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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5). 성도가 누릴 장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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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5). 성도가 누릴 장래의 영광

요한계시록 14:1-5, 시편 2:6, 야고보서 4: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1-15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을 상고하기 시작할텐데, 잠깐 이전 문맥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2-13장은 용과 두 짐승의 거짓 삼위일체가, 여자가 낳은 아이와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실패한 악의 삼위일체는 결국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경제활동을 하고 먹고 살 수 없도록 성도들을 박해하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13장에서 두 짐승이 교회의 성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14장에서 요한은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14장의 환상은 성도들의 궁극적 미래와 죄인들의 궁극적 미래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갑자기 요한에게 이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셔서 성도들과 죄인들의 궁극적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 승리의 운명을 보여주심으로써 두 짐승과 싸우며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버트 마운스의 말입니다. “독자들이 그들의 인내에 주어질 궁극적인 상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심판을 묘사하는 중간 중간에 최후의 복에 대한 언급을 끼워 넣는다…요한은 재빨리 곧 들이닥칠 폭풍 너머에 있는 영원한 밝은 아침으로 옮겨간다.”
오늘 성도의 궁극적 미래를 다루는 이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개의 소주제, 어린양, 어린양이 서 계신 시온 산 그리고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 사만 사천의 사람들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1. 어린 양 (1; 빌 1:23)
본문은 ‘또 내가 보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6절과 14절에서도 사용되는 이 말은 새로운 환상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다시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제일 먼저 본 것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도 우리 말 성경에서처럼, ‘어린양’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요한이 본 것은 정금으로 된 길도 아니었고 벽옥으로 만든 성벽도 아니었으며 광채 나는 왕관들과 그 왕관을 쓴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시선을 끈 분은 어린양,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이 의도적으로 강조된 것은, 13장에서 어린양을 흉내 내는 가짜(13:11과 첫째 짐승)에 대하여 진짜가 여기 계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짐승은 어린양을 흉내 내고 짐승을 경배하게 하였으며 짐승의 표를 받으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참된 성도들은 그 표를 받지 않음으로써,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요한은 참되신 어린양,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뵙습니다. 이분만이 성도들의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스펄전은 왜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로 결정하셨는가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어린양으로써 싸워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군대 장군들은 전쟁에서 이긴 승리를 기념하는 날에 해마다 깨끗한 옷이 아니라, 칼자국이 나고 총구멍이 난 저 옷을 입겠다고 했다. 내가 싸워서 이겼던 날에 입었던 바로 그 옷을 입겠다고 말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양으로써 죽어 지옥을 물리쳤다. 양으로써 내 백성을 구속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낙원에서 양으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예수님께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유난히 많이 사용된 칭호인 어린양은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사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은 생생하게 그 모습을 보았던 제자였습니다. 물론 유다 지파의 사자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주님은 어린양으로 요한과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이 어린양의 모습을 뵈올 때, 그 마음에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스펄전의 말입니다. “나의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을 눈물 어린 마음으로 바라본 자들에게 천상의 어린양은 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뵈올 때에, 내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느라 받은 고난과 눈물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요한이 하늘 환상에서 제일 먼저 어린양을 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제가 천국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안 계시면 그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지옥에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곳이 제게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제가 바라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고백은 새롭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고백한 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3).”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죽음 혹은 천국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죽음과 천국을 묵상하는 성도들이 기쁨과 영광으로 그날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어린양을 제일 먼저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2. 시온 산 (1; 시 2:6)
본문에서 주목할 두번째 주제는 어린양이 서 계신 곳, 시온 산입니다. 1절에서 어린양 다음에 보게 되는 단어입니다. 시온 산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모리아 산입니다. 후일 그곳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시온 산은 성전산으로서 유대인의 예배의 중심지이고, 메시아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을 자신에게 모으는 곳으로, 또는 천국의 예표로 이해되어왔습니다. 성경에서 죄와 심판과 관련되어 종종 언급되는 예루살렘과 달리, 시온은 죄와 심판의 장소를 가리키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심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거룩한 산 시온에서 왕-메시아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편 2:6).” 이 말씀에 의하면, 요한이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시온 산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는 것은 어린양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되신 왕-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시온 산은 문자적 의미로 이스라엘에 있는 지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지금 요한은 하늘 환상을 보고 있으며 시온 산도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시온 산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남은 자와 함께 거하시고 그들에게 안전을 제공하시는 마지막 때의 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래서 1절에서 시온 산에 서 계시는 주님과 함께 십 사만 사천의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도 같이 서 있는 것입니다.
시온 산과 함께 우리가 주목할 동사가 있는데, ‘섰고’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린양으로써 시온 산 정상에 우뚝 서 계시다는 것은 승리의 자세, 군사적 은유로서 원수를 멸하신 승자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린양과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서 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박해 받기를 자처한 성도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시온 산은 거짓 삼위일체에 대한 어린양과 성도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곳입니다.


3. 십 사만 사천 (1-3; 7:14; 13:16; 사 49:16; 계 5:9-13)
본문에서 세번째로 주목할 주제는 ‘십 사만 사천’입니다. 이미 우리는 7장에서 ‘십 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을 용과 짐승들과의 전쟁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수는 139,999명이 아니고 144,000명일 것입니다. 그 수가 완전히 채워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본 십 사만 사천도 7장에서 보았던 십 사만 사천과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학자들 중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 사만 사천을 초대교회의 순교자들, 또는 성도들 중에서 특별한 엘리뜨들을 가리킨다고 보거나(홀 린세이에 따르면 그들은 많은 빌리 그래함들이다), 혹은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마는,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서(계 7:14),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 즉 우주적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144,000이 어떻게 나온 숫자인가를 살펴볼 때에 더 분명합니다. 구약 12지파와 신약 12사도를 곱하고 거기에 아주 많은 것을 가리키는 1000을 곱한 것이 144,000 이기 때문에, 이 숫자는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은 십 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13:16) 짐승의 표를 언급하였었던 것을 의식하여, 십 사만 사천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표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지, 그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고 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성도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성경은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이사야 49:16).” 성도는 이런 존재입니다.
요한은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큰 소리였습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표현할 때, 해안을 강타하는 파도의 포효 소리를 생각하고 많은 물소리라고 했습니다. 우렛소리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입니다. 그런데 이 큰 소리는 두려운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거문고는 구약성경의 수금과 같이 10에서 12줄을 가진 현악기를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키타라(κιθάρα)’인데 여기서 기타(guitar)라는 악기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요한은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식별하고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를 들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 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요한계시록 14:3).”
새 노래는 찬송이었는데, 누가 부르는 찬송이었는가 하면, 속량함을 받은 십 사만 사천이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5장에서도 우리는 하늘의 보좌 주변에서 거대한 성가대가 부른 찬송이 울려 퍼지는 것을 요한이 들은 바 있습니다(계 5:9-13). 그것도 ‘새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그 찬송을 부른 자들은 이십사 장로 및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려지는 새 노래는 천사들이 아니라, 속량함을 받은 십 사만 사천 즉 온 교회가 부르는 찬송입니다. 이 또한 거대하고 큰 소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자적으로도 보더라도 144,000명의 성가대를 지상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성가대가 천 명만 모여도 어마어마한 소리의 찬송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이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에 그 노래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5장에서 우리가 본 새 노래의 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요한계시록 5:9–10, 12-13).”
이 새 노래는 십 사만 사천 외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는 노래입니다. 오직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 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찬송가를 따라 부를 수 있고, 가사에 큰 의미를 담지 않고 흥에 겨워서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 노래를 가슴으로 부를 수 있는 자, 그는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성도입니다. 성도 외에는 하나님과 어린양께 합당한 찬송을 부를 자는 없습니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부른 이 노래 소리는 엄청난 기쁨과 경배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4. 구원받은 성도가 얻을 영예로운 칭호들 (4-5)
4-5절은 십사만 사천이 주님으로부터 얻을 영예로운 칭호를 네 가지로 소개함으로써, 십 사만 사천, 구속받은 성도가 얻을 영광을 보여줍니다.

A.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들’ (4; 17:1; 히 13:4; 약 4:4; 요일 5:21)
먼저, 구원받은 성도는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숫총각’이라는 말입니다. 의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사람,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 큰 음녀인 바벨론과 음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계 17:1)입니다. 로마카톨릭은 독신이 결혼 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가르침 위에서 이들은 독신남 십 사만 사천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을 독신 보다 열등하거나 속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거룩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히 13:4).
사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의 이미지와 함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육욕을 멀리해야 하는 전사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돈과 성공과 육욕을 우상으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거절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야고서서가 경고한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4).” 구원받은 성도의 첫번째 특징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의 결론적 경고를 들으십시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한1서 5:21).”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주실 것입니다.

B.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 (4; 막 8:34)
둘째로, 구원받은 성도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를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여기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라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길이 성도가 가는 길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여기서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은 주님께 대한 그저 일반적 충성심이 아닙니다. 그레고리 비일이 말하는대로, 이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로부터 믿음에 타협하고 우상숭배의 거짓을 따르라는 압박을 받을 때에도 예수님을 꾸준하게 증언하는 성도들의 온전함”을 말합니다. 상황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모든 상황이 우리의 믿음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라도, 그런 때에도 어린양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제자입니다.

C.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 (4; 렘 2:2-3)
세번째로, 구원받은 성도는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라는 영예를 얻습니다. 십사만 사천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요한 당시의 1세기 말의 시점에서, 장래 주님의 재림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표현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서 ‘첫 열매’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렘 2:2-3), 여기서 십 사만 사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쓴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로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소유된 자들입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한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D.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5; 사 53:9; 히 12:23)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5절입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14:5).” 이것이 성도가 장래에 얻게 될 영예로운 칭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3:9을 인유하여 그리스도의 특성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이사야 53:9).”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을 닮습니다. 그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점이 그렇습니다. 십 사만 사천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기에(히 12:23)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흠이 많으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 흠이 없는 자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5. 그날 시온 산에 서신 어린 양을 뵈올 것을 생각하고 살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과 가진 증거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견딘 성도들을 기다리는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을 열어 그날의 영광을 주목하고 오늘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모든 환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용기나 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꺾으시고 이기신 승리자로서 하늘의 시온 산 위에 주권을 가지고 우뚝 서 계시는 어린 양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 사만 사천은 어린양과 함께 승리자로서 시온 산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가슴 떨리는 찬송을 하나님과 어린양께 불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새 노래를 배워야 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부르던 그 노래를 그날 거기서도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까? 그 노래가 그날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가 맞습니까?
또 묻습니다. 지금 설명한 이것이 여러분의 장래의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 길을 따른 자들에게 영예로운 칭호들을 주실 것입니다. 이 영예로운 칭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이렇게 보시고 이렇게 영예롭게 여기십니다. 성도가 얻어 누릴 영예로운 칭호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숙제는 오늘 그 칭호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