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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로역정 (28) - 신자에게 두려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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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로역정 (28) - 신자에게 두려움이란

시편 2:11, 잠언 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06-05

말씀내용
1. [정직(Honest)을 만나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거인 철퇴와의 싸움을 마친 후, 순례자들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여 크리스천이 믿음을 만났던 그 전망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음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순례자들은 다시 걷기 시작하여 멀지 않은 곳 오동나무 아래서 깊은 잠에 빠진 한 늙은 순례자를 만난다.
A. 담대가 흔들어 깨우자, 정직이란 노인은 반사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일어나 화를 냈다. 그는 순례자들을, 최근 작은믿음(Little-faith)의 돈을 강탈해 간 패거리로 알았던 것이다. 담대가 만일 자기들이 그 패거리였다면 대항할 수 있었겠느냐고 묻자, 정직은 “내게 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싸웠을 거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굴복하지 않는 이상 결코 정복될 수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 [여기서 존 번연이 작은믿음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이제 전개될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작은믿음의 이야기의 교훈과 연결된다. ‘죽은 자의 오솔길’에서 잠을 자다 강도들을 만나 돈지갑을 빼앗기고 곤봉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게 된 작은믿음은 작지만 참된 믿음의 본질을 보여준 인물이었다(1부 17장). “그는 복음과 믿음의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잊고 지냈다. 그를 평생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잃어버린 돈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었다. 그는 참된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어려움에 사로잡혀 자기가 받은 복음과 보배로운 믿음의 은혜와 복락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신자를 대변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하소연(신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에 집중한다.
B. 정직은 장망성(멸망의 도시)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우둔(Stupidity)이라는 도시 출신으로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사는 자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고향은 가르쳐 드리지요.” 우둔이라는 도시에서 순례자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의아하다는 말에, 정직은 “빙산 위에 사는 자라도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을 수 있으며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크리스티아나와 아이들이 크리스천의 가족이라는 말에 노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함께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2. [두려움(Mr.Fearing)에 대한 이야기] 담대는 정직에게 같은 마을 출신인 두려움을 아는지 물음으로써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A. (정직) “그는 매사에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는 내 평생에 만나본 그 어떤 순례자보다도 ‘골치 아픈’ 순례자였습니다.”
B. (담대) “나는 그를 주인님의 집에서부터 천성까지 안내해주었습니다.”
C. [담대가 천성문까지 인도해주었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다]
i. 두려움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항상 자기가 바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목 매달린 세 사람의 시체가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종말도 저들과 같으리라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리 없는 강가에 도착해서) ‘이제 나는 여기서 영원히 빠져 죽을거야. 수만 리 길을 달려왔건만 평안히 주님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다니..’”
ii.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복음을 들었고,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신자는 절망과 낙심, 두려움의 포로가 되기 쉬워서 별것도 아닌 말이나 일에 상처를 받고 낙심을 하곤 한다.
“그는 절망의 수렁에서 한 달 이상 울며 불며 주저앉아 있었답니다...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일도 한사코 거부하였습니다. 천성에 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조그만 난관만 만나면 풀이 죽고 누가 버린 지푸라기라도 길에 놓여 있으면 거기 걸려 넘어지곤 했던 거죠...
(좁은 문 앞에서) 하여튼 그는 좁은 문 앞까지 왔답니다. 그는 문 두드릴 엄두도 못 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답니다. 문이 열렸을 때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 자기는 자격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들어가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보다 나중에 온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군요. 그 불쌍한 사람은 문 밖에 서서 떨며 웅크리며 있었답니다...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어하더래요.. 마침내 그는 문에 걸려 있던 망치를 들고 한두 번 살짝 문을 두드렸는데 한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주자 다시 뒤로 물러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복 받은 자여, 들어오시오”하는 말을 듣고 떨면서 안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면서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답니다...
(해석자의 집 앞에서) 그리고 나서 제가 있는 집까지 오게 되었는데, 해석자의 집 앞에서도 좁은 문에서처럼 행동을 했답니다. 오랫동안 추운 바깥에서 머뭇거리면서 감히 문을 두드리지 못했는데, 그러면서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슴에 추천서까지 품고 왔으면서도 말입니다. 그 서신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 튼튼하고 용감한 안내자 한 명을 딸려 보내 달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어요... 그는 그렇게 바깥에서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 있다가 제가 창문을 통해 한 사람이 문 근처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눈에 눈물을 글썽이길래 그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알아보고 주인님께 보고 드렸고 주인님께서 나가서 그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하셔서 함께 들어왔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정말 놀라운 사랑을 그에게 베푸셨습니다. 집에서 한참을 있은 후에야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약간 평온을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iii.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이와 같이 연약하고 두려움에 쌓여있는 자들을 충분히 용납하신다(히 4:15).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 주인님은 성품이 아주 온유하신데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시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 골짜기는 우리가 다 지나가도록 아주 조용하였는데, 제 평생 그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두려움이 지나갈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내리신 것 같이 여겨지더군요.”
iv. 그의 두려움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곤고, 고난, 사자, 허영의 시장 등—도 아니고 오직 죄, 죽음, 지옥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사랑하였기에 이것이 반대에 직면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허영의 시장에서) 그 마음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에 대한 사랑은 참된 중생의 열매다.
“우리가 곤고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전혀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고 사자를 만났을 때에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두려움은 그런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결국에 영접함을 받게 되느냐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허영의 시장에서) 그는 시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거칠게 행동하였습니다. 그가 하도 뜨겁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다녀서 돌에 맞아 죽을까 염려했습니다.”
v. 두려움은 겸손한 사람, 즉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낮아지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겸손의 골짜기에서)“우리가 아름다움의 집에서 나와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갈 때에, 그는 제 평생에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잘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에 행복해지기를 바래 현재의 비천함을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골짜기에 있었을 때보다 더 기뻐한 적이 없었거든요.”
vi. 두려움은 담대가 보아온 사람 중 가장 쉽게 강물을 건넌 사나이였다.
(죽음의 강에서)“갑자기 강물이 얕아지기 시작하는데, 제 평생 강이 그렇게 얕아진 것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무릎도 안 차는 물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거기서 그와 작별을 고하면서 천국에서 그를 환영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럴 겁니다. 그럴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D. [두려움에 대한 담대의 평가] “예, 그럼요, 저는 그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i. “그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he was a man of a choice spirit,)
ii. “다만 그는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자신에게도 부담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괴로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only he was always kept very low, and that made his life so burdensome to himself, and so troublesome to others)
iii. “그는 누구보다도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해 끼치는 일을 너무나 두려워했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허용된 일도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될까 봐 금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롬 14:21; 고전 8:13).” (He was, above many, tender of sin. He was so afraid of doing injuries to others, that he often would deny himself of that which was lawful, because he would not offend)
iv. [두려움이 평생 어두운 마음을 살았던 두 가지 이유]
1. 현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피리를 불고 어떤 사람은 애곡해야 한다(마 11:16,18). 두려움은 베이스 연주자였다. 베이스는 음악의 기초다. 무거운 마음의 느낌이 없이 나오는 신앙 고백은 결코 신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그의 음조로 맞추실 때 가장 먼저 이 현을 건드리신다.
2. 두려움의 문제는 그가 베이스 현만을 연주하고 다른 현은 연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E. [크리스티아나의 반응] 두려움과 자신의 두 가지 차이점—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i. “그는 그 큰 괴로움을 밖으로 표현한 데 반해 나는 그것을 속 안에 간직하였지요.”
ii. “그는 괴로움에 짓눌려 감히 들여보내달라고 문을 두드리지 못한 반면에 나는 괴로움으로 인해 더 크게 문을 두드렸지요.”
F. [자비심과 마태, 야고보의 공감]
i. (자비심) “제게도 두려움씨와 같은 문제가 있었어요.”
ii. (마태) “제 마음에도 항상 두려움이 깃들어 있어서 구원과 관계되는 감정을 가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두려움씨와 같이 좋은 분(그리스도인)도 그런 두려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니 저도 걱정할 것이 없겠어요.”
iii. (야고보) “두려움이 없으면 은혜도 없지요. 지옥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항상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는 분명 은혜가 있을 수 없어요”
G. [담대의 결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경외하는 것) 지혜의 근본이라 했거든, 근본(시작)이 없는 자는 중간이나 끝을 소유할 수 없지요.”
H. 두려움의 신앙
i. 구원의 확신을 누리지 못한 점—작은믿음과 유사한 부분
ii.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하였던 점
I. 두려움씨에 대한 찬사(?)
두려움 씨, 당신은 하나님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이 세상에 있을 동안 당신을 실족하게 하는
모든 행위를 두려워했지요.
또한 당신은 불못과 구덩이를 두려워했지요
하지만 누군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요
당신과 같은 지혜가 없는 자들은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오.

3.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자 정직이 자의씨(Mr. Self-will)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다]
A. 자의는 누구인가?—이 사람은 율법폐기론자를 대변한다.
i. 자의는 좁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이 문제를 지적하는 정직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주장, 예증 같은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ii. 자의는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iii. 그는 순례자들의 공덕뿐 아니라 악덕을 따라도 되며 그렇게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다윗도 다른 사람의 아내와 동침했고 솔로몬도 여러 아내를 거느렸으니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히브리 산파들과 라합이 거짓말을 했으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인물들처럼 덕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유다서에서 말한 은혜를 방탕한 것(색욕거리)으로 바꾼 자들이다(유 4; 갈 5:13).
B. [담대의 평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죄를 지을 수 있다. 자의가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비난할 일은 아니다. 성도도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의의 주장은 이것이 아니고 악을 그대로 용납한다는 뜻이다.”
C. [크리스티아나의 평가] “죽을 때에 회개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으니까요.”
D. [자의와 그 시대 교회에 대한 정직의 평가]
i. “이 사람처럼 말은 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이 순례 생활을 소홀히 여기는 거죠... 순례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ii. “저희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벧전 2:8).”
E. 교회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단적 견해: 율법폐기론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시대에 황제를 등에 업고 폭정을 일으켰던 수도사 라스푸틴의 가르침은 매우 극단적이었다. 그는 죄와 회개의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가르쳤고, 죄를 더 많이 짓는 사람이 더 많은 용서를 구하게 되고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죄를 짓는 것은 신자의 의무라고까지 말했다.

4. [결론] 하나님 경외함과 두려움의 문제
A. ‘경외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위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합당한 태도의 총체다. 그러나 이 히브리어 단어는 그 자체로 부정적 차원과 긍정적 차원을 포함한다. 부정적 차원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었다고 말한 부분인데(창 3:10—성경에서 처음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주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씨는 이런 두려움을 크게 알았다. 이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그만큼 깊이 인식하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긍정적 차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잠 1:7).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권위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위 앞에서 마땅히 경외함으로 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경외함은 즐거움과 균형을 이룬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히 4:16), 그 심판대 앞에 설 때에도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찬 413 내 평생에 가는 길).
B. 이 두려움(경외)은 어느 면으로 보나 현대 교회와 신자들이 잃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경외함의 요소를 잃어버린 채 가볍고 피상적 즐거움만을 준다는 점이고, 신자들이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의 태도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C. 두려움씨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참된 성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또한 그와는 정반대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자의씨는 많은 현대 교회와 신자의 초상이다. 그렇게까지 경박하게 말하고 주장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태도가 그것을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