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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4). 내 영혼을 살리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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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4). 내 영혼을 살리는 말씀

시편 119:25-32, 민수기 21:4, 열왕기상 4:2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4-13

말씀내용
오늘은 119편의 네번째 연, 25-32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여덟 절은 모두 히브리어 네번째 알파벳인 ‘달레트(ד)’로 시작합니다. 이 외에도 히브리어로 보면, 25-28절은 모두 끝 글자가 히브리 알파벳 ‘카프’로 끝나고 29-32절은 ‘요드’로 끝나는 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 연이 다루는 주제는 ‘고난과 은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번째 연에서 보았듯이 고난이라는 주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내 영혼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주의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리는 경험 말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것을 어느 정도는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에 따라 이 시편의 말씀은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칼빈은 이 시편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과 만족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고 말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무슨 기쁨과 만족이 있겠습니까? 만일 편안히 잘 사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만족의 전부라면, 신앙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입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5-28절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9-32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고난의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의 고난 속에서 우리 영혼을 살리는 일을 넘어서, 자유함의 날개로 날게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입니다.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1. 나를 살리는 말씀 (25-28; 요 10:10; 시 119:71; 욥 16:20; 잠 18:14; 시 119:41,58)
먼저 25-28절입니다. 저는 이 본문의 소제목을 ‘살리는 말씀’이라고 붙였습니다. 25절은 시인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25).” 진토에 붙었다는 표현은 “무덤 밖에는 남은 게 없습니다. 나는 쇠약하여 죽게 되었고 회복의 가능성도 없습니다.”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듯이, 시인은 자기가 아직은 살아있으나 그 흙에 붙어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죽어 진토에 붙어버린 군인들의 주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영혼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시인에게 주어진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연에서 말했던, 교만한 자들의 비방과 멸시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범죄함 때문에 생긴 영적 침체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영적 침체가 반드시 죄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시인의 영혼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생기를 잃었고 더 이상 기쁨이 없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칼빈은 이때 신자가 어떤 믿음의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이렇게 쓰러뜨리고 허무에까지 이르게 하셨을 때,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에게 생기를 주시는 것이 그의 고유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모든 만족을 하나님과 그의 은혜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칼빈의 말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영혼의 상태는 죽음에 이를 지경이 되었지만,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우리의 주의을 강하게 끄는 것은 ‘주의 말씀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살리시는 수단이 무엇인지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이 표현으로 보건대, 시인은 자기 영혼을 살리는 주의 말씀의 능력을 이미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26절에서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라는 고백이 시인이 누렸던 과거의 은혜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의 말씀은 언약과 복음의 말씀이며, 부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아니면 죽음의 진토에서 일어날 길은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이 기도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저는 생명력도, 힘도 없이 진토에 누워 있습니다. 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요 10:10) 말씀하시던 구주시여, 저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제게 당신의 생명력을 불어 넣으셔서 제가 진토에서 일어나 주님을 온전히 붙좇게 하옵소서.”
시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그가 경험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경험할 때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후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은 안 돼”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지치지 않고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율례들을 가르치십니다. 인생의 고난이 아니고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27절에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더 간구합니다. “가르치시고(26), 깨닫게 해주소서(27)”라는 것이지요. 고난이 닥쳤을 때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값비싼 교훈을 얻을 수도 없고 그렇게 된다면, 그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면서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시 119:71).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발견하는 사람은 그 교훈의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을 것이고 그는 고난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절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자기 영혼의 상태를 피력합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녹는다는 말은 눈물이 흐른다거나(욥 16:20) 슬픔이 너무 중해서 무너져 버렸고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언 18:14).”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주의 말씀대로’라는 말입니다. 25절에서 쓴 것과 똑같이 다시 사용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시인이 매우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41절과 58절에서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시편 119:4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편 119:58).”
왜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라는 표현에 집착합니까?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간구가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특별한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고 믿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진토에 붙을 정도로 납작하게 누워 버린 자기 영혼을 이제 일으켜 세워 달라고 구하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 처음 네 구절에서 시인은 자기 영혼을 살게 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2. 나를 달려가게 하는 말씀(29-32; 1:6; 119:11, 99-100; 민 21:4; 왕상 4:29; 벧후 1:2)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후반부 네 구절은 살게 할 뿐 아니라 달려가게 하는 말씀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 없이 들으십시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해서, 고난의 상황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그 고난이 여전히 머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 속에서도 살게 하고 심지어 달려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29).” 시인이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거짓 행위를 버리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거짓 행위가 멀리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거짓 행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과신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기도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같은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간구를 하라고 하심으로써, “나는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말 것과 이 땅의 가장 경건한 사람들도 구해야 하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브리지스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가장 오래 믿은 사람이라도 방심하면 어느 순간 이전 죄의 사슬에 포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라고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주의 말씀이 거짓 행위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은혜의 수단임을 고백합니다. ‘주의 법’은 모든 거짓과 거짓 행위의 가장 확실한 해독제입니다. 빌렘 반게메렌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방식에서 그 사람을 지켜 주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게 하는 불타는 내적 갈망을 새롭게 해주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이다.”
30절부터는 시인이 자신의 각오를 능동적으로 밝힙니다. ‘택하고, 두었나이다(30),’ ‘매달렸사오니(31), 그리고 ‘달려가리이다(32)’라는 동사들은 시인의 선택과 결단을 보여줍니다. 먼저 30절입니다.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30).” 여기서 시인이 선택한 ‘성실한 길’은 29절에서 말한 ‘거짓 행위’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거짓 행위를 직역하면 거짓의 길인데, 둘 다 길을 이야기합니다. ‘성실한 길’이라고 할 때도, ‘성실한’은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말인데 이 말이 진리를 뜻하는 ‘에메트’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그래서 ‘성실한’이라는 단어는 ‘확고함, 진리, 성실, 믿음, 진실, 정직’ 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시인은 시편 전체의 주요 주제인 두 길을 말하는 겁니다. 1편에서 말한 악인들의 길과 의인들의 길(1:6)은 여기서 거짓의 길과 진리의 길로 표현됩니다. 시인은 거짓의 길이 자신에게서 떠남으로써 그 길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진리의 길을 택한다고 말합니다. 매일 매순간 신자는 이 진리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거짓의 길을 떠나게 해달라는 자신의 기도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길은 나는 낮아지고(자기 부인입니다) 주를 높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순종의 길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아니지요. 시인은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성실한 길, 진리의 길을 원하고 지속적으로 그 길을 택하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도덕적 결정’인 ‘주의 규례’를 늘 상기해야 합니다. 진리의 길을 선택한 결심이 날마다 견고해지기 위해, 우리는 생명과 빛과 은혜의 보고인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둘째 연에서 본 대로, 이것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행위입니다(시 119:11).
31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라고 또 한 번의 능동적 행위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 ‘매달렸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25절에서 ‘진토에 붙었다’고 할 때 ‘붙었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는 ‘착 달라붙다, 밀착되다, 의지하다, 붙좇다’ 등을 의미합니다. 시인이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상황이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전개되지 않고 여전히 고난의 한 가운데 처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상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꼭 붙들겠다는 각오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상하지 않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꽉 붙잡는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예가 있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민수기 21:4).”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은 에돔 영토를 지나는 것이었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않음으로 우회하게 되는데 거기서 백성의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고 결국 이것이 무시무시한 불뱀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이 상했던 겁니다. 그리고 시인이 지금 어쩌면 그들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 ‘주의 증거들에게 매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최선의 방도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목을 끄는 것은 31절 하반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시인이 왜 이런 말을 언급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더는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찰스 브리지스는 깜짝 놀랄 만한 해석을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주님의 증거들에 매달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즉시, “오 주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저 혼자 두지 마소서. 그리 아니하시면 제 자신에게 수치가 될 뿐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 거침돌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깊은 의식 속에서 주님을 의뢰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을 견지하는 원리입니다.”
저는 이런 해설을 덧붙이는 찰스 브리지스가 30대의 나이에 시편 119편을 설교했고 그것을 출판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 119:99–100).”
32절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인은 ‘자기 상황을 호전 시켜 주사면 달려가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넓히시면’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상황은 여전할지라도 주께서 마음을 넓혀 주시면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넓힌다’는 말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말이 아닌데, 무슨 뜻입니까? 열왕기상 4:29에 유사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왕상 4:29).” 여기서 넓은 마음은 많은 지혜와 총명을 담는 넓은 지성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마음’은 인간의 장기로는 심장을 가리키고, 은유적으로는 인간의 생각, 의지, 감정,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식(양심)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인이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이라고 하는 말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면’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감이 되십니까? 고난 자체가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힘든 것은 그 고난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입니다. 욥이 이것을 경험했던 것이지요. 물론 시인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속속들이 다 알게 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만큼 이해하도록 깨닫게 해주시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다양한 고난의 상황에 처할 수 있고, 때로는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상황도 있겠지만, 주께서 마음을 넓히시면 우리도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점에서 박해 받는 고난의 한 가운데 있던 나그네 같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한 첫 인삿말은 인상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후서 1:2).”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넓혀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아는 참된 영적 지식이 성도들의 마음을 넓혀주어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넓은 마음은,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주의 말씀의 길로 달려갈 수 있게 합니다.


3. 교훈과 적용 (시 88:8; 사 40:29-31)
주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시인은 진토에 달라붙은 자기 영혼을 주의 말씀으로 살려 달라고, 그리고 주의 말씀으로 일어나 달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의 영혼은 죽은 것과 같은 침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믿는데 전과 같이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기진하여, 주님께 순종하는 일이 달갑지 않고 자기 부인의 덕을 참아낼 수도 없으며 십자가가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시편 88:8의 고백이 정확하게 이 시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 같습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편 88:8).”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확신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주의 말씀 보다 힘있는 처방약은 없습니다. 시인은 적어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의 위로와도 바꿀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은 주의 말씀 뿐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진토에서 일어서게 하고 달려가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마음을 열고 받읍시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2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