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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1). 작지만 견고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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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1). 작지만 견고한 교회

요한계시록 3:7-13, 이사야 22:22, 이사야 60: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2-09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와 함께 빌라델비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책망 없이 칭찬만 들은 두 교회 중 하나입니다. 불꽃 같은 주님의 눈 앞에서 책망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을 가진 현대 교회들은 적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그 모든 책망을 우리는 주의 깊게 들어야 하고, 모든 칭찬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새겨 들어야 합니다.


1. 빌라델비아와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는 주전 2세기 버가모 왕국의 왕 필라델푸스 앗탈루스 2세(주전 159-138)가 건립한 도시입니다. 앗탈루스 2세의 전임 왕은 그의 형 유메네스 2세(주전 197-159)였는데 로마제국은 유메네스 2세가 통치할 때, 동생인 앗탈루스 2세를 회유하여 형을 배신하면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과 압력을 넣었지만 형을 사랑했던 앗탈루스 2세는 그 모든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형이 죽고 나서야 왕위를 잇게 됩니다. 그가 형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는 죽은 형을 생각하면서 빌라델비아를 건설했기에, 도시의 이름을 형제 사랑을 의미하는 빌라델비아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형을 사랑했던 앗탈루스 2세는 필라델푸스라는 칭호도 얻게 됩니다.
빌라델비아는 에게 해에 인접한 해안 도시 서머나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사이에는 무역 통상로가 뻗어 있어서, 빌라델비아는 헬라 문명을 동방으로 전하는 관문도시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관문도시답게, 상업이 발달한 것 외에도 포도주 생산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화산 지대인 이 지역의 땅은 곡물을 재배하기에는 맞지 않았지만 포도 농사에는 토양이 매우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잦은 지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후 17년의 대지진은 사데와 함께 빌라델비아를 황폐화 시켜서 로마 황제의 은택을 입고서야 다시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빌라델비아에서는 헬라와 소아시아의 혼합 종교들이 융성했고 여러 신들 중에서도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가장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세기에서 3세기로 가면서 황제 숭배가 강화되면서 버가모 처럼 신전 관리자의 명성도 얻게 됩니다.
빌라델비아에는 강력한 유대인 공동체도 존재했습니다. 처음에 교회는 유대인 공동체의 우산 아래서 안전을 누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 회당은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유대인들을 회당으로부터 출교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쫓아내고 핍박하는 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서머나의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듯이(2:9) 다시 ‘사탄의 회당’이라고 한 것은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대인 회당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바, 빌라델비아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배경 설명입니다.


2.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 (8)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인상적인 주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라고 하신 부분입니다(8).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말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세가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교인의 숫자로 보나, 예산의 규모로 보나, 혹은 그들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으로 보나 그들은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큰 교회들만 골라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셨고 작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사이즈가 아닙니다. 주님은 양보다 질, 숫자보다 순종, 능력 보다 충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견고한 교회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그 상세한 내용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7; 사 22:22; 롬 2:28-29; 갈 6:16)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부터 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거룩하고 진실하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만 돌려지는 표현인 거룩함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참되고 믿음직스럽다는 의미에서 진실하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고, 진실은 그리스도의 참되신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묘사됩니다. 1:18에서 사도 요한이 본 그리스도 환상의 묘사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열쇠’라고 표현됩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구원과 심판의 권세를 의미한다면, 다윗의 열쇠는 그 나라에 들어갈 자를 결정하시는 권세를 가리킵니다. 그 뒤에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묘사됩니다. 그리스도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누가 새 예루살렘에 받아들여질 자인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샤아 22:22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이사야 22:22).”
이사야의 말씀은 히스기야가 통치하는 유다 왕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청지기인 셉나가 공복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호화로운 묘실을 만드는 등 잘못 행하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시고 그 직무를 엘리아김에게 맡기면서 엘리아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한 사람의 국가 청지기에게 전권을 주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점에서 엘리아김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을 결정하는 권세를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행사하신다는 말씀이 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그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유대인인 자신들에게 적용하였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의 유대인 회당은 그리스도인-유대인들을 출교 시키곤 하였는데, 그때 이사야의 말씀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유대인들을 출교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남이라고 선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열쇠의 권세는 자칭 유대인들이라고 하지만 사탄의 회당에 불과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이 중요합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리스도인-유대인들을 쫓아낸 유대교 회당은 사실 사탄의 회당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짓말 하는 자들로서 그들의 아비 마귀를 닮은 자들입니다(요 8:44). 유대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참 백성이 누구냐 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8–2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6입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물론 교회입니다.
유대인을 가리켜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심은 유대교에서 쫓겨나고 또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위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희를 내쫓는 유대인들을 내가 내쫓을 것이다. 열쇠가 내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열린 문 (8,9; 행 14:27; 고전 16:9; 고후 2:12; 골 4:3; 롬 11:25-26; 사 60:14)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첫 말씀은 8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아무도 자기 뜻대로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은 주님께서 닫으시기 전에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가 헬라 문명을 동방으로 전파하는 관문도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는 말씀은 익숙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린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효과적인 전도의 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 상의 근거가 충분합니다. 몇 구절을 확인해 보지요.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사도행전 14:27).”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린도전서 16:9).”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고린도후서 2:1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로새서 4:3).”
이 구절들에서 문이 열렸다는 것은 예외 없이 전도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 용례가 실제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비록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지만, 전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열린 문’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열린 문은 종말론적 구원에 들어갈 보장, 즉 천국문에 들어갈 보장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인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해석입니다. 누가복음 13:24을 보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열린 문을 천국에 이르는 좁은 문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대로라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주님의 선언이 되는 셈입니다. 사데 교회와 비교해 보십시오. 사데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교회는 컸고 교인들도 넘쳐났지만, 구원받는 이는 소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보장을 받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들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작은 교회입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보장 받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교회에는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알곡 교회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둘 다 성경적, 신학적으로 합당하고 은혜로운 해석입니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9절의 해석과 맞물려 있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신자들을 핍박한 유대인들 중 몇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교회의 발 앞에 절하게 되고,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도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8절의 ‘열린 문’을 선교적 기회로 이해하는 해석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로마서 11:25-26의 지지를 받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1:25–26a).”
하지만, ‘몇을 네게 준다’는 것은, 결국 종말에는 그들이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을 알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열린 문’을 종말론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해석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 60:14에서 인유한 것입니다.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이사야 60:14).”
여기서, ‘너를 멸시하는 자들’은 이방인들이고, ‘너’는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에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유대인들이 교회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과 그의 선택하신 백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 맥락은 이방인의 회심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해석이 옳은 것일까요? 뛰어난 학자들도 두 해석 사이에는 나뉩니다. 우리는 어느 해석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문법적으로나, 문맥으로나, 성경 전체의 일관된 가르침으로 보더라도, 사실 두 해석 모두 타당한 근거를 가집니다. 어쩌면 두 해석 모두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의도였을지 모릅니다.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림으로써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주시는 것이나, 구원의 문이 활짝 열러 있음으로써 빌라델비아 교회가 참된 교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 모두 의미있는 일이고, 핍박 중에서 작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의미있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5. 주의 말씀을 지킨 교회(8,10; 요 14:21; 17:15)
이제 우리는 8절 하반절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아신다고 하셨는지 주목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은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주의 말씀을 지켰고 간직했고 순종했습니다. 간직했다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소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간직만 한 게 아니라, 순종했습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주의 말씀, 복음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킨다고 하셨습니다(요 14:21). 주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 자신에 대한 태도입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주님은 인정해 주십니다.
또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하던 시대, 많은 교회에 배교의 물결이 거세게 출렁이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유독 작은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이런 배교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빌라델비아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1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여기서 주님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다시 한 번 언급하십니다. 여기서는 ‘나의 인내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가르치고 있고, 성도들은 주님의 인내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그렇게 했으며 그들 자신이 인내로써 주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에, 주님께서는 시험의 때에 그들을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 경우 모두 ‘지킨다’는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주님은 그들을 시험의 때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물리적으로 시험과 박해와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시험과 박해와 환난을 당할 것이고, 그런 시험의 때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보전하여 주실 것입니다. 실제로, 2세기 중반에 빌라델비아 성도들 11명이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 순교할 때 함께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교회였으니 11명의 성도가 그들 중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지키신다’는 말씀은 그들이 순교를 하지 않거나 그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모든 박해 속에서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지키시고 보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신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5).”
여기서 ‘보전한다’는 말이 본문 10절에서 ‘지켜’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모든 환난에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신실할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에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시험의 때는 종말론적인 대환난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머잖아 겪게 될 환난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원근통시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근통시법이란, 하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임박한 미래의 사건과 함께 먼 미래의 사건을 동시에 말하는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여기서는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겪게 될 임박한 환난이 주님 재림 전의 환난처럼 혹독할 것임을 암시하면서 두 가지를 모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재림의 날까지 인내하라(11)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언제나 인내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인내로써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는 고난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인내해야 합니까?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 그리고 사데 교회에게는 일종의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 오심은, 시련의 때를 종식시키시는 오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시민으로 세우기 위한 오심이기에 이 약속은 위협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님의 이 약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앞에서는 모두 재림의 때가 아니라 역사 상의 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0절의 시험이 임박한 것만이 아니라 재림 전의 환난을 동시에 가리킨다고 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인내로써 그들이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축제와 경기들이 많이 열렸기 때문에, 경기에서 우승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화관은 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습니다(고전 9:25; 딤후 4:8 참조).


7. 상급의 약속(12)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12절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첫째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기둥은 견고함, 능력, 안정성,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우리 말에서도 기둥의 뉘앙스는 거의 비슷합니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이 죽으면 그를 기념하려고 성전에 그를 상징하는 기둥이 하나씩 추가되곤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죽어서도 신전을 떠받드는 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방 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영예로울 수 없는 주님의 칭찬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 자들의 수고를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예롭습니까? 일평생 교회에서 기둥처럼 쓰임을 받다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 ‘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 중에는 유대교 회당에서 출교를 당한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쫓겨남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뿐 아니라 빌라델비아는 화산 지역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지진의 위협을 늘 받던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주후 17년의 대지진은 도시 전체를 황폐화 시켰습니다. 지진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도시 외곽으로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시는 나가는 일이 없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불안과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주시는 안전의 약속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들 위에 기록될 세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주 예수님의 새 이름입니다. 고대 세계에는 기둥에 이름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이름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새겨질 세 이름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로 확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열린 문을 통해 천성에 들어가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시민이 될 것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누릴 영원한 영광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이긴 후에 장차 누릴 영광의 보증을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임할 시험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내로써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8. 능력이 아니라 견고함이다(13; 눅 16:10; 19:17).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13). 이 말씀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다는 것이,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반드시 역사적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크기와 사이즈를 문제삼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숫자가 적고, 예산이 적은 것, 건물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적은 능력으로 사데 교회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엉뚱한 것에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작은 능력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굳게 잡아 우리의 면류관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벧샬롬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보장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네 앞에 전도의 문과 천국의 문을 의미하는 열린 문을 두었으니”라고 말씀하셨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벧샬롬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전도의 열린 문과 천국의 열린 문을 우리에게 주십사 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작은 능력 밖에 없지만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인들이 낙오되는 일 없이 모두 천성 문에 들어가는 은혜를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교인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유명해도 예수님을 믿으려고 갔다가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는 교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붙잡고 인내로써 믿음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눅 16:10; 19:17). 작지만 견고한 교회, 작지만 견고한 성도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