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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 (3). 아침의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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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 (3). 아침의 찬송

시편 3: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5-24

말씀내용
<아침의 찬송> 시 3:1~8

1. 아침의 찬송
사람마다 때마다 아침을 시작하는 마음 상태가 다를 것입니다. 시편 3편은 신자가 어떤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편 1편과 2편이 짝을 이루듯이, 3편과 4편도 짝을 이루어 각각 아침의 찬송과 저녁의 찬송이라고 불립니다. 3편은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한 것 때문에 아침의 찬송이라고 불리고, 4편은 8절에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라고 한 것 때문에 저녁의 찬송이라 불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한 후에 이 말씀이 새벽이나 아침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 힘을 얻는 말씀과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상황(1~2):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삼하 15:13~17:22)
이 시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사무엘하 15:13~17:22에 있는 내용이 이 시편의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은 산전 수전을 다 겪은 다윗에게도 정말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이 사건이 자신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범죄로 말미암아 받는 징계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 고통은 우리가 상상 조차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 시는 애가로 분류됩니다. 국가적인 애가가 아닌 개인의 애가입니다. 실로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터졌을 때, 머리를 가리고 맨 발로 울며 걸었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 이 슬픈 광경이 이 시의 배경입니다.

A. 대적이 많다(1~2).
1~2절은 다윗이 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여기에는 ‘많다’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이것이 다윗이 느끼는 현실이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어찌나 많은지, 일어나서 다윗을 치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사무엘하 15:13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직후, 다윗의 신하가 한 말입니다. 다윗은 수적으로 압살롬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싸우려다가는 성이 피바다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사방에 대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고후 4:8). 1~2절은 이런 객관적 상황에 대한 다윗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B. 비방: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2)
이것뿐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여 비방하는 말은 비수와 같이 다윗의 마음을 찔러 고통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향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표적으로 사울과 같은 지파인 시므이가 피신하는 다윗의 일행을 따라가면서 저주와 비방을 한 것을 압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삼하 16:7~8).” 이 말이 얼마나 다윗을 아프게 했을까요? 그는 마치 다윗이 반역을 일으켜 사울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피 값을 갚으시려고 압살롬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사지에 몰아 죽게 하고 그 아내를 빼앗은 범죄자였습니다. 우리야의 피에 대해 다윗은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지만, 이 비난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또 압살롬의 반역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 때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가 건너가서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대로 받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시므이와 같은 자들의 거짓된 비방은 다윗의 마음을 찌르고 찔렀을 것입니다. 시므이의 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본래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군사적 용어로 사용되어서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승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C. 우리가 겪는 고통
우리가 다윗과 동일한 고통을 겪지는 않을지라도 유사한 상황을 적잖이 경험합니다. 아마 가장 근접한 것이라면, 사랑하는 가족으로 인해 겪는 고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부모를 거역하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지속될 때 부모가 느끼는 고통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한 몸을 이루고 사랑해야 할 부부가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고통을 더해준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고통은 다른 모든 관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멀리 있기만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의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도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린 증거가 아니지만, 대적자들은 주변에서 “하나님이 저들을 버리셨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신자가 들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런 비방입니다.

D. 하나님께 호소하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다윗이 호소하는 대상은 유력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애통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애통합니다. 그는 이렇게 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울며 하나님께 호소하다 보니, 그는 또 다른 믿음의 걸음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3절입니다.

3. 믿음의 ‘그러나’(3~4)
개역개정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3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But’이라는 접속사를 넣었습니다. ‘그러나’는 앞의 내용을 부정하고 상반되는 내용을 전개할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다윗은 ‘그러나 여호와는’이라고 시작합니다. “너무나 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비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주님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자신을 사면에서 보호하시는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또 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혹은 내 업적이나 성취가 아니라 내 영광은 주님께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주님의 영광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머리를 든다는 표현은 옛 직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뜻입니다(창 40:13).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왕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군사적 표현으로 승리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A. 대적에게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라.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했는가 하는 입니다. 다윗은 대적들에게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 일이고, 이것이 믿음의 ‘그러나’를 사용하게 한 힘입니다. 우리가 대처 방법과 전략을 생각한다는 명목 하에 우리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그 상황만을 계속 주목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믿음의 ‘그러나’를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주목하면 할수록 우리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평안을 누리는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삶의 환난과 고통 속에서 취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십시오.

B.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하라.
여러분,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우리는 다윗이 했던 일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가나안으로 보냈던 열 두 정탐군의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다른 열 명의 정탐군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열 사람의 눈은 오직 그들의 대적인 가나안의 거인 족속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대적들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9).” 또 아람군대에 포위된 도단 성에 있던 엘리사와 그의 사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엘리사의 사환은 성을 포위한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들의 존재도 보았지만 눈을 돌려 하나님의 도움을 보았습니다. 그는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하 6:17).” 그때 여호와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주시자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눈으로 대적만을 보는가,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 홀로 대결했던 엘리야의 용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용기는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또 기드온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이런 믿음의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대적만을 주목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믿음의 ‘그러나’를 말할 수 있고 여러분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적들이 작아질 것입니다.

C.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확신(4)
다윗이 이 모든 상황에서 정신 줄을 놓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는 이유는 그가 자기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 같이 믿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여러분도 이것을 아십니까? 아주 작은 삶의 상황들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큰 일이 터질 때에도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큰 환난의 날이 아닐지라도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간구와 소원을 아뢰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경험입니다. 이 확신이 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다윗으로 하여금 절망과 낙담에 빠지지 않게 지켜준 것입니다.

4. 믿음의 열매: 풍랑 속의 평안한 잠(5~6)
이 믿음의 ‘그러나’가 가져온 결과를 5~6절이 보여줍니다. 이 부분이 이 시편의 백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1~2절의 다윗의 상황을 생각할 때, 어떻게 5~6절과 같은 고백이 가능합니까? 이것이 믿음의 ‘그러나’가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고 상황은 그대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주목하기 시작한 다윗은 자신이 편안한 중에 잠자리에 들 수 있고 단잠도 잘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압살롬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을텐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드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역설입니다. 이 고백은 신자의 믿음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밀리는 전투의 현장에서도 단잠을 자게 합니다. 사실 풍랑이 이는 배 안에서 골아 떨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일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이 당황할 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주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증거는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든 사람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망의 단잠입니다. 요나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요나가 탄 다시스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지만, 요나는 배 아래에 내려가 자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더 나아가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대적은 이제 천만인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들은 다윗을 넘어뜨리려고 진을 친 군대입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와 아수라장 속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모습은 고요와 확신입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윗은 이제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5. 하나님을 따라가며(7)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삶(8)
이제 다윗은 외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말입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걸을 때, 그들은 늘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민 10:35).” 광야의 백성들은 길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궤가 먼저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전에 모세가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표현되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고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일어서 행할 때 그들은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만나게 될 모든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흩으시고 도망하게 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압니다. 7절에 동사가 세 개 나오는데 ‘구원’과 ‘뺨을 치심’ 그리고 ‘이를 꺾으심’입니다. 이 동사들의 시제는 모두 완료형인데, 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상황이지만, 마치 모든 상황이 끝난 것처럼 보는 관점을 표현합니다. 우리 말로는 과거시제로 번역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구원을 설명하면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고 말할 때와 동일한 관점입니다. 7절에서 뺨을 친다는 것은 최고의 모욕을 주는 행위이고, 이를 꺾는다는 것은 거짓 증언으로 계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심판의 의미로 고대 근동에서 종종 사용된 표현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복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고백으로 환난 중의 기도시를 마칩니다.

6. 교훈과 적용
A. 그리스도
이 시편을 주의 깊게 보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방에서 대적하는 유대인들 속에 사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님은 대적하고 비웃는 자들의 거짓 증언과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비방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죄인을 심판하시는 성부 하나님께 모든 신뢰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지상 생애 동안 그 많은 대적들 속에서도 잠을 주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것을 주님 보다 더 깊이 알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대적하고 채찍질하며 못을 박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 모든 공포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심으로 완전한 고요와 확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점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시를 쓰게 하셨습니다.

B. 교회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난 스무 세기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대적들에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역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지도, 저들을 도우시지도 않는다는 비방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뿐 아니라, 자신들을 붙드심을 압니다. 구원과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성도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C. 신자 개인
물론 신자 개인에게도 이 시편은 적용됩니다. 신자는 모두 순례길을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광야의 백성들이 떠날 때 모세가 했던대로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매 순간에 그렇고 특별히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순례길은 혼자 걷는 것이 아니고, 앞장 서시는 하나님을 따라 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며 나의 머리를 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천만인이 에워싸 진친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비방한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이길 수 있는 두려움이나 낙심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붙드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워 자고 깹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말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7).” 지금 여러분을 두렵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상황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을 말할 수 없는 깊은 스트레스로 짓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맞아야 하는 대적은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이 시편에서 다윗이 누리는 은혜는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장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십시오. 다윗처럼 말입니다. 아침마다 이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짓누르는 모든 두려움을 떨펴 버리십시오. 평안을 누리시고 평안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티모시 레인과 폴 트립이 쓴,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는가](생명의말씀사)에 나오는 고백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p.365)

매일 아침이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성공적으로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감사를 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순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곧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아침을 맞이한다면 거짓을 신봉하는 것이겠지요.
소망 중에 사는 것은 진리 안에 사는 것이며,
진리 안에 사는 것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나날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가장 귀한 예배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