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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6) - 애굽으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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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6) - 애굽으로의 귀환

출애굽기 4:18-3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9-12-11

말씀내용
1. 두려운 여정
얼마나 많은 것과 좋은 조건들이 주어지고 갖추어져야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미답지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있다. 앞으로 나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미국에 이민 올 때, 이미 미국에 집을 장만해놓고 할 일도 다 정해놓고 돈도 두둑하게 가지고 들어온다면 좀 안심이 될 수 있었을까? 혹 복음이 없는 민족과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선교사에게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으면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을까? 선교비는 그저 간신히 살 수 있을 정도로 들어오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있으며, 아는 사람은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두려움이 선교사들에게는 있다. 40년 만에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앞에 설복당한 모세는 이제 40년 만에 사명을 띄고 애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은 40년 전에 쓰디쓴 거절을 당하고 애굽인 살인의 혐의로 지명수배가 되어 미디안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가 40년 동안 바로의 왕궁에서 성장해왔던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가 40년 만에 애굽으로 귀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 엄청난 사명을 띄고 가는 모세지만, 그에게는 군대도 없고, 아내와 어린 아들들 외에는 아무 수행원도 없다. 그의 손에 가진 것은 양을 칠 때 쓰던 지팡이 하나였다. 하나 더 있다면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전부다. 본문은 애굽으로 출발하는 모세(18~23), 그 여정에 일어난 돌발적인 할례의 사건(24~26). 그리고 호렙에서 아론을 만나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경배하는(27~31) 세 내용으로 구성된다.

2. “하나님의 지팡이면 충분합니다(18~20).”
모세는 먼저 장인 이드로에게 허락을 구한다(18). 그는 장인의 집 목축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여전히 장인을 섬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위 휴가를 청해야 할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진실인가? 애굽에 있는 형제들을 보러간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심리적 이유들이 있겠지만, 2:11에 모세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라는 말과 같이, 동족들의 상태를 보려고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당시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는 의도로 나갔었다. 지금도 모세는 자기 민족을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서 구원하려고 나가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라는 말을 하심은 무슨 까닭인가(19)? 모세의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명수배를 내린 그 바로왕이 죽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이 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왕의 죽음으로써 이제 출애굽이라는 대장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모세가 보고 배우게 될 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일어나는, 아니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단지 순간 순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행동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린 신앙인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거듭해서 가르쳐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다. 우리 일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세를 훈련시켜가시듯이,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이제 모세는 부인과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라는 말로써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모세와 함께 하시며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실 것인지를 암시한다. 더 이상 이 지팡이는 목자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다. 애굽으로 가는 길은 모세에게 결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두려움도, 막막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이렇게 고백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의 지팡이면 충분합니다.”

3. “내 아들, 내 장자를 내놓아라(21~23).”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모세에게 가서 바로 앞에서 모든 이적을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할 말을 주신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장자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장자를 죽이리라.” 출애굽기는 단순히 노예 해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셔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열심을 보여준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도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사 자기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4. 할례?“네가 언약의 백성, 내 아들이라면 할례를 행하라.”
그런데 이야기가 갑자기 한 돌발적 상황으로 인하여 중단된다. 하나님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24). 이 사건은 수많은 학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수많은 질문이 이 사건에 대해서 던져졌다.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한 사람(‘그’)이 누구인가? 그가 모세라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고 왜 그를 죽이려고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모세라면, 십보라는 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일까? 또 그 아들은 어느 아들인가, 첫째 아니면 둘째? 피남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각각 답변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한 것은 모세였다. 아마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을 것이다. 십보라는 순간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다섯 번이나 그 부르심에 대해서 논박을 해대는 동안에 오래 참으심으로 모세를 대하셨다. 그런데 지금 아들의 할례 문제를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할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할례의 실패는 즉각적인 하나님의 형벌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을 아들, 장자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의 표로 아브라함에게 집 안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셨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기 전, 첫 유월절을 지킬 때 다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셨다(출 12:43~51). 할례는 ‘잘라내는’(cut off) 행위이다. 이 잘라냄은 심판을 상징하는 말이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할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언약의 표시로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자신의 집안의 아들에게 할례를 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언약 안에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아더 핑크나 캠벨 모건은 이런 유추를 한다. 모세는 십보라의 반대로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가장인 모세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인하여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죽이려고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캠벨 모건이 말한대로 모세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맞게 되었는지 모른다. 모세는 아무 힘도 없이 생사를 오가고 있을 때 십보라는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십보라가 그 상황에서 주저함이 없이 얼른 아들의 할례를 행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이 할례를 반대해왔었다는 가정을 더욱 확증해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보라가 아니라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한 가정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을 알자.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뿐 아니라 그 말씀이 가정 안에서 시행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모세는 아들의 할례를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언약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모세는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구원자가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고백하고 경험해야만 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려고 하면 그는 먼저 이 분명한 죄인됨의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표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와 동일한 것을 행한다. 자신이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세례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와 저의 이 어린 자식은 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백과 언약의 표가 없이 어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십보라는 아들의 할례를 행하고 그 베어진 양피를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면서 모세에게 “당신은 나의 피 남편입니다”라고 외쳤다(25). 십보라의 이 말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양피를 베는 할례의 행위로 인해서 흘려진 피가 모세에게 묻혀졌을 것이다. 이로써 십보라는 모세가 아들의 할례 받지 않음을 인하여 죽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할례의 피가 모세에게 묻혀졌다는 것은 모세 자신이 죽을 그를 대신하는 아들의 피로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얻었다는 표이다. 십보라는 그렇게 남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었다.

5. 걱정은 기우다.
이제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아론을 만나서 함께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는 장면이다(27~31).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다. 모세가 아론을 호렙산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던 장소 그곳에서 모세가 아론에게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고하게 하셨다(28).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론은 모세의 입이 되어 백성의 장로들에게 말했고 모세를 대신하여 이적도 베풀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들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여기서 모세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경험했겠는가? 그의 기우는 그야말로 기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거절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묻던 모세의 걱정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당신의 손에 붙들고 계시며, 세상의 모든 권력이 다 하나님의 계획과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당신도 그것을 배우고 살아가는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신앙의 여정 속에서 당신이 배운 하나님에 관한 교훈은 무엇인가?

6. 교훈: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준비
A.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사람이다.
당신의 삶 속에 있는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은 무엇인가? 무엇이 주어지면, 어떤 조건이 채워지면 당신의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들은 돈, 직장/일, 자녀들의 문제인가? 그 모든 것이 충족되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삶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 지팡이가 아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팡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약속,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약속이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 약속으로 무기를 삼았고, 양식을 삼았다.

B. 그리스도인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른 순종이 없다면 허사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주와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고백 위에서 세례를 받았는가? 내 안에 그것이 분명하지 않고, 내 안에 그것에 관한 분명한 스토리가 없다면 어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든 모세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함께 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당신에게는 그 이야기가 있는가?

C. 그리스도인은 안식하는 자이다.
우리는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걱정한다. 그러나 모세가 배운 것을 기억하자. 그는 자신의 모든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잠잠히 아멘으로 그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나를 지금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내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다. 나의 자녀들로 인하여 가지는 염려와 걱정도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경제적으로 앞길이 어떻게 열리게 될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배우면서 살아왔는가? 그렇게 믿음이 성장해왔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오늘도 당신의 손에 달려있지도 않은 것들을 인하여 걱정하면서 자기 손으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한시도 쉬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부르신다. 그 안식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안식이다. 그 안식을 누리고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