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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 정의를 베푸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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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 정의를 베푸시옵소서!

시편 7:1-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6-21

말씀내용
1. 다윗의 대적들
시편 7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식가욘이라는 말은 아마 음악적 설명일텐데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구시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이 시를 쓴 상황이 베냐민 사람 구시라는 인물이 다윗에 대해서 중상모략을 했던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그를 대적했던 사람들 중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윗을 대적했던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다윗은 계속해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쫓겨갈 때에도 베냐민 지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면서 ‘피를 흘린 자, 사악한 자’라고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삼하 16:7~8). 나중에 세바의 반란도 일어나는데, 세바도 베냐민 사람이었습니다(삼하 20). 이것은 전부 다윗이 사울의 왕권을 빼앗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행동들이었습니다. 표제에서 ‘구시의 말에 따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이 사람도 다윗에 대해서 이런 거짓 소문들을 퍼뜨려서 다윗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입으로 하는 공격(중상, 비방)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폭력도 폭력이고 때로는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구시가 어떤 말을 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다윗이 이 시를 쓰고 있는 정황, 그리고 이 시의 내용을 볼 때, 다윗은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 분명합니다. 구시가 다윗에 대해서 중상 모략을 하는 것은 결국 다윗 왕국의 도덕적 기초를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중상모략은 설령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만 듣고 둘은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즐기는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야말로 다윗 같은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때 얼마나 조심해야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이 거짓의 아비라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교회 역사 속에서 해 온 일이 바로 거짓말과 중상모략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교회를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서신서의 여러 곳에서 특별히 입으로 범하는 죄를 많이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은 특별히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 요한계시록에서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계 21:8).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골 3:8~9). 한 말씀만 더 보면 고린도후서 12:20입니다.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비방의 문자적 의미는 뒤에서 무는 것입니다. 수군거림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속삭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직하게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말을 사용해서 거짓의 씨를 뿌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뒤에서 무는 말, 몰래 숨어서 하는 말들은 결국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고 교회를 허물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조심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이런 말들은 직접적으로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당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비록 군사적 공격은 아니었지만 다윗과 다윗의 왕국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항변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공격 앞에서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믿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사자를 불러 대면하여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승복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대단히 적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한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만은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했던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A. 구하여 내실 분은 하나님이시다(1~2).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건져달라고 구합니다. 그는 주님께 피합니다. 이런 덫과 그물에서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그는 압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데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다윗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하나님이 되시고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자는 비단 구시라는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구시의 말을 듣고 그 거짓 비방을 반복해서 말하는 모든 자들을 다윗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 다윗은 나아가,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잔인한 사자와 같이 자기를 찢고 뜯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

B. 자기가 무죄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이 일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는 말이다(3~5,8).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구할 수 있는 근거는 자기가 이들의 비방에 대해서 결백하기 때문입니다. 3~5절에서 다윗은 거의 맹세를 합니다. 자기가 저들의 비방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때로 이런 구절들을 시편에서 만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비난에 한정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비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시비를 가려주시길 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를 더욱 힘있게 하는 요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은 기도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기도자의 마음에 담대함과 확신을 심어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선한 양심은 확신이 흘러 넘치는 샘과 같습니다. 선한 양심에는 든든한 확신이 따릅니다. 물론 이것이 기도자의 기도에 더 효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움을 가지고, 자기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통해서만입니다. 비록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회개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들의 비방이 거짓 비방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그들 앞에서 잘못을 시인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이 사안에 대해서 그들의 말은 전적인 거짓이라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C. 다윗은 왕이지만 자기 손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대신, 하나님께 맡긴다(6~9).
다윗이 이 시를 썼을 때가 이미 왕이 된 후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비난이 이렇게 거세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왕인 다윗은 자기 손으로 복수를 실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다윗은 여느 왕들처럼 왕을 비난하는 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대신, 만국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그 심판을 맡기고 있습니다. 6~9절은 다윗의 이 기도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단어들을 보여줍니다. 6절에는 ‘일어나사’, ‘막으시며’, ‘깨소서’, 7절에는 ‘돌아오소서’, 8절에는 ‘심판하소서, 9절에는 ‘끊고, 세우소서’ 하는 말들입니다. 7절에서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라는 표현에서 ‘민족들의 모임’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온 천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앞에 자기의 결백을 드러내주시기를 구하는 다윗의 마음이 보입니다. 다윗은 만국의 심판자 하나님께서 시비를 가려주시기를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앞에서 정의를 성취하실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정의를 베풀어달라고 구합니다.

D. 다윗이 아는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9).
9절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단순히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로는 “사람의 심장과 신장을 감찰하시나이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신체의 장기로 사람의 정신적, 영적인 부분을 묘사하곤 했는데, 심장은 생각과 결단, 사고의 자리를 의미하고 신장은 감정이나 양심, 애정의 자리를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다윗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과 양심, 모든 동기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의 삶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에 스스로 속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일이 있음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산 지식이 됩니다.

E.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깊은 신뢰(10~13)
다윗은 끝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깊은 신뢰를 드러냄으로써 이 시를 맺습니다(10~17).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아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그는 자기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10).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재판장이심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위로우신 재판장이셔서 매일 일어나는 죄악으로 인하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행해지는 악행들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박국이 알았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합 1:13). 그러므로 죄인이 살 길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12).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칼이 뽑혀졌고 활시위가 당겨졌습니다. 죄와 죄인을 향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태도와 상태를 성경이 가르쳐주는대로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F. 죄인들의 운명은 정해져있다(14~16)
이런 하나님을 알기에, 다윗은 자기를 거짓으로 저주하고 비방하는 구시의 무리들을 향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악인은 죄악을 낳고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습니다(14). 그들이 경건한 자를 넘어뜨리려고 판 웅덩이는 결국 그들 자신을 빠뜨릴 것이고(15) 그들이 낳은 재앙은 그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입니다(16).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죄인 자신입니다. 그것도 자기 거짓에 자기가 속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회개치 아니하는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G. 결국은 억울함이 아니라 감사함이다.
다윗은 억울한 상황에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 그가 가졌던 억울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감사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17절에서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다윗이 이렇게 자기의 억울한 마음을 이기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마음으로 변화된 것은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이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함과 찬송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불의와 부정과 잘못을 완전한 의로우심으로 바로 잡고야 마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됩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됩니까? 신자들에게 이 사실을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완전한 정의를 시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기에, 비록 지금은 사실무근의 비난과 중상을 당하지만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께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4. 교훈과 적용
A. 정의를 구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다윗의 기도는 매우 두려운 기도입니다.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정의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중 누가 과연 하나님께 정의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프란시스 쉐퍼가 말한대로, 정의를 베풀어달라고 구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마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한 것인데, 그는 두 종류의 정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인 하늘의 정의가 있고 제한된 의미에서의 지상의 정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인 하늘의 정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지만, 세상적 정의에 대해서 신자는 언제나 고소자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7편을 포함해서 정의를 구하는 모든 시편의 기도의 입장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습니다. 한 과부가 자주 그에게 가서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과부를 거들떠 볼리 없습니다. 하지만 과부가 너무나 번거롭게 하니까 그 원한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은 눅 18:7~8에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바로 이 말씀은 신자들이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정의를 위해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데이빗 웰즈는 이 본문에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반역’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로 성도는 이런 모든 상황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방관적으로 대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합니다. 과부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정의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부는 계속해서 불의한 재판장에게 나아갔습니다. 자기에게 정의를 실현할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힘은 재판장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 의와 힘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정의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타락하고 불의한 세상을 향한 고소와 반역이 바로 주님께서 이 이야기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억울함 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당하고 억울하고 부정하고 타락한 일들에 대하여 의로우신 재판장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정의를 이루어주실 하나님께 말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기도는 결코 소극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B. 신자에게 억울함은 없다.
두번째로 오늘 말씀에 대한 개인적 적용을 한다면, 신자에게는 억울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윗이 아는 그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그는 압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것도,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비록 근거없는 중상 모략을 당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신자로 하여금 얼마나 담대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서는 것입니다. 구시와 같은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입고 뒤로 숨어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힘 조차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마귀가 이런 말의 불화살을 쏘아댈지라도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하면서 주를 계속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세상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 믿음은 마귀를 대적하는 가장 놀라운 힘입니다. 그런 은혜를 우리가 다 함께 누리고 경험하고 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