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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23B). 선하신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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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23B). 선하신 목자

시편 23: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12-27

말씀내용
1. 신앙은 관계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 22편에 예언한대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자들에게 가능해진 고백입니다. 23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제로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신자들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양이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석은 짐승인지 지난 주에 살펴보았고 동시에 양에게 선한 목자가 있다는 것은 모든 조건의 충족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양에게는 선한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충분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을 잘 가르쳐줍니다. 신앙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신자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가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르며 자족하면서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정녕 우리 목자시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그분의 성품과 능력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지당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을 만큼 신자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됩니다. 신앙은 이런 정도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2.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성도(4)
지난 주에 이어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임종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많이 읽혀지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동안 성도는 고난을 겪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나 해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해가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그런 골짜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필립 켈러는 목자가 높은 고원지대에서 여름 초장을 얻기 위해 양떼를 고산지대로 인도할 때, 주로 골짜기들을 통과한다고 말합니다. 대개 목자들은 여름에는 양떼를 고산 지대의 초장으로 데리고 가서 지내다가 가을이 오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집이 있는 저지대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때 고지대로 올라가기 위해서 골짜기들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목자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씁니다. “목자는 과거 경험을 통해 이리와 곰, 승냥이와 표범 같은 짐승들이 절벽 바위 틈 은밀한 곳에서 노리다가 갑자기 양떼를 덮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갑자기 내린 폭우로 거센 물살이 골짜기를 따라 덮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또한 바위가 굴러 떨어지거나 산사태 혹은 눈사태가 나거나 이 외에 양들을 죽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자연 재난들에 대해서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골짜기가 양떼를 고지대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도 안다.” 물론 우리의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은 이 모든 위험에서 자기 양떼를 보호하실 전능한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양떼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이것이 최선의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A. 겸손의 골짜기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두 개의 골짜기를 묘사합니다. 겸손의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겸손의 골짜기를 통해서 그는 선하신 목자께서 양떼들을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한 가지 목적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아나와 일행들이 겸손의 골짜기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한 목동을 만납니다. 그 목동은 매우 남루한 옷을 입은, 아주 순박하고 복스러운 소년이었는데, 그가 부르는 노래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떨어질 염려를 하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는 교만함이 없네.
겸손한 자는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리.

나 가진 것 많든 적든 이제 나 만족하겠네.
주여, 제가 더욱 만족하옵는 것은 당신이 저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 가득 지고 순례길을 가는 자여,
이 세상에선 보잘것없더라도 이후에 세세토록 복 받으리.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게 하심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는 선하신 의도 때문입니다(신 8:2). 여기서 우리 믿음은 연단을 받습니다.
B. 친밀함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겸손의 골짜기이면서 또한 친밀함의 골짜기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보통 영어 성경만 봐도 앞의 내용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를 3인칭으로 표현하다가 4절부터는 2인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주’라고 되어있지만 영어로는 ‘you’이고 원문도 그렇습니다. 2절과 3절에서 ‘그가’라는 3인칭으로 표현되다가 4절과 5절에서는 2인칭인 ‘주’로 표현됩니다. 1~3절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선하신 목자되신 주님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이제 4절부터는 친밀함을 가지고 직접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여름에 고지대의 초원으로 가기 위해 골짜기를 지나는 길은 길고 고달픈 여정이기는 하나 양들과 목자와의 친밀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지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는 양떼가 전적으로 목자와 함께 지내는 시기입니다. 양들은 목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밤낮 목자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4절에서 2인칭으로 주님을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친밀함을 느끼는 다윗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4절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자신을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신 양이라고 인식하는 신자에게 이 고백은 얼마나 힘 있고 가슴 절절한 고백이겠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사실 친밀함의 골짜기입니다.
3.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안위(4b)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고대 근동의 목자들은 보통 지팡이와 막대기 두 개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인도하는 장비이고 막대기는 양들을 공격하는 맹수들과 싸우는 무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기능이 각각 양을 인도하는 것과 짐승을 공격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양들을 돌보는 것에는 징계도 포함됩니다. 무리를 이탈하거나 독초를 먹으려고 하거나 위험한 데로 가려고 할 때, 목자는 지팡이로 그 양을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목자는 그 지팡이로 털을 헤치고 몸에 병이 있는지를 검사하기도 합니다. 양들은 풀을 먹기에 바빠서 옆이나 위를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가다가 종종 가사덤불 속에 털이 꼬이면서 잡히는 일들이 생기는데 이 때도 목자는 지팡이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양을 꺼내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을 돌보는데 매우 다양한 용도로 쓰입니다. 막대기는 그 끝이 아주 거칠고 딱딱해서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때 유용합니다. 또 막대기로 목자는 양을 살피고 수를 셉니다.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레 27:32)”고 했는데, 양들이 목자의 막대기 아래로 지난다는 것은 목자의 다스림과 돌봄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양들에게는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위로의 도구이며 현실적 보호장비이기도 합니다. 신자에게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신뢰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을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인하여 위로를 충만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모든 신자들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본향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다윗은 인생에서 수많은 원수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조롱했고 비웃었습니다. 이제 선하신 목자께서는 결국에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실 것입니다. 승리한 왕이 자기를 대적했던 원수들을 사로잡아 땅바닥에 엎드린 그들 앞에서 승리의 진수성찬을 받는 것과 같은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시고 (포도주)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세 가지, 진수성찬과 기름과 포도주는 시편 104:15에도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선하신 목자는 신자들의 인생을 이 세 가지로 축복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우리의 물질 생활에서 아무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감각으로 성경의 본문을 대할 때, 이 본문의 의미에 바르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가능한 많은 결핍을 양산해내고(수요 창출), 그것을 채워주고 만족시키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기자의 고백을 이해하는 것은 오해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번영신학이 그 대표적인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에게 최소한의 필요품을 제공합니다. 음식, 마실 물, 평안, 길을 잃었을 때의 구조, 악과 사망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주의 은혜 속에 둘러 쌓여 있음에 대한 감각,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머물 장소 등입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물질적 소유물 목록에 있는 것들을 채워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양은 목자가 도와줄 때만 기본적인 결핍에 대해 최소한의 필수품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장 적절하게 베풀어주시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때가 있지만, 다윗은 결국 선하신 목자인 주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대접해 주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표현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고백입니까? 인색하게 조금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풍성하고 후히 주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성품이 분명하게 표현된 고백이 아닙니까? 다윗은 이런 주님을 자기의 목자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님을 아십니까? 이런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정녕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잔이 넘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의 잔이 넘치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 주변의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해야지”하는 결심과 의지의 문제이기에 앞서, 내가 그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내가 그런 은혜를 주시는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내가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5.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추적하는 인생(6a)
존 파이퍼는 6절을 설명하면서, 마치 경찰차가 빨강 파랑색의 쌍불을 켜고 추적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신자의 평생을 추격한다고 했는데, 아주 적절하고 가슴에 와닿는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누가 경찰차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 모든 신자들의 인생을 추격하는데 누가 과연 이 하나님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인생은 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붙잡힌 바 될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선하신 목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따른다’는 동사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잡기 위해서 ‘추격한다, 뒤쫓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얼마나 경험하고 사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반드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잡아내실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6.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b).”
언젠가 우리 인생 여정이 끝날 것입니다. 그날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났지만, 이것은 여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푸른 풀밭이나 쉴만한 물가에서 영원히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아버지 집에 이르게 될 것이고 거기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집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에게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시편 92편의 고백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3~14).” 이것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환난 때 주께서 믿는 자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보호하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6~17).”
7. 목자이신 그리스도만 쳐다보십시오.
양은 제 몸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동물입니다. 어떤 가축보다도 사람의 세심한 보살핌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물입니다. 필립 켈러는 자신의 목자 경험으로부터 이런 말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들이 들에서 나를 보는 것만큼 그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이요, 목자요, 보호자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평안을 양들에게 주었다. 이것은 낮이나 밤이나 매한가지였다.” 양들 사이에는 쉼없이 경쟁하고 적대하는 알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서로 불화하고 싸우다가도 목자가 나타나면 이내 어리석은 경쟁과 싸움을 그치고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필립 켈러는 말합니다. 우리가 목자를 바라보는 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싸울 일도, 경쟁할 일도, 불편한 감정으로 뒤틀어지는 일들도 별로 없을 것이고 더 이상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됩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께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선하신 목자는 양을 몰고 가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를 강요함으로, 억지로, 겁을 줌으로써 행동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목자를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행복하게 목자를 따라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이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기를 때, 또는 목양에서 이런 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를 가진 양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렇게 주님께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의 양이어서 그리고 주님께서 저의 목자가 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앞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이 복된 사실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