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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09 - 최상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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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09 - 최상의 헌신

역대상 29:10-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2-27

말씀내용
<최상의 헌신> 역대상 29:10~19


1.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은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끔 저는 저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마지막 일주일, 마지막 30분까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던 시간들, 인생이라는 시간을 잘 마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날 멋진 마무리를 하고 싶은 저의 기대는 오늘을 잘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끝을 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과정은 화려했고 멋졌는데, 마지막이 더럽혀진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과정은 좀 그랬더라도 마지막이 멋지고 아름다운 경우도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오늘 그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강간범이고 살인교사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이 성경의 기록은 이런 오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사실 그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저는 이번 달 1일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도 이렇게 살다가 주님께 가고 싶습니다. 저의 인생이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되게 해주십시오.” 지금 제가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이 다 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2. 당신의 갈망이 당신의 인생의 마무리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다윗의 열심(1~5,9,18~19)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할 때, 이 본문에서 보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다윗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한 가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는 아들 솔로몬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모든 준비를 할 수 있는 한 갖추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지을 수 없다면 그 지을 준비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전을 건축한다는 물질적 차원에서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물질적 차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가 시편에 남긴 그 많은 시들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의 표현들입니다. 옛날 우리 조국에서 있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집사님이 선교사님들이 운영하는 예수병원에 찾아가서 자기 눈 하나를 빼서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답니다. 왜 눈을 팔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예배당 건축하는데 드릴 돈이 없어 그 돈을 조금이라도 마련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대답했답니다. 선교사님이 너무나 귀해서 그 집사님의 눈 대신 건축헌금을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만큼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한국교회에 전해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헌금을 하자가 아닙니다. 그 집사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했느냐, 얼마나 헌금을 바쳤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느냐, 그의 갈망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우리가 어떤 갈망을 가지고 사느냐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결정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영원한 가치, 하나님에 속한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상의 것에 대한 최상의 섬김과 헌신이 다윗이 보여준 삶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게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갈망에 대한 질문에 여러분의 대답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이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여러분의 꺼지지 않는 갈망이 과연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
다윗의 삶은 하나님 없이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긴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삶, 최상의 헌신의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최상의 헌신이 있습니다.

A.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는 삶: 예배(10~12)
첫째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는 삶이 최상의 삶이며, 최상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는 삶을 한 마디로 예배라고 말합니다. 예배의 영어단어 worship은 ‘합당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worth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셔도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삶은 하나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고 산 인생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범죄하였던 그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범죄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으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입니까? 돈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면, 명예와 자존심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면, 성공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시간을 남김없이 드릴 것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왕이 될 것이라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과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범죄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으로 만족해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11~12). 이것은 어떤 찬송가 가사를 그냥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의 말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영토의 광대함이나 자기의 왕위의 권능이나 자기가 얻은 영광과 전쟁의 승리들, 그리고 왕의 위엄 이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고백합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부와 귀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고 사람을 크게 하고 높이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기 인생에 얻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는 삶이고 예배였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 한 해 동안에 여러분이 얻은 수익과 손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잘 될 때만이 아니라 잘 안 될 때에도 여전히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씁쓸하고 좋지 않은 어떤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반대로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양 우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찬송가의 고백은 바로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고백하게 되는 값진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는 삶, 예배, 이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최상의 헌신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B.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헌금과 헌신(14)
두 번째 최상의 삶, 최상의 헌신은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드리는 헌금과 헌신이라고 굳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이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최상의 삶, 최상의 헌신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거나 헌신을 하게 될 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자기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여길 때, 그는 자기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수고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에게 감사를 표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자기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해서 헌금이 힘들고, 이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봉양을 해드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은 불신앙의 극치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뒤바꾸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형편이 어디에 있으시든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냥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구원하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이 주를 알지 못하다가 주를 알게 되었을 때, 복음을 머리로만 알다가 가슴으로 알게 되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이었습니까? 내 생명, 내 재산, 내 건강, 내 자식, 내게 속한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는 생소한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이런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구원받은 성도가 이제 다시 한 번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새로운 경지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구원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다윗이 고백했던 바로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유혹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이 있을 때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과정인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은혜라고 하면서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절박하게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보여준 사례를 생각해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환난과 넘치는 기쁨, 극한 가난과 풍성한 연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만들어낸 역사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연보로 풍성하게 흘러넘쳤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비슷한 것을 봅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헌신에 감동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드린 헌금의 액수가 6절과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인용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족장들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과 왕의 행정 장관들이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드렸다. 그들이 드린 예물은 금 170톤과 8.4그램의 금화 10,000개, 은 340톤, 동 610톤, 그리고 철 3,400톤이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들이 귀족들이고 부자들이어서 그렇게 드렸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렸다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드렸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드리는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에 겨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결과, 백성들의 마음도 감동이 되어 그들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것이 9절입니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이것이 바로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그들의 돈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드릴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이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최상의 삶, 최상의 헌신의 두번째 특징입니다.

C. 피조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삶: 겸손(14~16)
세번째는 피조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이 표현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최상의 것을 드리고 나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최상의 것을 드린 사람만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상의 것을 드릴 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값싼 은혜, 싸구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구려라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비싸서 우리의 능력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격이기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게 됩니다. 겸손은 받은 은혜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백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일 역사 속에서 제국을 호령했던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신을 알 수 있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얼마나 겸손한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이런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왕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대왕 다윗은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천지의 주재요, 만왕의 왕이신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겸손한 왕으로 오신 것을 대변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바로 이 다윗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애착하며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을 다 떠나서 주님께 돌아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최상의 삶, 최상의 헌신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위, 여러분이 가진 명예, 여러분이 가진 학식, 여러분이 가진 물질로 여러분 자신을 착각하고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며,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해주는 그 모든 신분과 차이들은 조물주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것은 이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4. 인생을 가장 멋지게 마치는 길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우리 모두 함께 가슴이 뛰는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시고 싶으십니까? 다윗처럼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저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배의 삶,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헌신의 삶,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겸손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내용이요, 특징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17)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통 기쁨과 즐거움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장함이라기 보다는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감격이고 감사입니다. 17절만을 보더라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삶을 이런 기쁨으로 가득히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 ‘나는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인하여 자족함으로 감사와 감격이 넘치고 주신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삶이 되고 싶습니다. 이 삶의 비결을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알게 하시고 경험하고 누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B. 비할 수 없도록 시작보다 끝이 좋은 삶(28)
한 가지 더 우리가 이 말씀에서 얻는 도전은 비할 수 없도록 시작보다 끝이 좋은 삶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봅니다.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의 삶은 시작보다 끝이 좋았습니다. 목동으로 성경에 등장한 다윗이란 인물의 마지막은 온갖 축복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입으로 옮기기조차 더럽고 치졸한 간음과 살인교사를 저질렀고, 전쟁의 피비린내로 가득히 채워졌던 다윗의 인생의 모든 과정은 이런 은혜로운 축복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시작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보다 비할 수 없도록 끝이 좋은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욥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말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듯이 말입니다(욥 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