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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6). 경외받으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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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6). 경외받으실 하나님

시편 76:1-12, 열왕기하 19:35, 시편 2:11-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2-17

말씀내용
1. 76편의 배경과 흐름과 의미 (왕하 18:13; 19:7,35; 시 47:2-4; 계 19:11-21)
시편 76편은 승리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정황에서 지어졌고 불려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역사 속에서 이 시편이 불려졌던 인상적인 사건들은 알 수 있습니다. 1588년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을 때, 이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느꼈던 영국 사람들은 이 시편을 생각했고 노래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0년 전, 청교도들이 신대륙의 뉴잉글랜드에 정착했을 때에도 그들은 이 시편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분명히 이런 승리의 분위기를 멋지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시편이 관여하고 있는 어떤 상황을 특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윌리엄 벤게메렌 같은 학자는 이 시편을 구약의 특정 사건과 연결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과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내고 싶어합니다. 구약의 여러 승리의 사건들 가운데서도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보는 사건은 주전 701년 유다 왕 히스기야 제 14년의 일입니다. 20여년 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왕 산헤립은 기세를 몰아 유다로 내려와 견고한 성들을 쳐서 점령하였습니다(왕하 18:13). 이어서 산헤립은 장수 랍사게와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성밖에서 모든 예루살렘 거민들이 들을 수 있는 히브리 말로 온갖 조롱과 모욕을 해서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다음과 같은 좋은 소식을 전해줍니다.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열왕기하 19:7).”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가 신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9:35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열왕기하 19:35).” 드라마틱하고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고 모욕한 것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께서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시편 76편의 배경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시편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시편이 배열 되어있는 맥락에서 76편을 이해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74편에서는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큰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응답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75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하신 때에 일어나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한 기약이 이르면 말입니다(시 75:2). 그런데 76편은 이미 그날이 임했고 그날의 승리를 회상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시인은 75편에서 다가올 승리를 믿음으로 노래했고 76편에서는 성취된 승리를 노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배열의 흐름에서 볼 때, 74편에서 시작된 문제가 76편에서 멋지게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74편의 상황에 머물 때가 있고, 75편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경험할 궁극은 76편의 승리,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47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편 47:2–4).”
이런 방식으로 시편 76편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최후 승리를 바라보게 합니다(계 19:11-21). 어떤 점에서 이 시편은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소망으로 격려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이 했던 일을 구약의 성도들에게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76편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교회를 방어해주시는 지속적인 돌봄이 어떤 의심이나 주저함도 없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영광을 돌리도록 신실한 백성을 독려하기 위하여 기념되는 시편이다.”


2. 무적의 용사로 알려지시는 하나님 (1-3; 창 14:18; 시 10:9; 104:22; 사 37:36)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3절을 보지요.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무적의 용사로 등장하셔서 모든 전쟁을 그치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알리신다는 내용입니다.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계시를 통해서 알려졌다는 말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위대하심을 나타내셨는지 이제 시인은 말하게 될텐데, 그 전에 2절은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시편 76:2).”라고 말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으로 축약형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이 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는 말씀을 보는데, 바로 그 살렘, 곧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창 14:18). 그 어원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과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 시온도 사실 예루살렘을 가리키거나 좁게는 성전이 세워진 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장막과 하나님의 처소가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인데, 여기 사용된 장막과 처소라는 두 단어는 모두 다른 곳에서 짐승이 사는 굴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가령,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시편 10:9).”라고 할 때, 굴이 장막(סֹךְ)과 같은 단어이고,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시편 104:22).”라는 구절에서도 굴이 2절의 처소(מְעֹנָה)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자가 굴에 은신하여 웅크리고 먹이를 향해 달려들 기세로 예루살렘에 계시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굴을 점령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대적들은 그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 산헤립은 장수 랍사게를 시켜 예루살렘의 하나님과 백성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막 공격하려는 사자처럼 웅크리고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데렉 키드너와 리처드 필립스는 76편의 제목을 “유다의 사자”라고 붙였습니다.
3절입니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시편 76:3).” ‘거기에서’라는 말은 이제 그 굴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자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오신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알리시자,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화살은 직역하면, 번개처럼 쏟아지는 화살들, 번쩍이는 화살들, 불타는 화살들이라는 말입니다. 화살이나 방패, 칼이 다 전쟁 무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아마 ‘전쟁’이라는 말도 환유법으로 전쟁의 모든 무기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쏟아내던 불화살들과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방패들과 공격용 칼들, 모든 전쟁의 무기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앞에서는 열왕기하 19:35을 보았는데 이사야서에서 동일한 사건을 동일하게 진술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이사야 37:36).”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나오시자 말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내용을 4-9절에서 설명합니다.


3.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누가 서리요(4-9; 눅 4:35,39; 8:24; 말 3:2; 계 6:17,10)
먼저 4-6절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고, 7-9절은 미래의 성취를 바라보는 의인들의 반응입니다. 4절입니다.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시편 76:4).” 이 구절은 번역이 어렵습니다. 몇 가지 성경 번역의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먼저 새번역성경입니다. “주님의 영광, 그 찬란함, 사냥거리 풍부한 저 산들보다 더 큽니다.” 영역성경 중에서 ESV와 NIV가 이 번역과 비슷한 방식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웅장함과 안정과 영속성을 상징하는 산에 비유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산들보다 위대하고 웅장하시고 영원하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성경의 번역도 비슷한 형식입니다. “주께서는 눈부시게 빛나고 사냥감이 있는 산들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영원한 산에서 오시는 분, 빛나고 힘차신 분”이라고 했고, 현대인의성경도 비슷하게 “주님이여 주께서는 영광스러우십니다. 주께서 저 원수들을 쳐부수시고 그 산에서 되돌아오시는 모습이 너무나 장엄하십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학자들의 판단에 맡기더라도, 이 구절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화로우시다’는 말은 여러 번역이 잘 옮겼듯이 직역하면 ‘빛으로 비추신다’ 혹은 ‘눈부시게 빛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탈한 산’은 하나님의 대적들이 산에서 다 사자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같습니다.
5-6절은 원수들의 드라마틱한 패배를 더 선명하게 묘사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시편 76:5–6).”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묘사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군 185,000명을 하룻밤 사이에 죽인 드라마틱한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이 강한 자’와 ‘장사들’은 앗수르 군과 같은 하나님의 대적들입니다. 기고만장하게 행동했던 그들의 왕인 산헤립이나 장수인 랍사게일 수도 있습니다. ‘잠에 빠진다’는 표현은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꾸짖으심이 그 대답입니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든 일, 즉 죽는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온 세상이 한 순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화로움 그리고 존귀함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거나 병을 고치실 때, 그리고 자연을 복종하게 하실 때 꾸짖으셨다는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누가복음 4:35).”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누가복음 4:39).” 또 보지요.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누가복음 8:24b).” 주님께서 꾸짖으시면 귀신과 질병과 자연 만물이 복종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여기까지가 과거의 승리에 대한 회상입니다.
이제 7-9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본 의인들이 장래의 성취를 기대하는 반응입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편 76:7).” 이 천하무적의 용사로 나타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장래의 한 순간에 온 세상의 심판자로 임하실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말씀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라기 3:2).”또 우리는 7절과 비슷한 표현을 요한계시록 6장에서도 봅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17).”
그래서 하나님은 경외 받으실 분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7절부터 12절까지 ‘경외 받는다, 두려워한다’와 같은 표현이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7,8,11,12).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8절은 그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심판자로 임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시편 76:8).” 그 심판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이 하늘 하나님 보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심판은 우주적입니다.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고 땅이 두려워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9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두 측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주와 신원입니다. 악한 자들, 하나님의 대적들을 향한 저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억눌린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원해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심판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입니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시편 76:9).”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 심판의 때에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온유한 자’라는 말은 고통 당하는 자, 곤고한 자, 빈곤한 자, 억눌린 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동안에 이 세상의 대적과 원수들로부터 당한 모든 악한 일들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신원하여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늘 제단 아래서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구했습니까?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을 신원하시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4. 경외 받으실 하나님 (10-12; 롬 8:28; 시 2:1-4,11)
이제 10-12절은 결론이자, 교훈입니다. 10절을 보지요.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편 76:10).” 이 구절도 4절 만큼이나 번역이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노여움이 찬송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을 아무리 대적한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노여움은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벤저민 워필드의 설명입니다. “사탄이 삼킬 자를 찾아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릴지라도, 그는 입에 재갈이 물려 있고 그 고삐를 쥐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총감독하시고 연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은 감독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도리어 감독의 결론을 극적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J.J.페로운의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분노,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신들의 패배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할 뿐이다. 하나님은 형벌로 그들에게 부으실 진노의 저장고를 가지고 계신다.” 리처드 필립스는 이것을 좀 더 교훈적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격렬하고 악의적인 행동이 자신들을 향해 취해질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지배를 받고 있고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을 정확하게 성취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들의 말은 모두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이미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1–4).”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웃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런 하나님을 뵐 수 있다면, 이런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의 진정한 어려움은 하반절에 있습니다.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여기서 ‘금한다’는 말은 ‘(옷을 입기 위해) 띠를 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띠로 묶으신다, 결박하신다는 의미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앞의 노여움을 사람의 것으로, 뒤의 노여움을 하나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임의적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제 11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시편 76:11).”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들을 구원하여 주셨으니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을 때입니다. 서원을 갚는 행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들이 전제됩니다. 게다가 공중 앞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갚는 행위는 예물 즉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을 포함합니다(시 66:13-15). 그래서 하반절에서는 사방의 모든 사람이 경외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경외 받으실 분이시며 이 예물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2절입니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편 76:12).” 하나님을 경외함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것입니다(시 2:11). 이것은 즐거운 두려움인데, 이런 경외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경외함의 두번째 차원은 무서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강제적입니다. 강제적으로 무릎이 꿇려지는 것이고, 두려움 때문에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억눌린 자들에게 통쾌한 일이 될 것입니다. 고관들의 기는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을 공격했던 용기를 가리킵니다.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욕한 용기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를 꺾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 되실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시 2:11-12; 벧전 1:17)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심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게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께 마땅히 가져야할 반응은 단순한 무서운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함입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참혹한 전쟁을 많이 겪었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재난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잘난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그것은 21세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일으킨 전쟁 뿐 아니라, 쓰나미나 지진 또는 태풍 같은 자연재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심판의 참혹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최후 심판의 러허설에 불과합니다.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입니다. 시편 2편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편 2:11–12).”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추방당한 자요, 본토인이 아닌 외인이요, 눌린 자입니다. 나그네이기 때문에 느끼는 절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이끌어 그 최종 승리의 날을 기대하며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는 자들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베드로전서 1:17).”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 이것이 지혜요,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