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시편강해(2013) - (5). 원통함 속에서 신자가 누리는 행복

시편강해(2013) - (5). 원통함 속에서 신자가 누리는 행복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2013) - (5). 원통함 속에서 신자가 누리는 행복

시편 5:1-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3-11-15

말씀내용
너무나 원통하고 기가 막혀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 밖에는 할 수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한숨과 탄식만 나올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신자가 어떻게 원통함 속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5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록 다윗이 이런 원통한 상황을 오래 겪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다윗이 이 시를 썼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다윗을 영감하사 이 시를 쓰게 하심으로써 모든 원통함에 처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는 다섯 소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처음 소절은 1~3절인데 원통한 상황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는 시인의 기도입니다. 둘째 소절은 4~6절로 시인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기도의 근거로 주장합니다. 셋째 소절은 7~8절인데 하나님께 경건한 자의 확신과 간구를 올립니다. 넷째 소절은 9~10절로 행악자들을 대적하는 기도이고 마지막 11~12절에서는 모든 상황을 능가하는 참된 신자의 기쁨과 행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라(1~3).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아마 말로 자기의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다 담아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A. 세 가지 기도의 종류
그래서 그는 자기 말뿐 아니라 자기 심사를 알아달라고 구합니다(1). 또 자기 부르짖음도 들어달라고 구합니다(2).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세 가지 형식은 말, 침묵(마음), 부르짖음입니다.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기도에는 이처럼 다양한 형식이 있고 모두가 용인됩니다. 탄식은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또 부르짖음은 ‘흐느껴 우는 소리’라고 스펄전이 말했는데, 기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흐느껴 울 수 있습니다.

B. 기도의 결심(2b~3)
2절에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고 하는 말은 미완료시제로, “기도를 결코 중단하지 않겠습니다”하는 말입니다. 이런 다윗의 결심이 3절에서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아침에’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침에 내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아침에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침’은 정확하게는 ‘새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벽기도는 물론 한국교회에 독특한 것인데, 이것은 대단히 성경적인 뿌리를 가진 영적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막 1:35), 오늘 본문에는 다윗도 그렇게 결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아침에 기도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의 기도가 더 효험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살전 5:17). 시편 6편만 보더라도 6절에 ‘밤마다’ 눈물로 기도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시편 5편과 6편은 3편과 4편과 같이 아침의 기도와 밤의 기도로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그러면 언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까? 성경은 언제라고 못박지 않고 ‘무시로’(엡 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새벽에 기도하겠다고 결심하는 다윗, 습관적으로 새벽에 기도하셨던 주님을 볼 때, 그리고 우리의 일반적인 생활의 경험으로 볼 때, 아침이 기도하기에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추천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아침에 한 시간은 저녁에 두 시간과 가치가 같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침이냐, 혹은 정오냐(시 55:17), 밤이냐를 떠나서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할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황망하고 원통한 상황에서 단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기도의 삶을 회복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C. 기도가 끝난 후가 중요하다(3b).
다윗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심한 것은 단지 기도를 하겠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라리이다’는 그가 기도한 후에 해야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기도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우리 자신이 잊어버릴 정도라면 그것은 기도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한 내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야만 합니다. 이것이 기도한 후에 해야 하는 일이고 다윗이 말한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것을 활쏘는 자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활을 쏘는 사수가 화살을 활에 먹이고 쏘는 것이 '내가 주께 기도하고'이며, 활을 쏜 후에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쳐다보는 것이 '바라리이다'라는 표현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3절에 ‘기도하고’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를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기도하고’라고 번역된 동사는 ‘기도한다’는 말은 아니고, (제물을) ‘진열한다, 정렬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아침에 번제물을 놋제단 위에 올려 놓는 것처럼, 혹은 성소 안에서 진설병상에 진설병을 진열하여 놓을 때 쓰는 말입니다. 다윗이 지금 기도를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기도를 제사장이 놋제단에 제물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사 그 제물을 태우시고 자기의 제물을 열납하시는 것을 보고 싶다는 자신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한 후가 중요합니다. 기도한 후에, 여러분은 자신이 구한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가시는지를 기대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한 사람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수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 사람은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께 기도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이 태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온전하신 지혜로 내 기도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고 가장 선하게 응답하여 주실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지를 기대하고 바라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루어주시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루어주시는가를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2. 나의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4~6)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바라보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와 확신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두 번째 소절 4~6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A.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2)
다윗은 1절과 3절에서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불렀고 2절에서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이 불러도 신뢰를 가지고 부를 수 있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도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구체적으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야 합니까? 다윗은 “그분이 나의 왕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원통하고 기가 막힌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왕이고 자기의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자기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을 분명하게 아시고 바로잡아주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기도에 힘과 확신을 더한다.
다윗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4~6절에서 기도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4~6).” 다윗이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다윗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확신의 근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도에 힘과 확신을 더해 줍니다. 어떻게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사정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분이라면, 그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하나님께 나아가 원통한 사정을 바로잡아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윗이 기도하고 그 결과를 기대함으로 바라보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정의를 세우실 것을 그는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그 분의 앞에 설 수 없고,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쟁이를 멸하시는 분이시고 피 흘리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를 원통하게 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인 것입니다. 다윗은 정의를 사랑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자기의 왕이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의하고 오만하고 남을 속여 피 흘리기를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 탄핵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 주의 풍성한 인자를 인하여(7~8)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만큼 의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라고 말합니다(7). 이것이 세 번째 소절인 7~8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은 자신도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는 풍성한 인자하심이기에 그는 그것을 의지하여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 집에 들어가’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장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에 자기도 거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한 그분은 무한하고 풍성한 자비와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분임을 다윗은 압니다. 그는 경박하거나 경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8절에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의, 자기 의가 전혀 설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4.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를(9~10)
네 번째 소절은 9~10절인데, 시편의 저주시가 처음 여기 등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행악자들을 정죄하시기를, 쫓아내시기를 기도합니다(10). 이런 저주시를 이해하는 기준은 단순히 시인이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을 하나님께 고소하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행악자들은 단순히 다윗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들입니다(5).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오직 악하여 목구멍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마치 열린 무덤이 시체 썩은 냄새만을 풍겨내듯이 더러운 것들만을 풍겨내고 그들이 혀로 하는 모든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첨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말합니다.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10).” 이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한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5. 신자의 기쁨, 신자의 행복은 빼앗길 수 없다(11~12).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11).” 의로운 자, 흠이 없는 자, 행위로 자기의 덕을 쌓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께 피하는 자에게 미치는 복을 다윗은 말합니다. 그들은 다 기뻐하고 주의 보호로 인하여 잠시 동안이 아니라 영영히 기뻐 외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여기서 왜 다윗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을까요? 사실상 주님 자신과 주님의 이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모든 성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했고,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시 20:1)”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버린 금욕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영영히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친히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호위하시기 때문입니다(12). 여기서 방패는 한 사람의 몸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 큰 방패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패로 온 몸을 보호하는 것처럼 당신의 은혜로 덮어주실 것을 다윗은 압니다. 여기 은혜라는 말은 선하신 의지, 선하신 뜻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선하신 뜻이 우리를 온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저는 이 시편에 <원통함 속에서 신자가 누리는 행복>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신자는 살아가면서 원통한 일을 겪습니다. 때로는 불신자보다 더 많이 이런 경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방식으로 행하지 않고 되갚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원통한 일이 신자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빼앗길 수 없는 신자만의 보장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때마다 무너진 가슴을 안고 울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능히 헤아려 주시는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결심을 합니다. 원통한 일은 도리어 신자를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친밀히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정말 힘있게 하는 것은 기도의 전과 후에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그저 자기 연민에 빠져서 흐느끼고 자기를 동정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에 흠뻑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공의로우신, 그러나 진노보다도 더 큰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참으로 힘있게 하는 것은 묵상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도, 기도한 후에도 묵상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아뢸지, 어떤 말씀들을 하나님께 진열해 놓을지를 묵상해보십시오. 다윗이 3절에서 ‘기도를 정렬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하십시오. 내가 이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릴까를 생각하는 것이 기도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묵상입니다. 조셉 캐릴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단어를 계속 내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말을 잘 정리해서 제시해야 한다.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을 구분하고 잘 정돈해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기 전 묵상이 없어서 기도의 향기와 효과를 상실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읽고 조용히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고 약속을 되새기는 것도 기도하기 전 묵상의 한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또 기도 후의 묵상도 중요합니다. 기도 후에 우리가 확신과 소망을 잃어버리는 한 가지 이유는 기도가 묵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후에도 묵상이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기도 후의 묵상입니다. 묵상에서 기도로, 그리고 기도에서 다시 묵상으로 가는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은 기도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과 같다고 스펄전은 비유했습니다. 조지 스윈녹은 “묵상은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권총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 묵상은 기도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기도는 묵상에 대한 가장 좋은 결론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마른 풀이 타는 것처럼 확 타오르고 꺼져버리는 것이라면 얼마나 힘이 없는 것입니까? 하지만 장작불이 오래 타는 것처럼 그런 기도가 된다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가 무슨 원통한 일을 당한들 불행하다 하겠습니까? 그는 주께 피하는 자요,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며, 주를 즐거워하여 영원히 기뻐 외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로 완전하게 보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결심하십시오. 그분께 나아가야 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묵상에서 기도로, 다시 기도에서 묵상으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결심하십시오. 다윗처럼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