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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3). 음녀의 금 잔을 분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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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3). 음녀의 금 잔을 분별하라

요한계시록 17:1-6, 요한일서 2:15-16, 이사야 23:15-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1-17

말씀내용
요한계시록은 오늘부터 우리가 상고할 17장부터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요한계시록의 큰 문맥(17:1; 21:9)

요한계시록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1-5장이 첫번째 부분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와 하늘 보좌 환상이 그 내용이고, 두번째는 6-16장으로 세 개의 심판 시리즈가 주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7-22장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과 새 예루살렘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 마지막 부분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는 17:1-19:10은 여섯째 대접 심판과 일곱째 대접 심판에 대한 세부적 묘사 또는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세분화하면, 17장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고 18장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장송곡이며, 19:1-10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성도들의 기쁨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보여줍니다.
이 마지막 부분을 많은 학자들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견주어 설명합니다. 두 개의 성, 큰 성 바벨론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멸망하고 하나는 영광스럽게 세워집니다. 그러나 이 두 성이 모두 음녀와 신부로 묘사되기에 이것은 또한 ‘두 여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17:1은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다시 등장하여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21:9은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뒤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맥락은 이런 것입니다. 큰 음녀의 정체가 그의 거짓된 유혹과 함께 폭로되고 멸망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참된 가치를 뽐내며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일곱 대접 심판을 수행한 천사 중 하나가 감당한다는 것은, 펼쳐지는 이야기가 일곱 대접 심판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17장 이후에 펼쳐지는 사건들도 연대순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에는 음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7-18절은 천사가 이 환상에 나오는 음녀와 짐승을 해석해주는 내용인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유일하게 주어지는 환상에 대한 해석입니다.

2. 음녀의 정체 (1,2,5,15,18; 롬 7:3; 사 1:21; 훔 3:4; 사 23:16-17; 요일 2:15-16)

오늘 본문에서 천사는 요한에게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 큰 음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8절에서 천사가 말합니다.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7:18).” 그리고 5절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7:5).” 이 말씀에 따르면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음녀를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이 간음을 행하였을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모이칼리스(μοιχαλίς)입니다(롬 7:3). 오늘 본문에 쓰인 단어는 이것이 아니고 포르네(πόρνη)라는 단어인데, 이는 몸을 파는 매춘부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에서 음란한 외설물들을 가리키는 단어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가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음녀는 후자, 포르네입니다.
또 구약성경에서 음녀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음녀라고 선지자들은 책망을 했습니다. 가령, 이사야 선지자
가,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이사야 1:21).”라고 한 것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음녀는 배교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타락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음녀는 오히려 니느웨나 두로를 음녀라고 책망한 선지자들의 지적에 가깝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나훔 3: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두로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이사야 23:16–17).” 여기서 두로가 음녀로 불리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열방을 지배하고 우상숭배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열방 사이에 파멸과 부정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음녀 바벨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의 음녀는 매춘부이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세력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음녀는 큰 음녀이고(1), 그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되어있습니다(5). 이 음녀의 존재는 보통 일벌이 아니라 여왕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 음녀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암시들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그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습니다(1). 앉아 있다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든지 악한 존재이든지 지배하는 주권을 암시합니다. 많은 물 위에 앉아있다는 것은 이 음녀가 많은 물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15절을 보면, 천사가 천사가 앉아 있는 많은 물이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해설을 해줍니다. 말하자면, 물 위에 앉아있다는 것은 온 세상에 대한 힘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또 18절에서도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실제로 이 음녀의 영향력은 전세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녀의 상대는 ‘땅의 임금들’이고 그 영향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미칩니다. 그것이 2절입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요한계시록 17:2).”

여기서 우리는 왜 큰 성 바벨론을 음녀라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하여 취하게 하고 더럽히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음행은 문자적으로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우상 숭배라는 영적 의미가 더 강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음녀의 상징은 유혹하고 시험하며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도록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이 음녀의 존재를 로버트 마운스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사치품으로 치장하고 성도들의 피에 취한 음녀는 개인적 이익을 위한 속임수에 그 기초를 둔 세상의 지배적인 구조를 상징한다.”
음녀의 존재를 추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녀인 바벨론은 산업, 상업, 예술,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세상이 갖은 방법으로 성도들을 꾀어내고 유혹하려고 하는, 즉 성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1세기 말의 로마를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제국은 세상의 왕들, 즉 생활과 예술과 산업 그리고 상업 등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자들에게는 매혹적인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음녀 바벨론은 1세기말의 로마를 가리키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음녀 바벨론은 역사의 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세력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 이래, 음녀가 없는 시대, 음녀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엘 비키의 말입니다. “음녀의 손으로부터 안전한 나라, 안전한 계급, 안전한 세대는 없다. 그녀의 의뢰인은 자본주의자, 공산주의자, 독재자, 대통령들, 부자와 가난한 자 할 것 없이 그 모두를 포함한다…정부의 시스템, 정치적 이데올로기, 인간의 철학 할 것 없이 음녀의 흔적이 없는 데는 없다. 교회 조차 그녀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다.” 교회 조차 음녀의 유혹과 손아귀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오늘날 세상의 뉴스 매체들을 통해서도 드러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목사였던 호레이셔스 보나르(Horatius Bonar)가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교회를 찾았는데 그것을 세상 안에서 발견했다. 나는 세상을 찾았는데, 그것을 교회 안에서 발견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성도들을 경계한 바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1서 2:16).” 바로 이 세상이 음녀 바벨론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음녀 바벨론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요일 2:15).

3. 짐승을 탄 음녀 (3,4; 12:6; 13:1)

이제 음녀에 대한 추가적인 묘사를 살펴봅시다. 3절에 보면, 성령께서는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해를 옷입은 여자인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셨던 의미의 광야는 아닙니다(계 12:6). 여기서 광야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요한은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인을 봅니다. 물론 음녀입니다. 그리고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짐승에 대한 묘사는 13:1에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그 모양이 흡사합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3:1).”
다만 13:1에는 머리에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본문 3절은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 차이입니다.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어서 머리에 있는 이름이 가려졌거나 혹은 바다에서 몸이 다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만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이 13:1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동일한 존재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 온 인류 역사 속의 정치적 세력들, 혹은 제국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 세력, 제국 혹은 정치적 권력을 타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랜트 오즈번은 “짐승은 제국의 정치 지도자이지만 여자는 만국을 유혹하는 신성모독적인 종교와 만국을 땅의 사치로 이끄는 경제 체제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음녀가 ‘만국을 땅의 사치로 이끄는 경제 체제’라는 말은 4절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요한계시록 17:4).”

4. 음녀의 사치 (4,5)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왕들의 옷 색깔을 의미하는 자주 빛과, 웅장함을 보여주는 붉은 빛은 고대 로마사회에서 사치와 화려함을 상징했고 이 두 색의 염료는 매우 비싼 염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녀는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습니다. 역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치장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입니다. 뭔가 그 안에 든 것을 마시고 싶게 만드는 금 잔입니다. 육체적 만족과 쾌락을 보장해줄 것 같은 금 잔입니다. “와서 마셔 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금 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도덕적 부패와 모든 종류의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 말은 결정적인데, 결국 음녀가 주는 것은 더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1세기 말의 음녀, 로마제국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외설적 문학, 연극,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운동경기, 검투사들의 죽음, 온갖 사치, 세상의 명예와 권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헛된 자랑이 그 금 잔 안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너희 눈에 대단해 보이는 제국의 본질은 바로 음녀의 손에 든 금 잔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급 옷감과 보석들로 치장한 음녀의 모습은 당시 로마 사회의 고급 매춘부의 모습과 닮은 꼴입니다. 5절에서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라고 하는데, 고급 매춘부들은 이마 혹은 머리 끈에 이름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결국 음녀 바벨론은 외적 유혹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밀은 하나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의 이름이 계시되어야만 알 수 있는 비밀이라는 의미인지 모호합니다. 그러나 이 비밀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한 성취와 반전적인 기대를 암시합니다. 뒤에서 우리는 그 반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5. 순교자의 피에 취한 음녀 (6)

6절은 이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묘사합니다. 6장에서 보았던 순교자들의 피에 취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군중의 흥미와 재미를 위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나온 성도들이 군중들 앞에서 야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역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이 왜 죽었습니까? ‘증거’ 때문이 아닙니까? 증인은 증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6절 하반절은 이 음녀의 정체를 알게 된 요한이 보여준 반응을 기록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물론 요한은 1절에서 천사가 말해준대로, 이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 요한이 본 것은 음녀이자, 큰 성 바벨론이 기세 등등한 무서운 실체입니다. 음녀의 실체를 알고도 놀라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은 단순히 음녀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음녀의 정체를 완전하게 폭로하는 기록입니다. 즉, 단순히 로마 제국이 아니고, 그저 로마 황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을 타고 있는 음녀의 존재를 요한이 보게 된 것입니다. 제국과 황제를 타고서 그들을 움직이는 영적 세력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겼습니다.

6. 교훈과 적용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짐승을 탄 음녀는 온 세상을 자기와 더불어 음행하게 하고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려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음녀가 현대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살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음녀는 국가나 정부나 기업을 통해서 그 정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통해서도 그 정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치와 화려함을 옷입고서 유혹합니다. 음녀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정치인들은 더 잘 사는 세상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에만 취하여 선택과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영향력이 어떻게 미칠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거운 책임의식을 부여합니다. 정치 경제적 제도와 함께 결탁하여 종교적 힘을 사용하게 될 제도가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짐승을 타고 앉은 음녀는 짐승과 음녀의 결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음녀의 손에 들린 금 잔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열광하게 하고 매료당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점점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음녀의 손에 들린 금 잔의 약속입니다. 금 잔은 우리에게 더 편리한 것, 즐거움과 재미, 쾌락, 사치, 출세, 성공, 번영, 자기만족, 자아실현 등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탐욕의 제물이 되어 우상숭배자가 되고 맙니다. 주일이면 예배당에 어김 없이 나올지라도 말입니다. 그 금 잔을 받아 마시지 않고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이미 금 잔으로부터 너무 많이 마셨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음녀의 실체를 인식하십니까? 그리고 요한처럼 놀랍니까?
크레이그 키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16세가 되면 미국에서 자란 평균적인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황에서 33,000번의 살인을 포함하여, 26,000번의 공공연한 성행위 장면들과 400,000번의 성적인 언급들과 빈정대는 말, 그리고 200,000번의 폭력 장면을 접한다.” 그가 요한계시록 주석을 쓴 2000년도에 한 말입니다.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미국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나라, 모든 나라에서 아이, 성인 할 것 없이, 음녀가 제시하는 금 잔에 매혹하고 열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음녀가 주는 금 잔을 받아마시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도무지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압박을 느끼게 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열광하는 그것, 여러분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는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정치적 이슈이든, 경제적 문제이든, 여러분의 몸과 집을 꾸미는 것이든, 어떤 고상한 취미 활동이든, 무엇이든지 그것이 우상의 자리를 차지할만큼 여러분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는 것이 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음녀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음녀의 금 잔은 마시는 자들을 서서히 죽여서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독배일 뿐입니다. 때로는 시대 정신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음녀의 금 잔에 취해있을 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 그리고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