언합니다(요일 1:5). 성막과 성전을 완공했을 때 쉐키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자 더 이상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캄캄한 실내에서 손전등에 의지하다가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오면 그 손전등의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도 구약 선지서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본문 23-26절은 이사야 60장의 내용을 많이 반영합니다. 이사야 6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 60:1–3).” 여기서 보듯이, 이사야 60장의 키워드는 빛과 영광입니다. 빛과 영광은 요한계시록 21:1-22:5에서 묘사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23절의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다는 것은 이사야 60:19의 반영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이사야 60:19).”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역본인 70인경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네 하나님이 네 아름다움이 되리니”라고 번역합니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교회의 아름다움이 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수수께끼 같이 풀 수 없었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섭리, 온전하게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웬 박사는 신학의 대가였습니다. 그렇지만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라도 천국에 올라가서 5분만 있으면 오웬 박사가 안 것보다 더 많이 그리스도에 대해 알 것입니다…전에는 여러분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던 어두운 섭리의 처사들을 그때는 촛불이나 해가 없이도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당혹스럽게 만든 교리들이 많았고 신비의 미궁을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분명해서 걷던 사람이 달려가면서도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좀 안다고 신학과 교리로 자기를 드러내는 교만함이란 얼마나 부질 없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묵상하는 것은,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를 겸손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가슴이 벅찬 희망으로 뛰게 할 것입니다.


3. 밤이 없는 성 (24-26; 사 60:3,5,11; 계 21:1)
이제 우리는 이 성의 또 하나의 특징을 보는데, 이 성에는 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문이 밤낮 닫히지 않습니다.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요한계시록 21:25).”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입니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이사야 60:11a).” 보통 성문은 밤에는 닫히곤 했는데, 본문은 낮에 성문들이 닫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성에는 ‘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예루살렘 성에는 밤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요 3:2; 9:4; 11:10; 13:30; 19:39; 21:3). 밤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어둠, 죄와 죄의 권능이 활동하는 영역입니다. 이점에서 그 성에 밤이 없다는 말씀은 더 이상 죄와 죄의 권능이 활동할 수 없다는 뜻이며 무지와 어둠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밤이 없다는 것은 21:1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말씀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죄와 악의 권능 그리고 혼돈이 더 이상 없습니다. 악과 악한 자가 모두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을 받았기에, 악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을 닫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밤이 없다는 말씀을 죄와 상관 없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천지 창조 기사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창 1:5, 8, 13, 19, 23, 31).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밤이 있었습니다. 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새 예루살렘에 밤이 없다는 것은 피곤함과 탈진이 없고, 또한 고통이나 슬퍼할 일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문이 닫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이니 밤이 없고 만국이 그 빛 가운데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갑니다(24). 그리고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갑니다(26). 이것도 이사야 60:4,5,11절을 반영합니다.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3)…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5b)…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11b).”
이사야 선지자가 재물을 가지고 온다고 말한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을 경배하러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요한이 이사야의 본문을 인유할 때, 초점은 민족들이 가지고 오는 부와 물질에 있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온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26절에서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온다고 했을 때,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과 어린 양께 드리는 경배와 찬송을 의미합니다. ‘땅의 왕들(24)’은 짐승과 결탁하여(17:2,18; 18:3,9) 아마겟돈으로 군대를 끌고 간 일로(16:16; 19:19) 결국 군대들과 함께 멸망을 당했습니다(19:21).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궁극적으로 악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어 그들 중 얼마를 회개에 이르게 하사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또 ‘만국’은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들 전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이고 144,000명입니다(7:9-10). 본문에서 ‘땅의 왕들(24)’이나 ‘만국(26)’이라는 표현들은 만인구원론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을 27절이 보여줍니다.


4. 그 성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 (27; 계 17:4-5; 요 8:44; 계 7:14; 마 5:20; 7:21; 18:3; 요 3:5; 계 3:20)
27절은 이제 그 성의 열린 문으로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구분하여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요한계시록 21:27).”
이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은 세 집단입니다. 먼저 ‘무엇이든지 속된 것’입니다. ‘속된’이라는 단어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에 정결하지 않은 부정한 것이 들어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가증한 일’입니다. 원문에서 이것은 가증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증함은 음녀의 특징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7:4–5).” 가증함에 속한 모든 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졌으니 이 성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에 들어오지 못할 자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본성에 속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성으로 들어올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입니다. 생명책은 고대 도시의 시민 명부와 같은 것입니다. 거룩한 성의 시민으로 이름을 올릴 자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7:14). 그들은 그 피로 거룩하게 되었고 완전한 의로움을 얻은 자들입니다(마 5:20). 그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마 7:21). 그들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마 18:3).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입니다(요 3:5).
기억하십니까?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그리스도가 자기 삶 속에 들어오시도록 모셔 들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거룩한 성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27절의 의도는 단순히 미래의 운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선택과 행동의 최종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경고하고 격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고전 3:16; 6:19; 엡 2:20-22)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입니다. 그래서 그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 성은 지성소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그 성은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그 성은 거룩하게 된 교회입니다. 성도가 바로 교회입니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함께 계시기에 더 이상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게 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빛 아래서 행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영광스럽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바울 사도는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린도전서 3:16; 6:19).”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인 교회가 또한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는 성전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0–22).”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소위 ‘성전 건축’에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고 멋지게 꾸미는데 많은 비용을 소모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뿐입니다. 거룩하고 참된 예배가 있는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눈으로만 식별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해와 달의 비침도 쓸 데 없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성취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교회를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도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헛된 것으로 교회와 성도의 참된 영광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학식과 지식, 재능과 교양, 재물과 성공, 큰 건물과 신도 수 그 어떤 것도 교회와 성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통하여 1세기 말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거룩한 성의 영광에 비추어 너의 삶을 바라보거라. 너희가 장차 얻게 될 영광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믿음의 인내로써 살아내거라. 언제나 그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여라.” 이것은 모든 시대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행복의 절정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존 칼빈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껴안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죽음의 날을 바라보았습니다.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행복한 상태는 온전하게 된 성도가 하나님을 완전히 끝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그래서 그날을 기대하십니까? 꿈에서 스프로울 박사의 아버지가 말했듯이, 가는 것마다 영광이고, 모든 것이 영광이며,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성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신자들에게 약속된 이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장래의 영광이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날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