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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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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에스라 1:1-11, 예레미야 25: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1-20

말씀내용
우리 마음을 흥분되게 하는 이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면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전 538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바사’ 혹은 ‘바사 제국’이라는 말은 역사상 페르시아 제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세계사에서 키루스 2세로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왕이고 이란 사람들에게는 건국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때가 바로 본문 1절이 말하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이고 주전 538년입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왕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1절의 주어는 고레스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어떤 일을 행하십니다.
1.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렘 25:11~12; 29:10~11; 단 9:1~2)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에 예언을 시작했고, 멸망할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유다가 하나님의 성전이 멀쩡히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당연히 유다 백성들뿐 아니라 왕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불편하게 만들었기에,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전반적인 예언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난 뒤의 일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 70년이 지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5:11~12을 보지요.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렘 25:11–12).”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한 번만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29:10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아주 유명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이 1절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9:1~2을 보겠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1–2).”
이때는 에스라 1:1과 같은 해입니다. 이때 매우 연로한 노인이었던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읽게 되고 포로생활이 70년에 마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떨게 했던 것은 이제 70년이 거의 다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될 수 없고, 지난 세월 죄악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바벨론 유수가 70년이라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정도의 계산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첫 번째 포로로 잡혀간 때로부터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첫 번째 귀환까지의 기간입니다. 예루살렘이 주전 586년에 멸망하기 전 제일 먼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은 여호야김 왕이 통치하던 주전 60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대인이 일차로 귀환한 것이 주전 538에서 535년 사이입니다. 이 기간이 70년 정도가 됩니다. 두번째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이 있던 주전 586년부터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이 세워진 주전 516년까지의 70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이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일어나십니다. 이것이 1절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라고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제국과 왕을 움직이시는 주권자 하나님 (사 44:28~45:1; 잠 21:1; 사 40:15~17)
약속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이제 무엇을 행하십니까? 제일 먼저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1절 하반절에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우연이 만들어내는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모든 제국과 통치자들을 당신의 뜻을 따라 다루시고 움직이시고 당신의 목적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기가 70년이 될 것이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 등장하기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44:28~45:1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사 44:28~ 45:1).”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 왕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적어도 150년 전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놀라운 예언입니다. 결국 고레스의 등장과 그의 바벨론 정복과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여, 과거 바벨론 제국이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강제로 끌고온 민족들을 본토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신전을 세우게 하는 유화정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레스 왕이)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른 내용이고, 그 내용이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하나님은 제국과 왕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2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때때로 이런 말씀은, 우리가 어떤 권력자의 밑에서 신음할 때,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한 역사 속에 흥했다가 쇠한 모든 제국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0:15~17을 보지요.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5–17).”
오늘날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시고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의 주권자인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3. 잔잔한 삶에 파문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약속하신 대로, 역사를 움직이시고,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때로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솔한 말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이제 너희의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고레스 왕의 이 칙령이 지난 수십년 동안 바벨론 땅에 와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이것은 1945년 8월 15일 이 한반도에서 35년간 일제 치하에서 살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은 우리 민족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려왔다고 할지라도, 5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주전 605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70여년이 되었으며, 그 다음에(주전 598년) 잡혀온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은 이미 60년을 바벨론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에 형성된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70년에서 50년을 보낸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손주를 보고 살아왔습니다(렘 29:5~6). 유대인들 중에는 다니엘과 같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부를 일군 사업가들처럼 바벨론의 주류 사회에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제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이 하나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소식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잔잔한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성가신, 자기 자신의 인생만 본다면, 없었어도 괜찮았을 왕의 칙령이었을 것입니다.
4. 형편을 따라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3~4)
왕의 칙령이 2~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고레스 왕은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합니다(스 1:3). 그리고 “그 남아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스 1:4).”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이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에스라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이때로부터 약 80년이 지나서 학사 에스라가 다시 유대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스 7). 어떤 유대인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당장 접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연로한 부모님들을 모시고 4개월이나 될 긴 여정에 합류할 수 없었을 가정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집집마다 다양한 사정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이때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일을 성취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1차 예루살렘 귀환자들의 명단에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처럼 칭송되어서도 곤란합니다. 분명히 바벨론을 떠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유대인들도 당연히 합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첫번째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고, 이와 같이 비슷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의 칙령도 모든 유대인은 다 당장 돌아가라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대목은, ‘그 곳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4절 앞에 ‘남아 있는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이들을 유대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곳 사람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왕의 칙령은, 이들은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세워질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함께 하지는 못할지라도,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동참하라는 말이고, 나아가서 세워질 성전에 드릴 예물을 기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예물을 드린다’는 개념은, 소위 낙헌제물(freewill offer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기로 결정한 유대인들에게 말입니다.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억지로 가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각기 다른 형편과 사정 속에서,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이 믿음을 자신의 자리에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5. 마음을 감동하여 모든 자원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5; 출 12:35~36; 3:21~22; 창 15:13~14)
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이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고레스 왕이 모든 피정복민들을 향하여 유화정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마치 논에서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잠 21:1).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미 70년 가까이 바벨론 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5절을 봅시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스 1:5).”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유다와 베냐민의 족장들이 있었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도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귀환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개념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5절에서 말하듯이,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에게는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지도자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까지도 감동을 받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갈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마음에 감동을 준 사람들은 고레스 왕과 이 지도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킨 유대인들이 돌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몸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은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 또는 보물로 귀환하는 형제들의 여정을 축복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6절에서 우리는 ‘그 사면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흥미로운 것을 보게 되는데, 물론 이들은 4절의 고레스 칙령에서 밝힌, ‘그 곳 사람들’일텐데, 6절에서는 약간 다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유대인들의 이웃이었던 이방인들, 바벨론 사람들을 가리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예루살렘 귀환은 제2의 출애굽으로서, 첫번째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출애굽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출애굽기 12:35~36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정말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임노동으로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것에 대한 보수를 받아 애굽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0~21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
사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미 4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일도 말씀하셨었습니다. 창세기 15:13~14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하는 것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4절에 있는 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바로 그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레스 왕은 왕의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하여, 느부갓네살 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다 세어서 유다 백성의 지도자인 세스바살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창고지기는 오늘날의 재무관과 같은 장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다시 짓는 것만이 아니라, 성전 예배가 가능하도록 성전 집기들을 그 세월 동안 철저하게 보존되게 하셨다가 이제 이 유다의 귀환자들에게 정확하게 세어서 내어주게 하신 것입니다.
6.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라.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십니까?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제국과 왕을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하지만, 이런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평범한 삶에 파문을 몰고 오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어떤 형편, 어떤 사정 가운데 있든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믿음, 신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 하나님은 어떤 일을 우리에게만 알아서 하라고 맡기지 않으시고, 필요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 그 모든 자원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여러분은 본문에서 이런 하나님을 보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 수십년을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공포된 고레스 왕의 칙령은 기쁘고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만난 상황은 이것과 동일한 상황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현재의 예배당이 예배와 교제 그리고 온 교회의 신앙 교육을 하기에 비좁아진 현실에서 이 모든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에는 좀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제적 필요 앞에서, 예배당 이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공동의회에서 교인투표를 통하여 물었었고, 예배당 이전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성가신 일이 아닌가요? 우리는 새로이 이 일을 위해서 헌금을 해야 하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정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다 백성과는 그 의미가 다른 상황이지만, 동일한 것은, 우리도 이 일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일의 주인이고 리더이시며 마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알아서 감당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정한 감동을 주셨기에, 여러분은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셨고, 오늘 우리는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다 다르고, 우리의 어떤 행위로 우리의 믿음과 모든 것이 평가 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기만을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제국과 왕의 마음으로 움직이시는 주권자 하나님, 원하시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감동하게 하셔서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자원만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헌금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작정하여 드리는 헌금이 되기를 바라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된 여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 주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