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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3). 주가 세상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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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3). 주가 세상을 다스린다

시편 93:1-5, 역대상 16:31, 요한계시록 11: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5-31

말씀내용
만일 이 시편을 다윗이 썼다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 썼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 아삽과 그의 형제들인 찬양대로 하여금 이렇게 찬송하게 했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역대상 16:31).” 오늘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지요.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순금을 입힌 가로 115cm, 세로 70cm, 높이 70cm 정도의 박스 였습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보관되어 있었고, 언약궤의 덮개는 속죄소라고 불렸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의 형상이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출 25:10-22). 많은 구약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며’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히스기야 왕도 “그룹들 위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왕하 19:15).”라고 기도했는데, 그룹들 사이 속죄소는 하나님의 보좌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가 왕도(王都)인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을 때, 자신이 왕이었지만, 비로소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 보좌에 좌정하셨다고 생각했고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고 찬송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시편을 다윗이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밑그림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하면 유익합니다.
시인은 1-2절에서 단호한 신앙고백을 표현하고, 3-4절에서는 신앙고백을 흔드는 도전적 현실을 묘사한 뒤에, 5절에서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함으로써 마무리합니다.


1. 단호한 신앙 고백(1-2; 대상 16:31; 왕하 19:15; 출 15:18; 히 1:3; 11:1)
신앙고백은 중요합니다.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교회사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고백을 양보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그저 입으로만 되뇌이는 의미 없는 고백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기에, 참된 신자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생명 같이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시인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1-2절에서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1–2).”
이 고백은 비단 구약의 성도였던 시인의 신앙고백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영감된 이 내용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시대 모든 신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덤덤한 고백이 아니라 거의 환호에 가까운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환호성을 지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고백이자 또한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 고백은 무심코 튀어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고백 되는 내용입니다. 애굽의 오랜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 그리고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건져 내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를 무력화하시고 바벨론의 왕들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신앙 고백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의 사건들을 토대로 하기에 힘이 있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어떤 옷을 입으신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고,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전투를 하기 위하여 완전무장한 왕이나 전사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다는 표현은 위엄과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고, 하나님께서 위엄에 찬 일들을 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도 보여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사건이며 구원의 경험입니다. 모세는 백성이 갈라진 홍해를 걸어서 건넜을 때, 백성들과 함께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출애굽기 15:18).” 정복과 왕권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합당한 관심이 무엇입니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만이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행동입니다.
시인은 1절 하반절에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계는 물리적인 창조 세계만이 아니라, 도덕적 질서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세계가 견고히 섰다는 것은 세상이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에 세상은 여전히 견고히 서있는 것입니다(히 1:3).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계획을 떠나서 세상을 무너뜨리거나 허물 수는 없습니다.
2절에서 시인은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라고 말합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배후에는 세계를 통치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권이나 절대 주권에 대한 상징인 ‘주의 보좌’를 언급했을 때, 그는 어쩌면 언약궤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라는 말과 함께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는 말은 천지 창조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혼돈을 이기시고 세계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이 고백은 과거만을 향하는 게 아닙니다. 데렉 키드너가 지적하듯이, 이 찬탄은 종말론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왕권, 능력, 영광은 항상 하나님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들이 완전히 성취될 위대한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을 기대하는 믿음이 이 고백에는 깔려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듯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그 믿음으로 시인은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히 11:1).


2. 신앙 고백을 흔드는 현실 (3-4; 시 104:26; 사 27:1; 계 13:1)
1-2절은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 고백은 현실의 삶에서 늘 도전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도전의 상황이 3절에서 묘사됩니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
여기에는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대비되는 강력한 물(큰 물)이 등장합니다. 큰 물은 문자적으로는 ‘강들(복수)’인데, 문맥상 바다 혹은 바다의 파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다는 주로 혼란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시편 104:26입니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시편 104:26).” 그리고 이사야 27:1도 보지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사야 27:1).” 리워야단은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다의 이미지를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3:1).”
본문에서 큰 물이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까? 큰 물은 소리를 높였고 소리를 높였으며 그 물결을 높입니다. 소리는 우렛소리와 같은 것을 묘사하는데, 두려움을 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세 동사 중에서 첫 두 동사는 히브리어로는 현재완료형이고 세번째 동사는 미완료시제입니다. 이 모두가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파도와 요동치는 물결로 바다의 위엄과 두려움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쓸어가는 홍수나 쓰나미를 생각해도 됩니다. 이것이 시인의 신앙 고백을 뒤흔드는 삶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존재합니다. 지진이나 홍수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떠나서 스스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는 무섭게 시인을 위협하며 무서운 소리로 압도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고백하는 신앙 고백에 도전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고백을 흔들어버리고 자신들을 두려움으로 압도할 수 있는 도전적인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큰 물은 구약 성도였던 이 시인만이 맞닥뜨린 현실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맞닥뜨리는 현실과 동일한 것입니다.
4절은 3절에서 묘사한 현실의 도전에 대한 대답입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4).” 높이 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더 큽니다!! 우리말성경은 4절의 뉘앙스를 잘 살려낸 번역입니다. “높이 계신 여호와는 강하시니 큰 물이 쏟아지는 소리보다 강력하시고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보다 강력하십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하고 우리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모든 두려움의 세력들보다 더 강하시고 더 능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삶의 도전적 현실 속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신앙 고백을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선언하라 (5; 창 9:11; 엡 1:20-23; 계 11:15)
이 위협적 도전 앞에서 시인은 다시 자신의 신앙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창조를 이루신 왕이신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백성에게 증거를 주십니다. 증거는 율법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언약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와 맺으신 언약은 너무나 확실하여 흔들리거나 파기될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세기 9:11).” 시인은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며’라고 말합니다.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넘치는 분이실 뿐 아니라 말씀하신 모든 일에서 틀림이 없으신 믿을 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시인은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은 항상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라고 다시 선언합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 1:20–23).”
옛 언약에서는 언약궤를 통해서 예표 되었던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이 마지막 승리와 완성을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요한계시록 11:15).”


4. 교훈과 적용 (요 16:33)
이 짧은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우리도 시인과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또한 이 신앙 고백을 뒤흔들고 도전하는 현실을 늘 맞닥뜨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큰 물의 파도 소리와 우리를 압도하는 큰 물결을 마주합니다. 외로움이 엄습하고 우울증과 같은 불청객이 찾아오며 우리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우리의 신앙 고백을 뒤흔드는 도전들로 넘쳐납니다. 그것들은 소리를 높이고 또 소리를 높여 우리를 압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보편적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주가 다스리신다.” 우리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 보다 더 크고 더 능하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뒤흔들어버릴 것만 같은 현실의 도전 앞에 설 때마다 혼란에 빠지는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진리는"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우리 주가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발견합니다. 시인이 혼란스러운 현실, 신앙 고백을 무너뜨리려는 삶의 도전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자신의 신앙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고백이 그저 말로만 그치는, 그저 배워서 되뇌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고백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경험된, 그리고 시인이 살아온 삶에서 검증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나 그 교리와 말씀의 가르침이 그저 여러분의 머리로만 인식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 하나 사건들을 통해 경험되고 입증된 고백입니까? 결국 우리가 배우는 모든 주의 말씀과 교리는 세월과 함께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고 입증됨으로써,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고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부정적 현실들을 능히 이기는 힘있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월 속에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배운 말씀의 지식 따로, 삶이 따로 가는 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하루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경험되게 하심으로써, 신앙의 고백이 더 깊은 체험적 고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큰 물과 바다의 높은 물결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때로는 두렵게도 하지만, 그것이 이 시편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시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는 희망찬 고백으로 시작되었고, 또한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은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라는 희망찬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주권자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큰 기쁨과 환호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고, 날마다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기쁘게 외침으로써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시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온전한 충성을 바치고, 그 나라의 백성 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 고백을 뒤집어 놓는 어떤 현실 속에 들어가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우리 주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