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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4). 하나님의 성소가 무너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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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4). 하나님의 성소가 무너질 때

시편 74:1-23, 열왕기하 25:13-17, 에스더 3: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1-20

말씀내용
1. 시편의 성격과 구조
아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을 꼽으라면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짓밟히고 성전이 훼파되고 불타버린 사건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소위 국치(國恥)가 있듯이, 이스라엘 역사의 국치는 바로 이 사건인 것입니다. 시편 74편은 이 국치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기도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이 황폐해졌으며 이방 침략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성소 곧 성전이 무너지고 노략질을 당하고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을 블레셋에 의해 성막이 있던 실로가 훼파되었던 때에 연결시킵니다. 그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사무엘상 3:1b).”고 말씀하는 것도, 본문 9절에서 표적도, 선지자도 없었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에 연결짓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74편은 이런 성격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금식과 기도의 날에 읽혀지고 불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시편이 주전 6세기 경에 쓰여졌다면 이 시의 저자는 다윗 시대의 아삽이라기 보다는 아삽의 후손 쯤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앞의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믿음의 싸움을 지켜 보았다면, 여기서는 파괴된 하나님의 성소로 인해 국가적, 공동체적인 믿음의 싸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의 한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이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공격을 받아 무너져버린 것 같은 절망적 현실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바로 요즘 한국 교회가 직면한 상황이 예루살렘 멸망의 충격과 같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비슷한 면들도 없지 않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잠깐 보겠습니다. 74편은 23절인데,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은 전체 시를 아우르는 개관이고,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 단락은 각각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의 시점으로 나뉩니다. 4-11절은 현재 시인이 국가적으로 겪고 있는 파멸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12-17절은 지금 겪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과거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말합니다. 끝으로 18-23절은 소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지치지 않고 간구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편에는 질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이 시의 전반부인 1-11절의 시작과 끝이 질문들입니다(1,10-11).


2. 재난의 때에 신실한 성도는 기도한다(1-3; 왕상 6:12-13)
먼저 1-3절을 살펴볼텐데 여기에는 절망적 재난을 당한 시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왜 라는 질문(why question)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1).”
‘어찌하여’는 ‘왜’를 묻는 말입니다. 시인이 왜라고 묻고 있지만 그 이유를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라고 물을 때, 이 사건은 자신들의 범죄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인이 묻는 ‘왜’는 이 사건이 발생한 이유를 묻는 것이라기 보다는, 왜 이 상황이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가 묻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찌하여…영원히 버리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영원히’라는 말은 이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오래 지속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이미 오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습니다.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은 현재완료의 뉘앙스를 가지는 완료시제인데,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벌어졌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의 동사의 시제는 동작의 뉘앙스를 가지는 미완료시제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이 상황이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임을 압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3).”라고 간청합니다.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라는 표현은 ‘발을 질질 끌지 마시고 빨리 빨리 서둘러 오세요’라는 뉘앙스를 전하는 드문 표현입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성소가 파멸되었다는 것을 ‘영구히 파멸된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원수들은 ‘성소’에서 모든 악을 자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목해야만 하는 게 있습니다. 아까 언급하였듯이,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절망적 상황은 이미 오래되어서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시인의 이 기도는 사실, 절망의 그림자가 너무나 깊이 드리워져서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인이 이 깊고 오랜 재난 속에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기도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1절에서는 자신들을 가리켜 ‘주께서 기르시는 양’이라고 했고, 2절에서는 ‘주의 기업의 지파’와 ‘주의 회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언약을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라는 말은 출애굽을 회상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댓가를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되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기에, ‘주의 기업의 지파’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을 생각하시라고 말합니다. 시온산은 성전에 세워진 성전산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계시겠다고 지정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6:12–13).”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할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재난의 때에 성도가 누리는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3. 현재—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4-11; 왕상 6:21-22; 왕하 25:13-17; 계 12; 에 3:6; 시 86:17)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4-11절은 현재 시인이 겪고 있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4절에서 ‘주의 대적이…떠들며’라는 말은 본래 사자나 야수가 먹이를 잡고 포효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어디서 그렇게 합니까? ‘주의 회중 가운데서’ 그렇게 합니다. 즉 주의 회중을 먹이로 잡고 포효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정복자가 정복한 땅에 세워놓은 군기를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5-6절은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던 참혹한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5-6).” 바벨론 군대는 성전 안에 들어와 마치 도끼로 삼림을 베는 자들처럼 무도하게 행동하며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었습니다. 6절에 ‘이제’라는 말은 진행형 또는 지속되는 동작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비록 그 사건은 그때 끝났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소,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정말 정교하고 화려했다는 것을 이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정금으로 외소 안에 입히고 내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지르고 내소를 금으로 입히고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열왕기상 6:21–22).” 그런데 이 성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열왕기하 25:13–17).” 본문 5-6절은 이것을 묘사하면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은 불타서 무너짐으로써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은 더렵혀졌다고 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당한 것입니다.
원수들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8).” 그들은 주의 백성을 진멸할 것을 의도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들)’을 불사르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회당(들)’은 신구약 중간기에 세워지게 된 회당을 의미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거룩한 계절(절기) 혹은 회중, 집회’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의 흔적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원수들은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의 변함 없는 의도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큰 붉은 용이 해를 옷 입은 여자인 교회와 그 남은 자손인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을 본 바 있습니다(계 12). 용으로 등장하는 마귀는 여자를 진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신과 제도와 체제를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진멸하려는 것이 마귀의 변함없는 의도이고 목적입니다.
우리는 대표적으로 아각 사람 하만의 궤계를 기억합니다. 유대인 모르드개를 미워했던 하만은 유대인 모두를 진멸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스더 3:6).”
이런 일은 교회 역사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1-3세기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무자비한 신앙 박해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요 태양왕으로 불린 루이 14세는, 휴그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수많은 휴그노들을 학살하고 추방했습니다. 당시 루이 14세가 용기병이라 불리는 기병군인들을 통해서 휴그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잔인하게 학살한 일은 교회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만행이었습니다. 성경을 소지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기에, 휴그노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송하는 일에 헌신했던 아름다운 일화들도 전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세상의 일부 지역들—북한이나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시인을 힘들게 한 것은, 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9).” 표적도, 선지자도 없다는 것이지요. 표적은 시편 86:17에서 말한 ‘은총의 표적’을 말할 것입니다. 또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있지 않았는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지금처럼 있는 곳에서 미디어를 통해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집집마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휴대폰에서도 원하기만 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면 설교를 보거나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또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10–11).” 주의 전능한 오른손으로 원수들을 멸하시기를 간구합니다.


4. 과거—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 (12-17; 렘 33:19-26)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시인은 먼 과거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성도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과거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12).” “예로부터 나의 왕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왕이십니다. 국가가 무너졌고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을 드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구원을 베푸셨나이다’는 말에서 구원이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 하나님께서 자신과 국가의 역사에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들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경험한 은혜의 경험들은 이럴 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기억할 구원들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억하고 떠울릴 구원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시인은 과거의 구원들을 생각하는데,특별히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와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길지만 예레미야 33:19-26을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 그에게 그의 자리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자기가 택하신 그들 중에 두 가계를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하지 아니하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예레미야 33:19–26).”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대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도 틀림없이 이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시인은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3-17절입니다. 특별히 13-14절에는 용과 리워야단이 나옵니다. 용과 리워야단은 이방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입니다. 트렘퍼 롱맨 3세는 이 본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은 동일하게 창조를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 신화를 피하지만, 시편 기자는 상상할 수 있는 혼돈 가운데 가장 강력한 악의 세력조차도 누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선언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한다. 이와 같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혼돈의 괴물을 무찌르는 것과 창조에 대한 진술을 결합한다.” 용이나 리워야단 같은 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무너뜨릴 수 없듯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시인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5. 미래—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18-23; 히 11:1)
과거는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시인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에 힘입서 기도할 힘을 얻습니다. 장래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듯이(히 11:1), 시인은 장래의 은혜를 바라면서 믿음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8-23절의 기도에 사용된 동사들, 18절에 ‘기억하소서’, 19절에 ‘잊지 마소서’, 20절에 ‘눈여겨 보소서’, 22절에 ‘기억하소서’, 23절에 ‘잊지 마소서’등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기억하심에서 시작합니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또한 원수들이 주를 비방한 것과 주의 이름을 능욕한 사실을 기억하시라고 말합니다(18). 마치 들짐승 앞에 가여운 멧비둘기 같고, 가난한 자에 불과한 자신들을 영원히 잊지 말아주시길 기도합니다(19). 그러나 여기서 시인이 자신들을 가리켜 ‘주의 멧비둘기’와 ‘주의 가난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드디어 시인은 20절에서 ‘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의 기도를 이끌고 가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학대 받은 자를 부끄럽게 돌아가게 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할 것입니다(21). 시인은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원수를 갚으시고 복수해주시기를(22), 지금도 주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소리를 잊지 마시기를(23) 간구합니다.


6. 교훈과 적용
제임스 메이어는 시편 주석에서 프랑스의 휴그노들과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이 가공할 핍박 속에서 이 시편을 부르며 노래했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깊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원수들의 압제 아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너져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때 시편 74편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교회가 무너짐을 경험하게 된다면, 또 상황이 지속됨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스 터너는 말합니다. “시편 74편은 하나님의 부재 문제에 대해 해결점 없이 끝난다. 이 사실은 교훈도 준다. 하나님이 없다고 느낄 때에도 대화를 계속 하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재난의 때에, 그 재난이 깊어지고 오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사실을 시편 74편은 교훈합니다.
독일 뮌헨 하웁트쉬나고게(중앙회당)의 기념석에는 한 성경구절이 새겨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 74:18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18).” 왜냐하면, 이 회당은 1938년 11월 10일 크리스탈나흐트라고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의 밤에 파괴되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으시고 끝날에 심판하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교회가 세상 앞에 벌거벗겨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변명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범죄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시인이 9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당은 많지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교회 강단은 적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았기에 멸망 당할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1–44).”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통해, 주님의 이 마음을 품고 이땅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이 시편 74편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사, 주를 대적하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일어나 행동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