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내가 사모하는 말씀 - (10). 고난이 가져오는 사귐

내가 사모하는 말씀 - (10). 고난이 가져오는 사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내가 사모하는 말씀 - (10). 고난이 가져오는 사귐

시편 119:73-80, 열왕기상 19:10, 시편 34: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8-17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시편 119편의 열 번째 연에 해당하고, 모든 구절은 히브리 알파벳 요드(י)로 시작합니다. 시편 119편은 전체적으로 고난이라는 주제가 배경에 흐르고 있는데, 이 주제는 9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10연으로 이어집니다.


1. 고난이 끌고 가는 두 방향: 고독과 사귐 (왕상 19:10; 시 119:21,23,63,74,79)
고난은 고난 받는 사람을 정반대의 양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한 방향은 고립과 외로움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고난을 위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반드시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람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누군가에게 오픈하기를 어려워하고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깊을수록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 옆에 아무도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욥에게는 멀리서 그를 위로하려고 온 세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욥의 고독을 더 깊게 느끼게 만들어주었을 뿐입니다.
구약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선지자는 이세벨이 자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멀리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까지 도망합니다. 그리고는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에게 말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열왕기상 19:10).”
사실 성경을 읽어보면, 고난 속에서 이런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로 또 다른 고통을 겪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깊은 고난은 우리를 고독과 외로움으로 끌고 갑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우리를 고독과 외로움으로 끌고 가도록 허용해야 하겠습니까?
크리스토퍼 애쉬는 사탄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비밀병기를 I-I-O 미사일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견디는 신자를 바로 이 미사일로 공격함으로써, “나 오직 나만 남았고 그들이 내 생명도 노리고 있어.”라고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I-I-O는 “I, and I Only am left, and they seek my life also.”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는 수치감과 함께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온 고통이기에, 고독감과 수치감은 인간이 지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고난을 통해 이 약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도 고립과 고독, 이 외로움 속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하지만, 고난이 끌고 갈 수 있는 방향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고난은 고독이나 외로움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본문 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일관되게 말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시편 119편에서 지금까지는 등장인물이 주로 시인 자신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거의가 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복수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주로 시인을 대적하는 원수들이었습니다. 21,23절은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과 ‘고관들’을 말합니다. 원수들은 많고 그들은 곳곳에 넘쳐납니다. 그러다가 63절에서 처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이 복수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74절과 79절에 등장합니다. 이것이 복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복수로 사용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교회입니다. 시인이 겪는 고난은 교회를 교회되게 만듭니다. 본문이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관점은 긍정적입니다. 고난이 신자들 안에 진정한 결속과 사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2. 시인의 자기 인식 (73; 롬 9:20; 엡 2:10)
먼저 73절은 시인의 자기 인식을 보여줍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편 119:73).” 시인은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이 빚으시고 만드신 피조물로 인식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다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비유컨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요구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로마서 9:20).” 이 말은 피조물인 인간이 개나 소와 같은 짐승과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귀한 존재이지만, 창조주 앞에서 인간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이런 절대적 인식이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의 경륜에 순응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이 인식이 있다면 교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고 빚어 가시는 과정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이 고난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이미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빚으실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 앞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고백을 하면서도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절대 주권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 깊이 알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결국 이 고백은 “저를 빚어주소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저를 만드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고난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 (75-77; 벧전 2:23; 애 3:33; 욥 13:15)
시인의 자기 인식에 이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고난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75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편 119:75).”
이 말씀은 주님께서 고난 중에서 취하셨던 태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주님은 유대인의 공회와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그 부당한 판결들에 맞서시는 대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1세기의 모든 신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하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바라봄으로 인내하고 견디라고 권면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어쩌면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 속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최종 판단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인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내 고난은 하나님 탓, 하나님 때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말이 아닙니까? 이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은 73절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만들고 세우셔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으실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이 고난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시인은 지금 고난을 쉽게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깊은 고난 속에서 그는 지금 이 고백을 하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무너진 뒤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탄식 어린 고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예레미야애가 3:33).” 신자들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라고 본문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76-77절입니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편 119:76–77).”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헤세드입니다. 시인이 바라는 위로는 하나님의 헤세드 밖에 없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 위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언약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욥은 욥기 13:15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기 13:15).” 이 구절의 앞부분은 개역개정역의 난외주에 나와 있듯이,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확신하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왼손으로는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실지라도, 당신의 능하신 오른 손으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성도를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데, 시인은 하나님의 그 오른손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77). 이 고백은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그 언약적 사랑이 시인에게 위로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4. 고난의 긍정적 효과: 사귐, 결속과 연대 (74,79; 시 34:1-3,8; 롬 12:15)
그러나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74절에 ‘주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주변을 둘러보던 시인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자기를 보고 기뻐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고난 속에 있는 시인을 보고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인이 고난이라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의 한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시인이 ‘주의 말씀을 바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기뻐한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신자의 모습을 보는 성도들은 기뻐하며 용기를 얻습니다. 이것은 고난 당하는 성도가 가지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이 영향력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고, 성도 자신은 거의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고난의 복음을 몸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성도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더 많은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간증의 효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공담을 나누는 간증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에서 건져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간증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힘이 있는 간증은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화가 없는 고난의 자리에서 끝까지 참아내며 주의 은혜로 견디고 살아간다는 간증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굴에 있을 때 지은 시편 34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때 다윗은 이 사실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4:8).”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때 한 말이 아니라, 사울에게 쫓김을 당하는 절박한 순간에 한 말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이 시편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시편 34:1–3).” 고난 속에서 그가 부르는 찬송은 곤고한 자들의 가슴에 찬송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이 사귐과 결속 그리고 연대를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단지 주를 경외하는 곤고한 자들로 하여금 찬송을 하게 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윗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다윗의 모습은 그들과 다윗을 하나가 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79절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시편 119:79).”
단지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넘어 그들은 시인에게로 돌아와서 모입니다. 시인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시인은 할 말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에게로 모여올 때, 그는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책에서 보고 배운 게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통해서, 특별히 고난이라는 특별 과정을 통해서 그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교훈입니다. 고난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하나로 결속하고 연대하게 합니다.
로마서 12:15을 보지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물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도 결속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더 깊은 사귐과 결속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이야말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5. 수치를 당하게 될 자들 (78,80; 히 12:2)
시인은 고난 중에서 수치를 당하는 중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 수치감을 느낍니다. 자기 죄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이 아닐지라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당당하기 어렵습니다. 고난 중에서 사람은 낮아집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낮추시고 겸비하게 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결국 그 수치를 당할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 거짓으로 시인을 엎뜨려뜨린 사람들’입니다(78). 시인 자신은 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기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80).
이 고백은 시인을 고난 중에서도 더욱 담대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은 더 이상 죄의 결과로 찾아온 수치심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수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몫이고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어떤 고난의 자리에 처해져서 수치스럽다고 느낄지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모든 수치를 한 몸에 다 받으시고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수치를 제거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6. 교훈과 적용: 고난과 말씀, 그리고 사귐 (74; 삼상 20:17; 23:15-17; 행 17:14-15; 18:5; 28:15; 고후 1:4-6,11)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경의 몇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먼저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무고히 쫓길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이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그 마음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다윗을 요나단은 이유 없이 끔찍히 사랑했습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사무엘상 20:17).” 요나단은 다윗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본문도 읽어봅시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사무엘상 23:15–17).” 고난 속에서 다윗은 요나단과 깊이 결속하였고, 이 결속은 다윗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습니다.
또 바울 사도도 생각났습니다.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사도는 사정상 실라와 디모데와 떨어져 혼자서 아덴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바울 사도는 간곡히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보내달라고 명합니다(행 17:14-15). 바울 사도는 아덴에서 홀로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로 가게 되는데 이때 사도는 상당히 의기소침함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이르러 실라와 디모데를 만났을 때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사도행전 18:5).” 형제와의 결속은 이런 것입니다. 대사도에게 있어서도 말입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에서 그가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의 교우들은 로마에서 약 70km 떨어진 압비오 광장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사도행전 28:15).”
고난은 성도들을 깊은 사귐으로 이끌고 연대하고 결속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기억합시다. 고난이 저절로 성도들을 깊은 사귐 속으로, 결속과 연대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난은 두 가지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고독과 고립감 아니면 사귐 그리고 결속과 연대로 이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고독과 고립을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 없이 I-I-O 미사일을 쏘아 댑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사귐과 결속 그리고 연대의 축복이 되게 하시고 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귐과 결속 그리고 연대의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까? 74절을 다시 봅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시편 119:74).” 고난 중에 성도가 주의 말씀을 바랄 때, 그 고난은 주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사귐과 결속 그리고 연대로 이끌어 교회됨을 경험하고 교회가 되게 하시며 교회 다운 교회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서 자신을 지혜롭게 오픈할 필요가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 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고난이 어떻게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과 자신을 다시 연대하게 해줄지에 대하여 사도가 가진 기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4-6,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시는 고난을 낭비하거나 오용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