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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기독교 신앙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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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기독교 신앙의 핵심

예레미야 32:39-4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8-23

말씀내용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큰 주제를 상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명제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루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오해의 문제입니다.

1. 기독교에 대한 오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인식 가운데에는 기독교는 온갖 의무들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려면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끊어라’부터 시작해서 십일조, 주일 성수, 기타 헌금들, 헌신하라는 요구 등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의무감에 매여 힘들어하든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면서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을 뿐더러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지옥 갈까 두려워서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는데 거기에는 자유함도 기쁨도 없는 것이지요.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의 말을 빌리면, ‘사랑하지 않는데 이혼할 수 없으니까 그냥 살아주는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처럼 불편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정상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도 아닙니다. 만일 신앙 생활이 이런 것이라면, 기독교가 사람들의 생각처럼 감당하기도 힘든 의무들의 목록 자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게 되는 이미지는 결코 선한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이면에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종교적 부담감이 있습니다. 예배나 헌금, 헌신과 봉사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부담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면목이 서고, 하나님께 이것 저것 달라고 구할 때 마음이 좀 떳떳해지는 것 같고 혹은 기도로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을 감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은혜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반영합니다. 이것은 소위 무당들이 굿을 하면서 “정성이 모자란다”고 외치는 것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남아있는 자존심이고, 자기 의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 사람은 의무감에 매여 자기의 기쁨을 다 잃어버릴 것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의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감동시켜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전자는 어거스틴이고 후자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A. 어거스틴(354~430)
어거스틴은 2000년 교회사 가운데 가장 영향을 많이 미쳤던 탁월한 신학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알제리의 한 도시에서 출생했습니다. 워낙 천재적 지성을 가진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유학하는 동안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고 또한 17살 때부터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해서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이런 아들을 위하여 평생 눈물로 기도하며 그 아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더니 고대 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결국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사 그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가 쓴 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주제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때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정말 너무나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신 당신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당신은 비록 피와 살에는 아니지만,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감미롭습니다. 마음 속 그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당신은 모든 빛 보다 더 빛나는 분입니다. 자신들에게서 모든 영광을 찾으려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영광을 능가하는 분입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 그가 기독교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오해였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이런 두려움은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오히려 그는 진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기쁨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하기 전에 사람들은 지레 이런 의무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그런 의무들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런 두려움들은 사라지고 맙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도 이런 두려움과 이런 의무감의 무게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 맛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까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이나 오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두려움이나 주저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B.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삼상 14)
두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무엘상 14장의 이야기입니다.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사울은 전쟁하는 군인들에게 이날 저녁 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금식을 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적인 행위였습니까? 문제는 사울이 왜 이런 종교적 맹세를 했는가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없었기에 이런 자신의 극단적인 종교적 행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전장에 나갔기 때문에 아버지 사울의 이런 맹세를 알지 못했던 요나단이 전쟁 중에 시장해서 수풀에서 발견한 꿀을 맛보고는 눈이 밝아져서 했던 말과는 너무 다른 것입니다.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삼상 14:29)”.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막으시는 분이 아닌데, 사울 같은 사람은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게 함으로써 군인들을 공연히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너무 시장해서 짐승을 급히 잡아 먹게 함으로써 피 채로 먹는 죄를 짓게까지 한 것입니다. 사울의 태도는 요나단이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한 대로였습니다(삼상 14:29). 성경은 죄인인 인간이 결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범죄한 인간의 실존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사울은 그저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선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맹세를 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잠 8:30~31; 요 17:1,5,24)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는 우리의 출발점은 천지 창조 이전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천지 창조의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 건달이 한 경건한 노인에게 그렇게 묻자, 그 노인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너처럼 쓸데 없는 것들을 알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존 칼빈은 성경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 이런 질문들이 무익하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 질문은 무익한 질문일까요? 그로부터 약 200여 년이 지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주제를 연구했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그의 명저에서 이런 문제를 놀랍고 탁월하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인성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게 물은 것이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뭘 하셨지?” 나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아이의 질문이었습니다. 혹시 심심하셔서 만드신 세상이고 인생이라면 별로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심심한 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뭔가를 만드는 것처럼 만들었다가는 싫증나면 해체해버리는 것 같은 것이 이 세상이고, 인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심심하셔서 만드신 것이 세상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심심하지 않으셨고 영원 속에서도 그러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는 심심하셨던 하나님께서 적적함을 피하고자 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셔서(self-sufficient) 어떤 창조물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창조하신 것일까요? 잠언 8:30~31을 봄으로써 그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여기서 ‘나로’ 표현되는 주어는 잠언 8장에 계속 등장하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의인화되어 주어인 ‘나’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바로 이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주체가 되셨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천지를 창조할 즈음에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다”는 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즐거움의 대상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가 서로를 기뻐하시고 완전한 즐거움 가운데 만족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또한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소위 대제사장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봅니다. 먼저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인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다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구하십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관계가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5절을 보지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서 주님은 ‘창세 전’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과 영광을 함께 누리고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다시 아버지와 누리는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함께 영광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24절 한 절을 더 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창세 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3.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
사실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다는 것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가, 세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소위 양태론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밖에서는 사장님이시고 어머니에게는 남편이시니 한 분이 세 모양이다 하는 것이나, 태양이 본체가 있고 빛과 열을 내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도 다 양태론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이해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단일한 신성에 세 분이 계시니,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위(位)’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문제인데, 이것은 어떤 지위나 포지션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영어로는 person이라고 표현된 것으로 세 분으로 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삼신론이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시라고 말해야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그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그 단일한 신성 안에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단일신론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일신론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합니까?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심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천지 창조는 결코 하나님의 외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로 알게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4.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동기와 목적: “기쁨과 영광”
앞에서 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면서 서로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계셨으며, 완전한 영광 가운데 거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영원 속에서부터 그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과 영광의 충만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고후 13: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 교제를 하고 계셨고, 완벽한 교제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었으며, 이 완벽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이 기쁨의 정서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사람에게 나누어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슬픔이라는 정서가 그 슬픔을 가슴 속에 묻고 묻어 삼키는 것이라면, 기쁨이라는 정서는 한없이 나누고 싶고 나눌수록 그 기쁨이 더 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런 방식으로 천지 창조의 동기로서 작용하여 그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지 그 일차적인 근거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마지막 날인 6일째에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과 조건을 완벽하게 조성하신 후에, 창조의 꽃인 인간을 맨 마지막에 만들어 그 기쁨의 동산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산의 이름인 에덴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기쁨, 환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동산의 이름 조차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동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습니다. 아담이 외롭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까? 금식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외로움이라는 정서적 부족함을 느끼기도 전에 미리 그것을 아시고 아담이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필요를 채워주시려고 하와를 주셨습니다. 하와를 주시는 과정은 어떻습니까? 하와를 만들기 위해서 흙을 퍼다 놓으라고 지시하시고 물을 묻혀서 빚으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담을 푸른 초장에 눕혀 편히 잠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십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시고 그 자리는 대신 살로 채우신 다음,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살며시 깨우시고는 “짠”하고 하와를 아담의 눈 앞에 보이십니다. Surprise 였습니다. 아담은 놀랐고 그 입에서는 시가 흘러나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기쁨을 주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여기서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넘어질 시험을 두어 그로 넘어지게 한 장본인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동산에, 생명 나무가 있어서 이 시험을 통과한 후에 아담에게 그 생명 나무 실과를 영원히 먹고 누리게 하고 싶어하셨던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스토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잃어버렸던 생명 나무 실과를 영원히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짓기 전에 인간이 처했던 이 완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를 아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동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고 이처럼 인간의 모든 필요를 온전하고 만족스럽게 채워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누리시는 기쁨과 행복의 완전함 만큼이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시기를 강렬하게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동기라는 것을 성경 계시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동기가 삼위 하나님이 누리시는 넘치는 완벽한 기쁨이었다면, 천지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라는 단어가 우리들 대부분에게 너무나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통해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영광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노동을 열심히 하고 고생을 함으로써가 아닙니다. 천지 창조의 목적은 천지 창조의 동기와 만납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기뻐함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드리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보통 이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쁨과 은혜의 반응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는 감사와 찬송과 예배의 반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광으로 받으시게 됩니다. 이 싸이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고, 이 기쁨과 은혜의 정도도 점점 더 깊어지고 커지게 되면서 사람은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천지 창조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누리고 계시던 완벽한 기쁨이었고, 천지 창조의 목적은 그 기쁨을 인간에게 주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만족하고 누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5. 인간의 최고의 목적: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내용의 논리적 귀결로써, 우리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사는 최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인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최고의 존재 목적을 이루고 살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고, 이와 상관없이 산 인생은 실패하고 망한 인생입니다. 40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문과 답처럼 이 문제를 잘 다룬 문서는 없습니다. 그 대답이 이렇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 문장에서 영어 단어 두 개를 수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놀랍게 드러내주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by enjoying Him forever.).” 즉,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봅시다.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to enjoy God)’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to please God)’의 차이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해야 하는데, 그 일들이 대부분 제가 좋아하는 것들과는 다른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를 해라, 극장에 가지 마라, 기타 등등 제게는 어려운 것들이었고 저는 울며 겨자먹기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많이 실패했고 그때마다 좌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고역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취미나 기호는 저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 생활에 기쁨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야 저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배우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말이나 그 온전한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은 왠지 제가 찌그러지고, 원치 않은 일들이지만 의무적으로라도 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되어 저를 늘 짓눌렀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저의 무지의 결과였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런 오해들을 불식시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면 그 대상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신이 기쁜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의무와 기쁨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십 수년 전, 제 아내의 생일에 무심코 잡아놓은 강의 일정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가야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참 미안한 마음에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멋진 꽃다발을 하나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카드를 하나 사서 아가서를 펴놓고 반은 옮겨 쓰고 반은 창작을 해서 썼습니다. 카드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 4:1)” 제가 개인적으로 아내를 위해서 꽃을 산 처음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늘 개인적으로 ‘꽃을 사느니 가족들이 그 돈으로 갈비를 먹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가 “왠 일로 꽃을 다 사왔느냐?”고 물을텐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꽃을 바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영광이고 특권이며 기쁨이자, 행복이야.” 물론 아내는 그렇게 묻지 않았고 저도 대답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깨닫고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또한 제게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제 생각대로 물어봐서 제가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감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가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꽃을 바치며 이렇게 꽃을 바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저에게 굴욕적이라거나 힘든 일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아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으며, 아내에게 기쁨을 더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의무와 기쁨의 차이를 발견하십니까? 우리 신앙이 의무의 이행 정도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기쁨을 다 질식시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꽃을 바치는 것이 다만 의무였다면 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제 마음을 안다면 그런 꽃은 전혀 아내에게도 기쁨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 신앙 생활의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 안에서 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이라고, 그 기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성도의 모든 삶의 동기라는 사실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얻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
이것을 존 파이퍼는 그의 기독교 희락주의로 표방되는 가장 멋진 문구로 정리해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최고로 만족을 얻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 자신이 이루어놓은 성공 안에서 너무나 만족하고 기뻐하고 계신다면 ‘성공’이라는 가치는 여러분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성공’이란 저렇게 영광스러운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족하고 기뻐하는 대상이, 돈과 같은 물질이거나, 화목한 가정이거나 그 무엇이거나 간에 여러분을 보는 이들은 그 가치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가치라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최고로 만족을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7. 선하신 하나님의 사명선언문(렘 32:40~41): “나의 최고의 사명은 __________를 섬기는 것이다.”
자, 이제 드디어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예레미야 32:40~41은 성경 전체에서 너무나 중요한 핵심적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한껏 계시하여 드러내심으로써 선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31:31 이하에 ‘새언약’의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영원한 언약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셔서 마침내 그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갈망을 심어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40).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선을 베푸시기를 절대로 그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해서 나를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그들 마음 속에 일어나게 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억지로가 아니라 가슴에 터져나오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만큼 그렇게 선을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아무리 철면피 같고,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양심이 강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심으로써 그런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작하시면 그는 그 하나님께 그런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경외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찬송하고 칭찬하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십니까? 경외함을 마음에 두겠다 하심은 바로 이런 마음을 부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러분이 경험하고 누리시는 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배(worship)라는 영어 단어는 합당한 가치를 인정한다(worthy)는 영어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고 있다면, 그분의 선하심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그들 마음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기를 결코 그치지 아니하시겠다는 무조건의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수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겼고 아스다롯을 섬겼고 그 외의 많은 이방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도 경험해본 일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선하심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에게 경외함,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경험하고 누리는 자가 어찌 하나님을 떠나겠습니까? 우리는 이어서 41절에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멋진 말씀을 듣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사명선언문이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최고의 사명은 __________를 섬기는 것이다.” 이 밑줄 위에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십시오. “나의 최고의 사명은 형익이를 섬기는 것이다.” 믿어지십니까? 이 약속이 믿어지십니까? 4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니엘 풀러가 그의 탁월한 상상력으로 표현한 말이 있는데 우리는 경박함을 주의하면서 사용해야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의 말로 옮겨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셔서 책상머리에서 하루를 계획하시기 전에 그 사명선언문을 읽으셨다. ‘나의 사명은 형익이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그 일을 계획하셨고 실행하신다. 어제도, 이전에 모든 날들 동안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에 그리고 영원토록 그렇게 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책상도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오늘 하루의 하실 일을 당신의 이 말씀에 근거하여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섬기시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을 성경 외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 46:5).” 또 모세도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백성들과 함께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다윗도 노래했습니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시 86: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백성들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치지 않고 자기들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찾아오셔서 이 무감동한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일을 실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에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살아온 삶인지를 아십니까?

8. 선하신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Genie)’가 아니시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 것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와 같은 개념으로 오해할까 저는 염려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섬기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하시고 그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 일을 결코 그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추적하게 하십니다. 결국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종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복한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결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1장에 있는 주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 주인을 위하여 자원하여 평생 종이 되는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그들의 삶의 최우선순위로 놓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제일 먼저 구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들의 번영과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고전 10:31). 그들은 결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이 세계와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하신 지혜로 당신의 이와 같은 선하심을 나타내 알게 하십니다. 오,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보다 더 좋은 기쁨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9. 결론
그러므로 신앙의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의무감의 노예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깁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사모합니다.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예배가 기쁨이고 즐거움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다고 할지라도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 온전하고 참된 순종을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땅과 하늘, 죽음과 생명의 차이만큼 큰 것입니다. 종교에서 인간은 먼저 신을 감동시켜야 하지만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감동시키십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놀라운 복음의 도리를 설명하다가 깊은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3~35).” 누가 과연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충만한데서부터 오로지 받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 기독교 핵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종교의 길로 들어서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종교가 아닌 복음으로 인도해주는 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를 더욱 구하십시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치지 않고 베풀어주시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예배하고 평생에 그리고 영원히 그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그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십시오.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