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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6). 징계를 받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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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6). 징계를 받을 때

시편 6:1-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3-11-22

말씀내용
1. 참회의 시
시편 6편은 고난 받는 성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에는 참회시라고 불리는 시들이 있는데, 32, 38, 51, 102, 130, 143편과 이 6편이 거기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6편에는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병든 자가 치유를 구하는 기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1절은 명백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로 징계와 책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비록 죄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참회의 시로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표제어에 스미닛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제8음을 말하는데 한 옥타브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정확이 어떤 음악적 기호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7절은 참회와 간구이고, 8~10절은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신과 함께 시인의 영혼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시인의 상태?영적 침체
먼저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상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로 책망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진노로 징계를 받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수척했다고 말하는데 마치 뿌리가 뽑혀진 나무처럼 넘어지고 시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2). 그는 자신의 뼈가 떨린다고 말합니다(3).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보통 신체 부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는데, 뼈는 몸에서 가장 강하고 단단한 부분이고 힘의 원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령, 시 35:10에서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이라고 말할 때, 인간 자신을 의미하고, 시 51:8에서 “주께서 꺾으신 뼈들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할 때, 감정의 좌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뼈는 건강뿐 아니라 고통과 슬픔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뼈가 떨린다는 것은 인생 전체가 흔들리고 몸과 마음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표현은 시인이 어떤 심각한 질병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도 제공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그는 영혼도 매우 떨린다고 말합니다(3). 뼈가 떨리는 것과 영혼이 떨리는 것을 시인은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결코 무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의사로서 목사가 되었던 로이드존스는 <영적 침체?그 원인과 치료>라는 시리즈 설교에서 사람의 육체가 영혼과 얼마나 밀접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분석했습니다. 영적 침체는 때로는 육체적 질병이나 피곤함에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깊습니다. 우리가 이 시인의 상태가 매우 깊은 영적 침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아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의 영적 침체는 어디서 왔는가? 1절을 보면 그가 어떤 죄를 지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영적 침체는 언제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이기에 영적 침체는 죄와 완전히 무관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영적 침체와 관련하여 신자가 겪게 되는 어려움
여기에 우리의 연약함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적 침체를 겪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고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실 것입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거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곧 영적 침체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 어려움과 침체와 고통이 죄 때문인지, 아니면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한 성품으로 빚어가시기 위해서 주어진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이 보통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겪게 될 때 만나는 또 다른 어려움입니다. 물론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제나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처럼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경험해 보았다면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종 이런 영적 침체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렸고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들은 이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의식과 경험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도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 만일 다윗이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슬퍼하며 영적 침체에 빠진 것이었다면 그는 자기가 죄를 범한 그 자리에서 참회의 눈물을 쏟고 있는 것이라고 아치볼드 심슨은 지적합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 마음이 상하고 울어서 눈이 쇠하여 졌다고 말합니다(7). 이런 상황을 다윗 자신이 겪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왜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다윗의 영적 침체의 상황에서 기록하게 하사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것일까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그들은 더 깊은 영적 침체로 이끌리게 하는 연약한 사람들의 글이 아니라, 바로 다윗이 쓴 이 시편을 읽었습니다. 우울증과 침체를 겪었던 이들 가운데 우리가 들어서 아는 사람들은 데이빗 브레이너드, 마틴 루터, 찰스 스펄전 등이 유명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4. 영적 침체와 무기력증
영적 침체는 이런 증상으로 찾아옵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든 예들입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옷을 입을 힘, 의욕 조차 없습니다. 차를 운전해서 일을 갈 힘이 없습니다. 학교 가는 애들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줄 힘도 없습니다. 집을 청소할 생각에 우울해집니다. 교회가 가기 힘들만큼 침체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는게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좀체 기도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의 영과 육이 수척해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합니까? 적당한 기분 전환 정도로 이 침체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적당한 기분 전환이 효과가 없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의 영적 침체를 근본적으로 물러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이런 가벼운 처방이 만연하는 것을 염려합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런 영적 침체 속에서 이렇게 다윗처럼 외쳤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은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구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4).” 다윗의 절박함이 얼마나 깊은지, 그는 1~4절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 즉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건지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언약의 사랑,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반드시 언약하신대로 이루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르고 또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서 배우십시오. 승리의 때에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패배의 때에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유혹의 때에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구원해달라고 외치십시오. 영혼의 어두운 밤에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 우리의 길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유일하고 확실한 소망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 조차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의 시기에 다윗이 했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했던 것입니다.

5. 위대한 전환점
이 시의 놀라움은 8절에서 시작됩니다.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고 선언합니다(8~10). 사실 7절까지의 내용과 그 흐름을 볼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혼동과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 지나가고 확신과 소망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분명히 다윗의 기도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내 곡성(울음 소리)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었음이여”에서 고백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와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는 확증을 성령 안에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7절과 8절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참된 은혜의 증거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듯이, “행악하는 너희여, 다 나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장래의 소망 가운데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며 부끄러워 물러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 가운데 외칩니다. 그 원수들은 얼마나 다윗이 침체되어 있을 때 다윗을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영적 침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으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나 오래도록 이 기도를 반복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을수록 더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리 떨어져나간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그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은 때로는 이와 같이 한 순간에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니, 바로 이 시편과 같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소망을 가지기를 원하셔서 성령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셨고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이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이고, 그것을 소망함으로 우리는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하나님에게서 하나님께로 피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런 소망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로 피하는 법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고통스럽고 혹은 죄로 인해 힘든 상황 속에서 다윗은 아담처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숲으로 숨지 않았고 사울 왕처럼 영매를 찾아가지 않았으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피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분노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한 것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았습니다(사 42:3).” 이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은혜요, 자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죄인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자비와 인애를 한량없이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침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를 붙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헤세드를 아는 자들은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침체의 늪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압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를 건지실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이 소망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피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그것 외에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소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기도문을 하나 소개합니다.

당신께서 내리시는 징계의 채찍을 받을 때에도
내 안에 생명과 평강을 지키게 하소서!
나를 죽이지 마시고, 내 죄를 죽이사
당신은 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실 영광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알게 하소서!
마지막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외치게 하소서
"오, 주여! 오소서, 주를 신뢰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