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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 빠른 길, 바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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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 빠른 길, 바른 길

시편 1: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5-10

말씀내용
1. 산상설교와 시편 1편
주님의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님의 산상설교와 시편 1편은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산상설교는 팔복의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해서 8가지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묘사합니다(마 5:3). 시편 1편도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함으로써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두 번째로 비슷한 점은 두 본문이 모두 ‘두 개’들의 여러 조합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문과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마 7:13~14). 좁은 문과 넓은 문과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와 두 종류의 열매도 있습니다(마 7:16~18).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아름다운 열매와 나쁜 열매입니다. 또 두 개의 집과 두 개의 기초가 있습니다(마 7:24~27).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것은 모두 두 종류의 사람을 상징하는 유비들입니다. 그런데 시편 1편도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인’과 ‘악인/죄인/오만한 자’입니다. 또 형통한 자와 망하는 자,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 그리고 의인의 길와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도 이 두 가지 길에서 빗겨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와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미국의 국민 시인이라 불리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유명한 시에서 말한 것도 이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훗날에 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의 길이 바로 주님 자신이며, 좁은 문을 지나는 길이라는 사실을 다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조금 모호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면, 성경은 매우 정직하고 분명하게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편입니다.

2. 복 있는 사람의 소극적 특성: 따라 행함(walk). 섬(stand), 앉음(sit)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긍정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지 않고, 부정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 여기 나오는 세 동사는 ‘따른다’, ‘선다’, ‘앉는다’입니다. 이 동사들은 인생 길의 총체성 즉 인간 삶의 근본적인 행위들을 묘사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좇아 행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 자리에 서게 되고, 나중에는 거기에 터를 잡고 눌러 앉게 됩니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가, 그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에 터를 잡고 앉는가 하는 것이지만, 시편 기자는 그것을 어디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누구와 함께’ 라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죄인/오만한 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나도 죄인인데, 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에는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본성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전처럼 악인의 꾀를 좇아 살 수 없고, 죄인의 길에 설 수도 없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목표와 가치와 삶의 이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본성이 바뀌어 전처럼 행하고 살 수 없게 된 사람입니다.

3. 복 있는 사람의 적극적 특성
A. 즐거움의 대상인 하나님의 율법(2a)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즐거이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즐거움의 대상이 바뀌었고 추구하는 바가 바뀐 것입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2)”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수많은 명령과 규례로 구성됩니다. 완전한 순종을 드린 자에게는 축복을 약속하지만, 하나라도 어긴 자에게는 저주를 약속합니다. 이런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또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합니다. 이 말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단순히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었고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그 삶에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이라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율법을 즐거워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중생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기쁨이 된 사람입니다. 성경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역사 속에서 핍박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좋지만 성경만은 빼앗아가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B. 율법을 묵상함(2b)
묵상한다는 말은 단순히 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묵상은 읽는 것을 전제합니다. 묵상은 읽은 말씀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읽은 말씀을 가슴에서 되새기고 또 되새김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 말씀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교훈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는가? 이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나는 경험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까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루 종일 성경을 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아침에 성경말씀을 읽었다면 그 말씀 전체 혹은 한 구절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틈틈이 혼자 있을 때 혹은 그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기 위해 시간을 떼어 두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일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이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왜 성경에는 박식하지만 참된 경건이 없는 사람들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읽습니다. 공부도 합니다. 하지만 묵상이 없으면 그는 오만한 자가 되고 맙니다. 어떤 물보다 달고 신선한 물이 있는 깊은 우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수고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물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이치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바뀝니다. 하지만 아무 수고도 없이 그 말씀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의 맛을 얻기 위해서는 묵상이라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 있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성품에 대한 진리에 영향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함을 입어가는 것입니다.

C. 열매를 맺는 삶, 형통한 삶(3)
복 있는 사람의 삶의 결국을 시편 기자는 3절에서 아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이 사람은 결국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을 삽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는 형통한 삶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냇가에 심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를 누가 뽑을 수 있고 꺾을 수 있습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그래서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습니다. 이 말은 어느 때든지 그 때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인내의 과실을 맺고, 시련의 날에 믿음의 과실을, 번영의 시기에는 거룩한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이것이 바로 만사 형통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만사 형통하다고 할 때, 그것은 고난이나 문젯거리나 나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형통함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순간에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39장에 요셉의 경우처럼 잘 보여주는 본문도 없습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에 형들에게 팔려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말합니다. 또 주인인 보디발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그는 보디발의 신임을 얻었지만, 보디발의 음란한 아내로 인하여 억울한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창 39:21)”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인 형통함의 의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형통함은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일어나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롬 8:28).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떠나시지 않는 형통함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때때로 복 있는 사람의 삶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때때로 복 있는 사람은 빠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바른 길이고 의인이 길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빠른 길과 바른 길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바른 길이 빠른 길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4. 악인의 특징
A. 바람에 나는 겨(4)
4절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라고 말함으로써 악인의 특징은 복 있는 사람의 모든 특징과 정반대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악인은 물론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터를 잡고 앉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삶에 열매가 없으며 모든 일이 형통하지 않아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기 때문에 빠르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그는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겨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사망의 길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빠른 길과 빠른 성공을 추구합니다. 바른 길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때때로 그들은 빨리 성공하기도 하고 형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겨에 불과합니다.

B.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의인의 회중에서 버림을 받는다(5)
5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들의 결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받은 후에 이기고 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교회에 들어가 섞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되면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악인의 결국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빠른 길의 끝입니다.

5. 빠른 길이냐, 바른 길이냐(6)
시편 기자는 마지막 6절에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길과 망하는 길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시편 1편 강해의 제목을 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가져왔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추월선으로 다른 차들을 앞질러 빨리 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빠른 길이 바른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인지 살피십시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인지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선택과 결단을 하고 삽니다. 양심을 조금만 속이면, 한 번만 눈감아주면 훨씬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은 언제나 바른 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믿음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고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로버트 프로스트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6.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과연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기 생명의 안위를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도 복 있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는 살인자였고(애굽에서), 자기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분노를 퍼부은 인물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이 시를 쓴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다윗은 힘으로 남의 아내를 빼앗고 남편을 죽인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인간도 1절이 묘사하는 복 있는 사람의 범주에 들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 이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으셨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셨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아담도 범죄했고 우리도 범죄했으며, 아담도 망하는 길을 걸었고 우리도 그러했습니다.

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행복하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 있는 분이시지만, 신자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산 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죄가 그리스도께 옮겨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을 듣는 모든 신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롬 8:1).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로도 번역을 할 수 있겠지만, 아주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관찰한 후에 선포하는 히브리 말의 형식입니다. 사실 이 시편은 “오, 이러 이러한 사람은 행복하도다” 혹은 “오, 이러 이러한 자는 가장 복된 이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시편 1편이 가르치는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