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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8). 칸타테 도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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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8). 칸타테 도미노

시편 98:1-9, 역대하 29:25-30, 로마서 8:19-2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10-04

말씀내용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편 96-98편은 하나님의 왕권, 다스림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넓게는 92-100편까지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제왕 시편’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하신다는 것은 모든 잘못된 것들이 다 바로잡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세계 경영의 지혜 속에서 악을 허용하시고 잘못되고 굽어진 일들을 허용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주신 큰 승리를 기념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텐데, 이 시편은 이후에 계속 불려지면서 탈역사화되었고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98편의 라틴어역은 ‘칸타테 도미노(Cantate Domino!)’라고 시작합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입니다. 성공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re), 현재 정식명칭은 ‘성공회기도서’]에는 ‘칸타테 도미노’라는 제목으로 이 시편이 분류되어 불리워집니다. [공동기도서]를 만든 목사들은 98편을 예전과 성도들의 일상에서 드리는 기도로 정해 놓았을까요? 우리가 교회의 예배와 성도의 일상을 지배하는 정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바로 98편이 보여주는 바로 이 정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기쁘기만 한 게 아닙니다. 죄, 패배, 절망, 외로움 등을 다룬 시편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슬픔과 애도, 낙심과 절망, 분노와 다툼 등 많은 상황적 정서들이 성도들의 삶에 실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서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바로 98편이 보여주는 정서인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때로는 외로움과 절망과 슬픔과 분노를 느낄 때 그 자체가 틀렸고 정죄받을 만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쁨을 향한 싸움을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히 신자의 선한 싸움입니다.
98편은 세 절 씩 끊어서 단락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1-3절은 구원자 하나님, 4-6절은 왕이신 하나님, 7-9절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묘사한다고 적절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확장되는 점에서 보면, 1-3절은 이스라엘의 찬양을, 4-6절은 온 땅 모든 민족의 찬양을, 7-9절은 피조물인 자연 세계의 찬양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윌리엄 벤게메렌은 1-3절을 과거에 베푸신 구원 역사에 대한 경배로, 4-6절은 위대한 왕에 대한 현재적 경배로, 7-9절은 미래에 도래하실 하나님에 대한 즐거운 기대를 표현한다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을 참고하면, 98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이스라엘아! 찬양하라! (1-3; 33:3; 40:3; 96:1; 144:9; 149:1; 롬 8:30; 고전 15:54; 히 2:15; 고후 5:8; 겔 5:8; 20:41; 사 52:10; 46:13; 51:5-6,8; 레 26:42)
첫번째 연인 1-3절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시편에는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33:3; 40:3; 96:1; 144:9; 149:1). 이 말은 늘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서 예배하라는 말이거나 늘 새로운 주제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만한 새로운 이유를 가지라는 말이고, 습관적이거나 상투적이 아닌 항상 새롭고 생동감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라는 말을 기억하시지요? 우리는 물론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익숙해진 과거의 은혜가 아니라 그 은혜를 묵상할 때 새롭게 은혜로 여겨질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승리’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정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전투를 하던 사람들과 우리는 다른 삶의 정황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구원-승리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승리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에 의하면, 그 승리-구원은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죄의 형벌과 죄의 권세,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로마서 8:30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30).”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기이한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둘째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은 삼킨 바 되었고(고전 15:54) 신자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히 2:15). 죽는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5:8). 셋째로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탄과 그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2-3절은 구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기이한 일)를 찬양하는데서 나아가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알게 하시고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목적 또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고 알리시려는 목적으로 일하십니다.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행하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방인의 목전에서’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겔 5:8; 20:41). 이사야 선지자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이사야 52:10).” 그리하여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하나님의 이 의도를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2절에서 구원과 공의는 이사야에서처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됩니다(사 46:13; 51:5-6,8). 한 구절만 살펴보지요.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이사야 46:13).”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질서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구원과 공의를 온 세상에 드러내시려고 하십니다.
두번째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다는 것은 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동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하나님은 행동하십니다.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레위기 26:42).”하나님이 기억하신 것은 인자와 성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을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보았다고 시인은 말합니다(3).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인자와 성실을 증명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세상에게 주십니다.


2. 땅의 모든 거민이여! 찬송하라! (4-6; 대하 29:25-30; 스 3:13; 민 10;2; 출 19:16)
둘째 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찬양)에서 온 세상의 예배로 확장됩니다. 시인은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라고 말합니다(4). 제임스 보이스는 둘째 연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을 에배하는 것이 즐겁고 무엇보다 시끄러워야 한다는 시인의 소망이라고 지적합니다. 마빈 테이트(Marvin E. Tate)는 “성전 에배의 소음은 전설적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역대하 29:25-30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어보십시오. “왕이 레위 사람들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역대하 29:25–30).” 그리고 에스라 3:13입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에스라 3:13).”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야구장 곁에 살지 않아도, 어느 날 저녁 야구장 인근을 지나는데 갑자기 “와~”하는 함성이 야구장으로부터 밖으로 들려옵니다. 본문은 예배가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만 왕 위에 뛰어나신 왕, 만 주 위에 위대한 주님을 예배할 때 예배자들이 그렇게 열광하고 열정을 다하여 소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밋밋하고 무감각, 무감동한 예배자는 도리어 하나님을 모욕할 수 있는 것입니다.
4-6절에 나오는 동사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소리칠지어다, 소리내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즐겁게 소리칠지어다’들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큰 축제 때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함성을 지르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수단들도 언급되는데, 목소리 외에 수금, 나팔(금속-은-나팔, 민 10;2), 호각(horn, 양각나팔, 출 19:16)으로 왕이신 하나님께 즐겁게 소리치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해야 합니까? ‘온 땅(4)’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3. 모든 피조물들아! 찬송하라! (7-9; 롬 8:19-22)
하나님은 과거의 승리를 주신 분이실 뿐 아니라(1-3), 현재의 왕이기도 하시며(4-6), 미래의 심판자이십니다(7-9). 그러므로 이제 세번째 연에서 시인은 세상 모든 피조물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7-8절은 자연의 권세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은 비록 구속을 기다리고 신음하고 있지만, 주님이 오실 때 모든 것이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 허무하게 복종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롬 8:19-22). 시인은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을 향해 먼저 말합니다. 이것은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파도 소리나 그에 상응하는 거칠고 사나운 소리를 의미합니다. ‘외칠지어다’라는 단어는 천둥과 같은 자연의 소리로 ‘으르렁거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둘째로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에게 외치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람을 가리킨다기 보다 모든 동식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큰 물’이 박수하라고 하는데 큰 물은 큰 강들을 말합니다. 홍수에 급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물들이 내는 소리를 열광적인 박수 소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강력하고 절대적인 통치는 거대하고 웅장한 산들도 노래하게 할 것입니다.
언제 그런 피조 세계 안에 대변혁이 일어나겠습니까? 9절입니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그날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으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히 의롭고 공정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결정이 부당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계 5:13-14; 7:9-10)
시편 98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볼 때, 우리는 데렉 키드너가 말한 두 가지 핵심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장래에 있을 하나님의 능력의 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날을 생생하게 기대할 때, 우리는 즐겁게 소리치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에 마음이 눌려 슬픔과 절망, 분노와 고립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셨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날, 그 능력의 날을 기대하고 그날에 초점을 맞추셔야 합니다. 그날은 기쁨의 날이고 즐거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슬픔과 분노, 절망과 낙심으로 무너뜨렸던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고 의로움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슬픔과 낙심으로 이끌었던 모든 일들이, 비록 마귀의 악랄한 개입이었고 우리의 죄성이 나타난 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그 모든 일을 완벽하게 선한 일로 바꾸어 내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자꾸 생각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새 노래를 하나님께 불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에서의 기대감입니다. 예배할 때 우리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마땅히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날에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백성들이 그리고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함께 드릴 예배의 리허설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요한계시록 5:13–14; 참조 7:9-10).”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마지막 날 세상에 나타나시기 위한 전주곡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 점을 생각하고,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우리는 매주일마다 모일 것이고, 수요일에도 모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 때문에 그리고 장래에 행하실 영광스러운 일을 바라보며 감격과 감동 가운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이 부르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고 온 세상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닫고 겸허히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