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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1 - 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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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1 - 두 길.

시편 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2-31

말씀내용
<두 길> 시 1:1~6


연초 혹은 연말에 우리는 한결같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는 “Happy New Year”라고 인사합니다. 복은 어떤 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happy하기를 바라는데 그 happiness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처럼 새해 첫날에 상고하기에 적합한 말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바로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새해에 그리고 남은 우리 생애와 영원히 참된 행복을 알고 누리게 하게 하시길 구합니다.

1. 시편 전체 내용의 요약이고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본문은 시편 전체 내용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진짜 행복이 무엇이고 누가 누리는 것인가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행복은 이런 저런 상황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적이라기 보다는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건 뭔가 번지수를 잘못 알고 집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이 가르쳐주는 행복은 전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인, 경건한 사람,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와 달리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을 본문은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고 말하고 그들의 존재는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겨와 같고 결국은 망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최대의 불행입니다.

2. 두 종류의 길이 있다.
본문은 분명하게 두 개의 길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이 보여주는 두 개의 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길과 사단의 길이 있고, 아벨의 길과 가인의 길이 있고, 야곱의 길이 있고 에서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 두 길의 차이를 선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A. 나무와 겨의 엄청난 비교
본문이 독자인 우리에게 두 길을 대조할 때, 가장 충격적으로 대조하는 표현은 나무와 겨의 비교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무와 겨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책의 본론은 같고 부록이 다른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는 똑같고 주일에만 교회에 가고 안 가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본질이 다르고, 본성이 다른 것입니다. 나무와 겨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문이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선언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교양있고 도덕적이고 괜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면,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비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존경받는 학식있는 사람부터 아무 생각 없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겨와 같은 존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장하는 것이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겨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겨의 비교는 이 둘 사이에 본질, 본성이 다르다는 것, 공통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교와 대조 속에서만 우리는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복있는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다.
본문은 복있는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이 되면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사람은 은혜를 받아 살게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때문에 참된 행복을 그 결과로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은 본문은 먼저 ‘아니다’로 설명하고 나서 ‘이런 사람이다’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A. 소극적 태도(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나무와 겨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려고 애써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깊은 결속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겨와 겨가 아니라 나무와 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속에 있는 생각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뜻을 도무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이런 종류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다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아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직 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절에서 말한 복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B. 적극적 태도(2)
시편 기자는 조금 더 나아가 복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그의 긍정적 특징을 밝힙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시편이 다윗의 시라고 추정할 때, 다윗이 가진 성경이라고는 모세가 쓴 오경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성하고도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가”가 복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참된 행복은 여기서 주어지는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좋은 날에는 시편을 찬송하고, 곤고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입니다.

C.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3)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복있는 사람은 나무에 비유됩니다.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인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뿐 아니라 잎사귀가 마르지도 않는 청청한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라고 할 때 이것은 분명히 누가 심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누가 심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심은 나무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이 본문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셨든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나무는 다 뿌리채 뽑히게 될 것이다”(마 15:13). 심판날에 다 뽑히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겨라고 할지라도 다 나무 처럼 보이고 때론 시냇가에 있는 푸른 나무처럼 보일지라도 심판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가 겨이기 때문입니다. 시냇가에 심었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시내, 거기서 용서와 은혜와 약속과 그리스도와의 복되고 즐거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시냇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과실을 잘 맺겠습니까?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시절을 좇는다는 말은 때를 분간한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인내의 과실을 맺고, 시련의 날에 믿음의 과실을, 번영의 시기에는 거룩한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 뿐입니까? 그 잎사귀가 언제나 마르지 않고, 그 행사가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이 형통하다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제 이름 석자 중에 하나도 ‘형통할 형’자를 씁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보통 이런 형통과는 다릅니다. 그 행사가 일부 형통하다고 하지 않고 ‘다’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실로 그렇습니다. 복있는 사람의 행사는, 그가 무엇을 하든지 다 형통합니다. 자기 식으로 형통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동행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목적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목적이 없이 일어나는 고통과 상실과 실패와 사고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목적이 다 ‘선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형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삶에 대한 묘사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있는 사람,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4.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심판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와 겨가 다르듯이 본질이,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곡식의 알갱이를 벗겨낸 껍질들입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라고 한 구절은 앞서 복있는 사람에 대한 모든 묘사에 대한 반대로 악인 곧 겨를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본문이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영적인 표현입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겨라고 선언하는 죄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교양있고 학식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문에 죄인은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 때, 이들이 경험하게 될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소리칩니다(계 6:15~16). 심판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얼마나 두려우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참된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결국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둘로 갈라놓으신 중에, 한편인 의인의 회중,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다 섞여서 지냅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심판을 통하여 완전한 분리가 있게 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니 교회에서 나무와 겨가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속임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길의 끝: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삶)이 있고 망하는 길(삶)이 있다.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 두 종류의 삶을 말합니다. 두 개의 길을 말합니다. 그것을 6절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길’이 있고, ‘망하는 길’이 있다고 나누어 말합니다. 두 종류의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길은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즉 칭찬해주시는 길입니다. 다른 길의 끝은 망하는 길입니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궁극적으로, 영원히 망하는 길입니다.

6. 교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2011년 정월 초하루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습니다. 두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본문이 너무나 분명하게 두 종류의 길을 대조시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모호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의인의 길입니까, 악인의 길입니까? 복있는 사람의 길입니까, 죄인의 길입니까? 여러분은 나무입니까, 바람에 나는 겨입니까? 이것들을 구분하여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을 본문을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도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고,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으며, 같은 자리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고 계십니까?

대답은 예와 아니오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면, 여러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고 쟁취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고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정직하게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오늘 2011년 정월 초하루에 이보다 중요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기분좋은 이야기 하나 듣고 시작하면 좋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복을 많이 받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아직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라는 확신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금년에는 믿어야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내가 결심해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지 않은 여러분의 존재의 비참함을 직시하고 깨닫기 전에는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복있는 사람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영원에 이어지는 복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은혜,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인사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묵상함으로 큰 은혜를 누리고, 결국 우리 인생 길 끝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복된 은혜를,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