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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0). 주의 얼굴 빛을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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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0). 주의 얼굴 빛을 비추소서

시편 80:1-19, 이사야 5:1-7, 요한복음 10:14-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5-19

말씀내용
1. 역사적 정황과 시대적 적실성
칼빈은 80편을 가리켜 ‘참으로 슬픈 기도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은 이방 나라들에게 능욕을 당하는 주의 백성의 탄식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적 정황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많은 학자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짓밟히고 멸망 당할 즈음에 남왕국 유다의 백성이 드린 기도라고 봅니다. 그래서 주전 3세기에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는 ‘아시리아에 대한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번역을 담당한 유대 랍비들이 이 시편을 그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물론 이 시편을 부른 사람들 중에는 남왕국으로 피신한 북왕국 출신 백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나라는 갈렸지만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게 멸망을 당할 때, 유다 백성이 드린 기도라는 점에서, 이는 영적 하나됨과 회복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리처드 필립스는, 감리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장로교회가 감리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이 시편에는 이런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간절한 탄원이 배어 있습니다.
저는 시편을 강해하면서, 거의 3000년 전에 쓰여진 시편들의 거의 모든 상황들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영적으로 처해있는 상황들을 대변한다고 느낍니다. 오늘 이 땅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들이 영적인 축복의 흘러 넘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상 앞에서 온갖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이 이 시편의 정황과 거의 비슷하지 않습니까?


2. 이중적 돌이킴 (3,7,19,14)
이런 상황에서 신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을 80편이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 간구가 나옵니다. 이것을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중적 돌이킴’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의 백성이 회개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 백성을 향해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성들과 하나님이 각각 자신의 역할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80편에서 시인은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두 가지 간구가 3,7,19절에서 세 번 반복됩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이 세 구절을 이 시편의 코러스라고 말합니다.
먼저 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 80:3).” 우리를 돌이킴, 그리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심이 이중적 돌이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사 등을 돌리고 계시기에 시인은 다시 우리를 행해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길 구합니다.
7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 80:7).”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와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가 이중적 돌이킴을 보여줍니다. 19절에서도 이중적 돌이킴을 구하는 기도로 이 시편은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14절에 ‘돌아오소서’라는 단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7,19절에서 돌이켜 달라는 간구에서 사용된 단어 ‘슈브’를, 14절에서는 하나님께 사용합니다.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회개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를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성경적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돌이킴 곧 회개는 우리가 그냥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시인은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두번째는 회개는 관계적이며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한 쪽만 돌이키면 되는 게 아니라 쌍방의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셔야 합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도 관계적이며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에는 언제나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회개는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3. 이스라엘의 목자 (1-7; 사 40:11; 요 10:14-15; 히 13:20-21; 창 31:40; 민 6:24-26; 사 1:15)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에는 크게 두 주요 개념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에 대한 ‘포도나무’ 묘사입니다. 목자 개념이 1-7절, 8-19절에는 포도나무 개념이 주요 개념입니다. 먼저 목자 개념을 보겠습니다.
1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묘사가 나옵니다. 첫째가 이스라엘의 목자이고 둘째와 셋째는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분’과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입니다. 둘째와 셋째는 첫째 호칭에 따르는 부수적인 호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자’ 이미지입니다. 시편에는 단 두 번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3편과 오늘 본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왕을 의미하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요, 왕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세상에 오셔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4–15).”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서신서도 동일하게 묘사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브리서 13:20–21).”
이런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를 양으로 여긴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사실 양은 놀라울 정도로 무력하고 길을 잘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일은 고되고 고단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 외삼촌의 집에서 목자로 보낸 20년의 세월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세기 31:40).”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목자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신다는 말은,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대표적인 지파들이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을 암시하는 듯 보입니다. “비록 망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그들 곁에 언제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시고 빛을 비추어 달라고 구합니다.
2절에는 세 지파가 언급됩니다. 모두 요셉과 관련된 지파들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들이고, 베냐민은 요셉의 아우입니다. 모두가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라헬의 소생들입니다. 물론 베냐민은 북왕국에 속했다고 할 수 없지만, 여기에 같이 기록된 것은 이런 동질성 외에도, 광야 시절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에서 베냐민 지파가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성막의 서쪽에 함께 자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민 2:18-24).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시라는 2절의 두 간구는 1절의 두 간구의 내용을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야말로 지금 시인이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3절은 2절의 간구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라는 표현은 아론의 축복을 상기시켜줍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수기 6:24–26).” 이것은 처음 성막이 세워지고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위임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처음으로 그 백성을 축복하는 내용이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고 싶으시다는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 속에서 환난을 만날 때마다 이 은혜로운 축복을 기억했고 이 약속대로 다시 축복해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4절은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인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호칭을 만납니다. ‘만군의 하나님(엘로힘 쩨바오트)’입니다. 이 호칭은 4,14,19절에 세 번 나옵니다. 이 호칭은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 혹은 천군의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호칭은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호칭과 함께, 왕과 용사의 이미지를 전해줍니다.
4절의 기도 그대로,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노가 언제까지 계속 되겠는지를 묻습니다. 시인이 모든 것이 망해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역전시키실 능력이 있는 만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하여 진노하십니까?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의 위선적이고 신실하지 않은 기도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나아갔고, 심지어 우상을 달라고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공과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구하는 것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백성을 이렇게 꾸짖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이사야 1:15).”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기도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영적 분별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식적 기도를 혐오하십니다.
5-6절은 그들이 겪고 있는 형편을 보여줍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시편 80:5–6).” 여기서 ‘그들에게’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그들은 앗수르에게 패망함으로써 눈물의 양식을 먹고 많은 눈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그들의 양식과 음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일어나게 한 것은 앗수르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시인을 그것을 고백합니다. 주어가 ‘주께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고,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결과입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4-6절을 삼중의 화라고 말합니다. “이 세 절에서(4-6) 시인은 진노하시는 하나님(4), 애통하는 백성(5), 조롱하는 대적들(6), 삼중의 화를 지적한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돌이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서도 얼굴을 돌려 광채를 비추어 달라고 기도합니다(7). 회개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포도나무 (8-19; 사 5:1-7; 출 4:22; 요 15:1)
이제 8절부터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하나님을 그 농부에 비유하여 말합니다. 8절에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의 일곱)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참하고 심각한 고통과 좌절의 시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확신, 기도의 확신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회상합니다. 환난의 시간에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유익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나무 이미지는 선지자들이 많이 말했기에(호 10:1; 겔 15:1-5) 그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5장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사야 5:1–7).”
시인은 이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이 북왕국 멸망 당시, 유다 히스기야 왕 때 쓰여졌다면 시인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뿌리가 깊이 박히고 땅에 가득해서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이 되어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치도록 기르셨습니다(9-10). 바다는 지중해,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신 포도나무를 향해 달리 행하십니다. 12-13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편 80:12–13).”
고대 근동에서는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포도원에 담 같은 보호막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것을 헐어서 지나가는 이들이 포도를 따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멸망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의 울타리가 무너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교회의 울타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진리의 담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교회를 노략할 것입니다. 12절에서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그냥 행인이 아니라, 강하고 불순한 자들이고, ‘숲 속의 멧돼지’은 부정한 짐승으로서, 이방인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14절에서 다시 만군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중의 돌이킴의 은혜를 구합니다.
15절과 17절은 비슷합니다. 15절은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와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를 말하고, 17절은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와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를 말합니다. 15절에서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라는 말에서 ‘가지’는 아들, 자식을 의미합니다. 17절에서는 ‘인자’라고 말로써 ‘사람의 (아들)’를 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장자라고 하신 것을 토대로(출 4:22) 15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17절은 무엇입니까?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는 메시야, 곧 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믿는 유대인들이 환난의 때에 찾을 메시야에 대한 전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은 실패했다고 말합니다(15-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16)”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편 80:18).”라는 고백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시인은 사실 자신들의 모든 실패를 인정하면서, 오실 메시야에게 자신들의 소망이 있음을 피력합니다. 19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편 80:19).”


5. 선한 목자,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요 1:14; 15:1,5)
시인의 이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여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한 목자십니다. 시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시듯이, 주님은 “맞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0:14-15). 그리고 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1). 이스라엘은 실패한 포도나무였지만, 예수님은 결실하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참 포도나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는 큰 나무가 아니다. 키도 작고, 다른 지지대를 의지해야 하며, 매우 약하고 잘못하면 땅을 기는 나무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포도나무와 같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분이 이 나무를 돌보신다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또 양들은 선한 목자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은 양의 목자로서, 포도나무를 돌보시는 농부로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이중의 돌이킴을 구하는 동기는 분명합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시 선한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이 되기를, 다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위기를 모면하고 벌을 피해보려는 생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회개의 은혜는 관계의 회복으로 결실합니다. 회개는 선하신 목자의 인도를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목자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버린 가지가 다시 접붙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참담한 현실에서 시인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다시 주님께서 얼굴빛을 비추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또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은혜가 아닙니까? 함께 그 은혜를 구하십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편 8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