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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2).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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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2).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

시편 2:1-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5-17

말씀내용
1.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다(12).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했고, 시편 2편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고 마칩니다. 본래 이 두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해서 ‘복 있도다’로 마치는 한 편의 시였던 것 같습니다. 시편 2:7을 인용하는 사도행전 13:33의 오래된 사본들에는 시편 1편의 인용이라고 쓰여 있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그러므로 1편과 2편은 짝을 이루는 두 개의 시였거나, 본래 하나의 시를 둘로 나눈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냐, 둘이냐가 아니라, 시편 1편과 2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제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1:1; 2:12). 2편은 1편에서 말한 일반적인 구분을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단지 복 뿐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그 죄의 결과도 말합니다. 그래서 2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즉,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니, 너희는 반역에서 돌이켜 여호와께 피하라는 권고가 2편의 내용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말합니다. 그 결과는 ‘길에서 망하는 것입니다(12).’ 이것은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한 1편의 언급과 만납니다.

2. 세상과 죄의 본질(1~3)
2편은 각각 3구절씩으로 된 네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1~3절은 세상과 세상 권력자들이 하는 말을 해설자(시편 기자)의 입을 빌려서 말합니다. 4~6절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과 말씀입니다. 7~9절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말씀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10~12절은 다시 해설자인 시편기자가 세상을 향해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첫 장면부터 보지요. 1~3절은 세상과 권력자들이 하는 일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A. 세상과 권력자들이 하는 일(1): 소동을 일으키고 헛된 음모를 꾸민다.
1절에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민다”고 말합니다(1).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 반응만이 아니라 적대적인 소동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나님을 반대하여 궐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꾸민다고 합니다. 이것은 음모를 꾸미고 작전을 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헛된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시도는 헛될 수 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B. 세상의 본성(2):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함(행 4:25~26; 엡 2:2~3; 요 15:18~19)
그들이 대적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2절이 보여줍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2).” 여기 ‘기름부음 받은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다윗 자신만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는 신약 성경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사도행전 4:25~26을 보십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여기서 사도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그리스도’로 해석했습니다. 물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고,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여기서 언급한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왕이나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 말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과 그 권력자들은 총궐기하듯이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대적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한 세상의 본성입니다. 신약성경은 세상의 본성을 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 세상과 그리스도, 세상과 교회의 관계의 본질입니다.

C. 죄의 본성(3):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자!
3절은 세상과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3).”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이토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싫어하는 성향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죄의 본성이 세상과 세상의 권력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이고 소동을 일으키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우고 그것을 시행합니다.

D. 역사의 사례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한 경우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역사의 시도들은 많았습니다. 한 예로 구약시대에는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인 일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셨을 때,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학살했던 사건도 우리는 압니다. 이뿐 아니라, 사도들이 빌라도와 헤롯 등이 모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았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합니다(행 4:27~28). 초기 기독교의 강력한 대적이었던 3~4세기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245~313)이 만든 메달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진 것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이 사라지다.” 그는 지금의 스페인까지 영토를 넓힌 황제인데, 그가 세운 기념비에도 이런 글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 로마에 파멸을 가져온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사라지게 한 것을 기념하여.” 그리고 또 하나에는 “디오클레시안 황제, 그리스도교 미신을 폐하고 여러 신들을 널리 섬기게 한 것을 기념하여.” 하지만 그의 말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리어 그를 이어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합니다. 디오클레시안이 죽던 바로 그 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시도들을 보고 비웃으십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과 세상 권세자들이 아무리 소동을 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3. 성부 하나님의 주권(4~6):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이’라고 표현합니다(4). 이것은 초월적이며 능력에 있어 무한하시며 우리와 모든 면에서 다르시며 이 땅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한 이 표현은 성경에 유일무이합니다.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것은 기뻐서가 아니라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모여서 궐기하고 하나님과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을 보고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행사가 다 헛되고 무너질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의 반응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정상적인 반응은 진노입니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5).” 오늘날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런 말씀을 부담스러워하여 하나님을 변호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잘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 처한 영적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6).” 성부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행하신 일은 한 마디로 당신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일입니다. 왕은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킵니다. 이 시를 다윗이 썼다고 볼 때, 이것은 다윗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직접적 관계가 있습니다(삼하 7).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사도들의 해석을 보았듯이(행 4:25~26), 이 본문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시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과 권력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행하는 모든 교만함에 대하여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시는 일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것입니다. ‘세웠다’는 표현은 사실 ‘부었다’는 뜻으로 기름을 부어서 세웠다는 의미입니다.

4. 성자 하나님/기름받은 자의 행사(7~9)
7절에서는 화자가 바뀝니다. 화자는 기름부음 받은 자 자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명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시고 행하신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요 8:28; 5:19,30). 주님은 이 말씀대로 아버지의 명을 세상에 전하십니다. 그 첫 말씀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b).”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두 차례 성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였고(마 3:17), 또 한 번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입니다(마 17: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사도들은 이 시편의 말씀이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하신 말씀임을 확인해주었습니다(행 13:33).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 기자도 두 번이나 주 예수님께 대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히 1:5; 5:5). 성부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아들에게 구하라고 말씀을 하시고 구하시기도 전에 이미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8). 여기서 유업이라는 단어는 종종 기업으로 번역이 되는 말인데,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업/기업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으로서, 영원한 소유 개념이 담겨 있으며 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최후 심판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서,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하신 것이 바로 유업/기업 개념을 가리킵니다. 8절은 사실 우리 주님의 대위임령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주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가지고 장차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9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뒤에 있는 ‘부순다’는 말은 앞에 사용된 ‘깨뜨린다’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박살을 낸다는 뜻입니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어 박살을 내는 것이야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께 하신 명령의 내용입니다. 이 구절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이방 나라를 철장으로 깨뜨리고 질그릇같이 부수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이 시편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보십시오. 세상과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과 그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모여들고 음모를 세웁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시며 당신의 거룩하신 주권을 따라 한 가지 일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아들을 이 땅 시온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복과 저주가 아들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이방 나라가 다 그의 것으로 주어졌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철장으로 부수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과 경고(10~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제 10~12절의 마지막 권면이 나옵니다. 다시 인간은 두 가지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섭니다. 1편에서 말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10~12절의 화자를 성령 하나님이라고 설명했는데 매우 설득력있는 해석입니다. 성령님께서 모든 죄인들, 반역자들을 복 있는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과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려고 소동하며 헛된 일을 꾸미는 군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해서 말합니다(10).

A. 지혜를 얻으라(10).
먼저 지혜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겸손하게 받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교훈을 받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를 받으라는 부정적인 어조가 깔린 말입니다. 앞에서 한 말씀대로, 너희가 이렇게 행하다가는 철장으로 질그릇과 같이 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들으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B.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받는다면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1). 이 태도는 단지 정치적으로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진수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떨며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경망스럽고 무엄한 것이며,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노예의 두려움이라고 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무슨 친구나 되는 듯이 경박하게 말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그런 천박한 태도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세상과 권세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권면을 들으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b~29).”

C.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12a)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모든 반역자를 향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하십니다(12a). 고대에 입맞춤은 아래 사람이 윗 사람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표시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입맞추라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분 밖에는 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왕이고 주이십니다.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께 입을 맞추어야 할 너무나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추가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12).” 바로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태도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대한 태도가 곧 성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6.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12b)”
이제 시편 기자는 결론을 말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렇게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한 시편 1편은 2편으로 마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반역과 대적함을 일삼던 자리에서 돌이켜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피난처로 아는 사람,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는 형통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피하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