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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교만을 깨뜨리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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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교만을 깨뜨리는 복음

열왕기하 5:1-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9-23

말씀내용
교만을 무너뜨리는 복음 (왕하 5:1~19)

신앙생활을 하면서 익숙함이라는 뜻밖의 장애물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지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다시 복음을 듣고 복음의 은혜로 돌아가는 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기를 기대합니다.

1. 모든 것을 가진 사람(1)
오늘 본문은 먼저 두 사람을 소개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고 사회의 신분으로 보자면 극과 극에 있는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열쇠를 가진 사람이지만, 후자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거의 무시되곤 합니다.
먼저 본문은 이스라엘의 인접국인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라고 하고 그 뒤에 “그는 큰 용사”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정도 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위, 평판, 소유, 성공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어떤 현대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나병이 현대의 한센병이 아니라, 건선이나 옴과 같은 피부병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어찌 되었든 이 병은 나아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주변국인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본문은 이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물론 이것은 성경의 설명이지, 나아만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생을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모르는 것이 큰 차이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아만에게 나병이 있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할 수 밖에 없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만한 이 인물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주셨고, 절박함과 같은 심정을 주신 것입니다.

2. 미천한 소녀(2~3)
두번째로 소개되는 인물은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나아만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2절에서 이렇게 소개됩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이스라엘의 변방에 살다가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와서 나아만 장군의 부인의 종이 된 한 어린 소녀입니다. 성경은 이 소녀의 이름 조차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녀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기도 하십니다. 이 소녀의 경우도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녀는 나아만 장군의 부인을 수종들면서, 장군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확신하는 바를 부인에게 말합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
얼마든지 무시해버리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 종의 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부인과 나아만은 그 작은 아이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침을 받고자 하는 나아만의 마음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복음으로 불러내기 위해서 주시는 첫번째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당당한 접근
그러나 역시 나아만이 접근하는 방식은 당당합니다. 이런 자세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아만은 왕에게 나아가고 왕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갑니다. 나아만은 또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 그리고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는데, 이것은 아마도 고침을 받은 뒤에 그 대가로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치유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의 당당함의 근거입니다.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 왕의 편지를 받아 읽은 이스라엘 왕은 당황하고 놀랍니다. 아람 왕이 괜히 트집을 잡아서 이스라엘을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음모라고 파악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불신앙으로 반응합니다. 7절은 이스라엘 왕의 반응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
슬프게도 이스라엘의 왕은 전쟁통에 붙잡혀와서 아람의 종이 된 어린 이스라엘 소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합니다.

4. 무례한 선지자, 거만한 장군
이제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집으로 향합니다. 본문이 설명하는 그 모습은, 나아만의 거만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라사의 집 문에 서니(9).”이것은 필시 고침을 받으러 온 사람의 모양새는 아닙니다. 이 사람은 거만했습니다. 자, 이제 엘리사가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 사람 나아만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무례함 그 자체입니다.
먼저 선지자는 자기 집 문 앞에까지 찾아온 아람의 군대장관을 만나주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 그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말합니다(10).
자, 나아만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나아만은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나아만은 “그러면 그렇지. 이스라엘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하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헛된 짓을 했구나 하는 심정으로 엘리사의 집을 떠나려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지요.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11~12).”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을 만류하면서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다시 엘리사의 집으로 와서 엘리사의 앞에 서서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15).”
그리고 나아만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이스라엘의 흙을 요구합니다. 이제부터는 번제물과 다른 히생제사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겠다는 것입니다(17). 나아만은 병고침을 받은데서 끝난게 아니라,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한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놀랍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5. 복음은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지금까지 본문의 이야기를 죽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엘리사는 왜 자기 집까지 찾아온 나아만 장군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더 친절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방인을 향해서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사실 복음의 매우 중요한 본질을 다루는 질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물론 한 국가의 군대 장관이었고, 크고 존귀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나아만이 가진 이 생각과 태도는 죄인이 가지는 전형적인 생각이고 태도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당당했습니다. 아람 왕의 편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간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충분히 의식했고 그런 까닭에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자기 집에 붙잡혀와서 종이 된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전해준 이야기에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기에, 그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귀담아 들었고 그 아이가 알려준 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당당하고 모든 것을 가진 나아만에게 절박함을 야기할만한 질병이 있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왜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갔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딱 거기까지만 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편지 뿐 아니라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는 대가를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런 자세로 나올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아만의 태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죄인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죄인은 이런 교만이 꺾여지지 않은 채 복음을 받을 수 없으며,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먼저 그 죄인의 교만한 심령을 깨뜨리십니다. 우리는 나아만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바로 이것 때문에, 나아만 장군에게 무례하게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데에는 친절한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나아만이 자기 생각과 주관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음을 가르치려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사람은 패자가 되어야 합니다. 패자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사람, 절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비록 나병을 안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해서 절망할 만큼 겸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이루었고 그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일까요? 그의 직업과 신분, 그가 이루어낸 성취와 성공, 그가 얻은 명성과 영예를 생각해보면, 그는 그만한 태도를 가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그를 무시하듯 다루십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시켜서 집 앞에 온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했을 때, 나아만 장군은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분노하면서 한 말은 그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11~12).”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유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도 다 자기의 기대와 합리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와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첫번째로 나아만 장군이 표출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 신분와 지위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를 낮추시는 역사를 행하시기 전에는, 모든 죄인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아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주는 한 사람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만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막 7:24~30). 그녀도 이 이방인 장군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을 둔 이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인근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나아만이 보여주는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기를 주님께 간청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냉정하게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여인은 나아만 처럼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과는 대조적인 반응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이것이 패자로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태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이 말을 들으시고는 바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을 꺾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꺾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교만을 꺾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여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먼저 그 안에서 행하신 은혜로운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나아만의 말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 또한 나아만의 생각입니다.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 아마도 나아만이 생각했던 것은 보통 병을 고치려는 무당들이 하는 것처럼 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그 부위에 대고 흔들어서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요구한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병을 고쳐주려면 선지자가 손을 그 부위에 얹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아만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고, 사자를 시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을 전해주었습니다. 요단 강은 자기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인 아바나와 바르발을 떠올리면 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에 강에 몸을 씻어서 병을 고칠 것이라면, 우리나라에 있는 더 나은 강을 두고 왜 여기 초라한 강물에 몸을 담가야 하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아만 장군의 판단이 그대로 표출되는데, 겉으로 볼 때 화려하고 유명하고 대단해 보이는 것들을 주목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는데 큰 걸림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고전 1:22~23).
죄인이 ‘내 생각’을 고집하는 한, 은혜를 받는 자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은혜 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죄인의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까?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은혜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이런 죄악되고 교만한 태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 5:5).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6.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사 55:8~9; 고전 1:27~31)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무너뜨리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보십시오. 여기서 나아만이 말한 것처럼,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주로 지혜있는 자, 문벌 좋은 자, 지혜 있는 자, 강한 것들에 속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 생각과 합리에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에 대단해 보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죄인들에게 찾아온 복음은 자랑할 수 없게 합니다. 영혼의 구원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자신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보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우리 안에 있는 자존심과 자부심 혹은 우리가 가진 신분이나 명예 또는 세상에 사는 동안 이룬 업적이나 성공들에 우리가 여전히 매여 있다면, 바로 거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찾아온 복음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낮추사 복음의 은혜를 입게 하신 것으로 인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