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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2). 세계와 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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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2). 세계와 주의 말씀

시편 119:89-96, 로마서 1:20-21, 이사야 40:6-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9-28

말씀내용
이제 우리는 가장 긴 시편인 119편의 절반을 넘어 후반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각각 여덟절로 구성된 22연 중에서 11연을 마쳤고 오늘 12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듯이, 119편의 각 연의 절들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는데, 12연의 각 절은 ‘라메드(ל)’로 시작합니다.
시편 119편은 시인의 자기 경험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능력과 영광을 보여주는 시편이지만, 특별히 전반부의 뒷 부분인 9-11연에서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언급했고, 11연에 와서는 ‘연기 속의 가죽 부대’같이 되었다는 강렬한 표현으로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을 표현했습니다(83). 이제 후반부를 시작하는 12연에서는 상황은 반전됩니다. 12연은 앞의 11연과는 전혀 다른 톤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영광으로 시인이 살아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살게 하셨고 보존하셨습니다. 예컨대, 거친 파도에 휩쓸려 기진하여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견고한 바위를 만났거나 모래톱에 발이 걸린 것과 같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위이고 모래톱인 셈이지요. 이런 경험을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살아있어서 나에게 말하고, 발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쫓아 달리며, 그것은 손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붙잡는다. 성경은 고풍스럽지도 현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원하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1. 자연 세계를 묵상하다 (89-91; 롬 1:20,21; 사 40:6-8; 벧전 1:24-25; 히 1:3; 마 24:35; 5:17-18; 롬 8:19-21)
12연은 제한되지 않는 영원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 온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보는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와 성실하심과 그 말씀의 영원성과 확실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듦으로써 당면한 모든 위협으로부터의 안전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온 세상의 창조 질서와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 묵상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12연의 제목을 ‘위대한 확실성들(The great certainties)’이라고 붙였습니다.
자연 세계는,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하지만 죄인들은 눈이 어두워서 창조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반면, 거듭난 사람들은 그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연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도 압니다. 그래서 마땅한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본성적 영역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시야를 가집니다. 피조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신적 속성, 특별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시각을 확장시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철학자나 과학자의 시선과 달리, 차갑고 사변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분명한 계시에 의존한 확고한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를 이사야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 40:6–8).” 세상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의 젊음과 힘도 다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견고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복음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이며 우리가 인생을 걸만큼 확실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4–25).”
89-91절이 이런 시인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시편 119:89–91).”
하늘이 멀쩡히(굳게) 존재하고 땅이 항상 있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굳게 서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만물이 쇠하여 사라지지 않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멀쩡히 존재하는 것은 만물이 주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물이 주의 종이라고요? 인격이 아닌 만물에 대하여 그런 표현이 가능합니까? 창조의 교리는 우주의 원자 하나까지도 언약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존재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치 만물이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라도 되는 양,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9세기의 지성, 존 러스킨은 “천사장의 섬김에서 작은 벌레의 노고까지, 행성들의 자리에서 떨어지는 먼지의 중력까지, 모든 창조물과 물질의 권능과 영광은 그들의 자유가 아닌 순종에 기인한다.”고 했는데, 시인과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계를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3).” 창조하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를 붙들고 계십니다. 시인이 89절에서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라고 표현한 것이 그것입니다.
90절에서 ‘주의 성실하심’은 주의 진리 혹은 주의 말씀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고 하신대로(마 5:17-18 참조), 말씀은 영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성경과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한 시도들은 셀 수 없이 많고 강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성경을 죽이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품이었다면 그 많은 공격 앞에서 진작에 없어졌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 40:8).”
물론 이 세상은 죄의 부패성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 아래 놓여 신음하고 있지만(롬 8:19-21), 여전히 지금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모든 만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나를 살린 말씀 (92; 사 40:1; 호 2:14)
시인은 지금 고난 속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1연에서 연결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시인은 자연을 보고 묵상했습니다. 그 묵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 적용을 보여주는 것이 92-95절입니다. 자연 세계를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견고함과 확고함과 영원함을 확인한 것이 시인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첫째로 그가 확신하게 된 주의 말씀은 ‘거의 죽게 된(87)’ 그를 살렸습니다. 시인이 주의 말씀을 통해 살아나게 된 경위를 92절에서 설명합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92).” 주의 법이 시인의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고난 중에 멸망하지 않고 살아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지 않습니까? 시인이 주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 그의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언제나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고난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시인의 대답은 말씀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즐거움이 될 때, 내 영혼은 고난 중에서 망가지지 않을 수 있으며, 도리어 그 고난이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67,71). 관건은 주의 말씀이 내 즐거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에 지쳐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고 이성이 마비된 듯한 지경이 될 때,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위로하는 확신을 우리 귀에 속삭인다. 고난으로 지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가슴에 기대어 평안과 안식을 누린다.” 아마 이것이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경이 살아있어서 나에게 말하고, 발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쫓아 달리며, 그것은 손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붙잡는다”고 한 고백과 같은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고난 중에 주의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것은 신자들만이 누리는 경험입니다. 주의 말씀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시인의 이 모습은 참된 신자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성령님께서 그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게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주는 위로와 다른 차원입니다. 본질적으로 위로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 여기서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오직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우리의 안전이 말씀을 기뻐하는 우리의 주관적 감정 상태에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늘 불완전하고 변덕스럽습니다. 때로는 기뻐하지만 때로는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가면서, 우리는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확실한 말씀 안에서 자신의 궁극적 안전과 평안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시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관련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인상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 2:14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하나님의 위로는 놀랍게도 우리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따뜻한 온돌방이 아닌, 광야로 데리고 가서 위로하십니까? 아마도 광야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거의 듣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위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해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청하고 경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의 말씀은 시인에게 즐거움이 되었고 이렇게 그 말씀은 거의 죽을 뻔한 시인을 살려냈습니다.

3. 나를 회복시킨 말씀 (93)
두번째로 주의 말씀이 시인에게 한 일은 그를 새롭게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93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93).” 여기서 ‘살게 하심’이라는 말은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인을 회복시키십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그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다시 말합니다. 성령님은 그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을 내적으로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도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아무리 영원하고 견고하고 확고하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시인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의(믿음)를 지키겠다는 말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는 성도는 비록 때로는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결국 주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4. 나를 구원한 말씀 (94-95; 롬 8:35,37-39; 시 119:61, 110)
세번째로 주의 말씀은 시인을 구원합니다. 94-95절입니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94–95).”
94절에 ‘나는 주의 것이오니’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하심을 주장하는 표현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아무 것도 들어올 수 없고 이 관계를 깨뜨릴 수 없는 결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선언하는 말입니다. 결국 이 고백은 사탄이나 자기를 해하려는 악한 자들의 어떤 세력도 자기를 해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의 뒷 부분에서 선언한 그리스도인의 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 37-39).”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되, 말씀으로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시인을 둘러싸고 그를 멸하려고 엿보는 악인들이 있지만, 시인은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61절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했었습니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 119:61).” 그리고 뒤에서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 119:110).”
61절에서는 ‘잊지 않는다’고 했고, 110절에서는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95절에서는 ‘생각하겠다’고 말합니다.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멸하려고 엿보는 악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어려움과 문제 또는 그 어려움을 일으키는 자들을 주목하는 대신, 주의 말씀을 주목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이고, 그 신앙이 만들어내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런 태도에 점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5. 완전하신 주의 말씀 (96; 시 39:4; 사 9:7)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주의 말씀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국들이 아무리 강대하여도 다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시인은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편 39:4).” 자기 인생의 끝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또 시인은 96절에서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라고 말합니다. 데렉 키드너는 이 말은 전도서의 요약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세상에 완전해 보이는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끝이 없는 무한하고 무궁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과 깊이에 있어서 끝이 없이 무한하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영광과 사역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종국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겠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될 은혜도 무궁하고 무한합니다.
12연의 결론인 96절은 시인이 힘든 고난 속에서도 왜 그 말씀에 목을 맸고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 말씀이 심히 넓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는 끝이 없는 무한함, 영속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말씀 속에 자신이 피하여 숨을 수 있고, 그 말씀이 자기를 살리며 회복시키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처한 환경에 골몰하기 보다, 주의 말씀을 주목하겠다고, 그 말씀을 생각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과 땅을 보며, 자연세계를 보고 묵상하면서, 이 모든 만물이 유지되게 하시는 주의 말씀의 능력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야말로 영원히 견고하고 확실함을 알기에 그 말씀에 기대어 즐거움과 위로로 삼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고,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가 평생과 영원히 누릴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