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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5) -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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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5) -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

출애굽기 4:1-1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9-12-04

말씀내용
1. 모세의 고민
내가 누구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 이 결정적인 두 가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 모세는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야웨, 곧 영원하신 자존자로 당신을 계시하여 주셨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구원자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자신이 모세에게는 없었다.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한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2:14). 지금 모세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를 대면하여 바로에게 자신의 존재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면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4:1에 모세의 항변이다.

2.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만하지 않은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 한 사람을 설득하시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천지를 진동하시고, 엄청난 기적을 한 두 번 베푸심으로써 단번에 모세를 항복시키실 수 있으신데,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고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이런 오래 참으심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대하시는 방식이 여기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없는 순종, 힘에 의한 굴복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시간이 걸려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항복을 받아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종종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구실이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롬 2:14). 그렇다면 지금 모세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토를 달아도 되는 것일까? 모세가 하나님의 명백한 부르심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오늘 설교 제목인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잘못된 느낌이 있을 것이다. 불순종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불신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런 불순종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제목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어쩌면 모세가 처음에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신을 벗은 것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만이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르심의 장면을 기억해보라. 이사야도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에는 입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요나는 아예 부름받은 곳인 느니웨와 정반대편의 다시스를 향해 도망했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결코 신실한 믿음과 즉각적이며 충성스러운 순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을 허용하시고, 이런 반응을 기록하여 우리로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반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당신은 너무나 즉각적으로 기뻐서 뛸듯이 순종으로 반응했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모세의 태도와 하나님께서 그를 대하시는 방식을 살펴보자.

3. 하나님이 주신 상세 시나리오(3:16~22)
모세가 세번째로 하나님께 던진 질문은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 것이다(1).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상세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불러모아서 해야할 말을 자세히 말씀해주셨고(3:16~17),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도 확언하셨다(3:18a). 또 장로들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해야 할 말도 상세히 알려주셨다(3:18b). 그리고 바로는 즉각적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치기 전에는 듣지 않을 것이며 결국 애굽에서 나오게 될텐데, 그 때에는 여인마다 이웃에게서 은금과 의복을 취하여 나오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주셨다(3:19~22).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그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모세에게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모세는 ‘그러나’라고 토를 달았다. 하나님께서 들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는 아니라고 부정한다. 명백한 불신앙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라.

4. 첫번째 이적(2~5)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2). 모세는 목자였고, 그의 손에는 목자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것을 땅에 던지니까 그것이 뱀이 되었고 모세는 두려워서 피했다. 다시 말씀대로 그 꼬리를 잡으라고 해서 잡았더니 다시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기 위해서 주신 첫번째 이적이다. 이것은 결코 대단하고 장엄한 이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목자들의 닳고 닳은 지팡이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모세를 사용하시려고 하신다. 아무 것도 아닌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 뱀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바로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바로의 관에는 코브라의 형상이 주조되어 있는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다. 모세는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었을 때 그것이 두려워서 피했지만, 하나님은 피하지 말고 그 꼬리를 잡으라고 명하셨다. 잡자 곧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이 섬기는 힘의 상징인 뱀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이제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더 이상 미디안 목자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권위의 상징이 될 것임을 하나님은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이적이라고 이 이적의 의도를 설명하신다. 1절에 제기한 모세의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

5. 두번째 이적(6~7)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이적을 보여주신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자, 손에 문둥병이 발하였다. 다시 품에 손을 넣으라고 하셔서 그대로 하니까 손이 다시 깨끗하여 졌다. 이 이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다루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실 열 가지 재앙 중에 많은 질병의 이적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첫번째 이적에서 모세가 목자의 평범한 지팡이에 불과한 사람에 비유되었다면, 두번째 이적에서 모세는 불결해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는 도무지 합당치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셔서 쓰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모세는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하나님께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누군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게 정결케 하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모세는 알아야 했다. 어찌 이 뿐인가!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할 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모습이 다 모세와 같이 정결하지 않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정을 씻기시고 정결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첫째 이적을 보고 믿지 않으면 둘째 이적으로 보고 믿을 것이라고 모세를 설득하신다. 모세가 더 이상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가?

6. 세번째 이적 예언(9)
하나님께서는 만일 이 두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 애굽의 나일 강물을 취해서 육지에 부으면 그 물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이적 행함을 예언하셨다. 나일 강은 애굽의 생명의 젖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모세는 앞의 두 가지 이적을 통해서 이 세번째 이적도 틀림없이 그대로 될 것을 믿어야 했다. 이 정도되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반응했겠는가? 모세의 반응을 보자.

7. 모세의 네번째 거절(10~12)
모세는 다시 거절했다. 하나님께서 계속 가라고 명하시고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그를 설득하시지만, 모세는 다시 또 하나의 거절할 수 있는 이유를 갖다 댄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10).” 이 말에도 모세의 불신앙이 충만하다. 그가 ‘주여’라고 할 때 그 주는 야웨(LORD)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앞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위대한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 그냥 쓸 수 있는 ‘주’(Lord)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대답하신다(12). 누가 입을 지었고,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셨냐고 물으신다(11).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모세는 자기가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격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평범하고 연약한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한다. 여전히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잡혀 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다. 이것은 교만이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전 1:27). 그는 여전히 자기의 능력을 믿고 싶어하고 자기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모세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제 모세가 더 이상 피할 구실이 있겠는가?

8. 모세의 다섯번째 거절(13~16)
더 이상 소명을 피할 구실이 없게 된 모세는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13).” 이 말은 노골적인 거절이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께 질문을 드렸고 혹은 자신의 두려움의 이유를 말씀드렸다. 그러나 지금 모세가 하는 말은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거절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모든 질문을 오래 참으심으로 답해주셨다. 그러나 모세의 노골적인 거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셨다.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것과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노를 발하시고 모세를 대신하여 갈 자를 지명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와 함께 갈 사람을 지명하여 주셨다. 모세의 형 아론이다. 아론은 모세의 입이 될 것이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함과 같이 말이다. 모세에게 동역자를 주셨다. 그러나 이 동역자는 분명히 모세와 똑 같은 의미에서 동역자는 아니다. 모세는 그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대면하여 말씀하실 것이고, 아론은 모세로부터 들어야 했다.

9. 하나님의 명령(17)
하나님은 이제 명하신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17).” 다소 이상하게 이야기가 끝나고 있다. 지팡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목자의 비천한 신분의 상징인 지팡이, 그다지 귀하다고 할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지팡이에 하나님께서는 초점을 맞추신다. 이제 이 지팡이야말로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 지팡이가 이적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르며 전쟁을 이기게 할 것이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이 별볼 일 없는 지팡이는 마치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별볼 일 없는 모세 같은 사람이 어떻게 능력있게 쓰임을 받게 될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10. 교훈과 적용

A. 불평에서 자족으로: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하나님은 쓰시지 않는다.
모세가 계속 불신앙과 불순종의 반응을 하는 저변에는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교만이 놓여있다. 이 교만은 결코 만족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메시지의 핵심에는 ‘나’의 존재가 충만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에는 “위대하신 ‘I am’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일을 이루는 것은 나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내가 내 능력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신다. 성패는 내게 달려있지 않고 부르신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 속에 살아가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들을 인해서 시기하고 열등감에 빠지며 살아가지 않는가? 나는 말을 못하고, 나는 배우지를 못했으며, 나는 외모가 잘나지를 못했고……라고 불평하면서 말이다. 누가 지으셨는가?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나 혹은 나의 부족한 어떤 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실 조건은 없다. 우리의 불성실함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의 불성실함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지불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지 못할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명백한 장애라고 할지라도(주님께서 11절에서 직접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심에 있어서 제약이 될 수 없다. 송명희 자매를 기억하는가? 그녀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인간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은 도리어 그녀의 장애라는 한계가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조건이 되지 않았는가?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점에 불과한 이 세상을 장애라는 고통을 안고 살게 하셨지만, 지금 그녀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서 비교할 수도 없는 인생의 장애를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구십 평생을 시각 장애인으로 살았던 Fanny Crosby 여사를 생각해보라. 그녀가 남긴 수천의 찬송시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시각 장애였기 때문에 도리어 영적 시각이 환하게 열려서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그토록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도 역시 지금 주님의 곁에서 자신의 평생에 싸워왔던 시각 장애의 고통을 인하여 도리어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불만은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치유되어야 한다. 우리의 열등감은 하나님의 용납하심 안에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남을 비교하면 불만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자신에게 사로잡혀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도 돌봐줄 수 없으며 결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잘난게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좀 부족한게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을만큼 잘나서도 안되며,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을만큼 못나서도 안된다. 이 둘 다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경우들이다.

B.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불만과 열등감의 문제는 고침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불순종의 과정을 허용하시는 것 같다.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을 쌓아왔던 그 해결되지 않은 불만과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약간은 겸손처럼 보일 수도 있는 자신감의 결여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결여를 두루 표현하고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용하신다! 이것은 단순하고 피상적인 순종보다 값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신뢰에 근거하는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값비싼 순종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의 불순종을 허용하시기도 하신다. 이것은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값싼 순종보다 훨씬 더 값진 불순종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부족하다고 느끼고 부적격자라고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런 의심과 질문의 과정은 긍정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억지로, 힘과 강제로 다루시지 않으신다. 모세가 이렇게 소명 앞에서 한참을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은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할 사명을 위해서 더 분명하게 그를 준비시켜 준 과정이 되었다. 많은 경우에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일차적인 소명?구원에의 소명?을 생각해보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당신은 정직하게 그 일을 생각해보았는가? 당신은 그래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오, 주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주님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보았는가? 주님을 따르라는 소명 앞에서도 우리가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너무나 쉽게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반드시 또 다시 말씀하시고 도전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는 동안에 맡기시는 모든 일과 직분도 마찬가지다. 내가 적합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적격자요, 부족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내가 감당하겠노라고 하는 온전한 순종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필요한 불순종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런 씨름이 당신의 삶 속에 있었는가? 그리고나서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잡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