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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4) - 광야교회의 탄생 -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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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4) - 광야교회의 탄생 -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

출애굽기 3:11-1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9-11-20

말씀내용
1.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길 때 근본적으로 중요한 두 개의 질문이 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이 근본적인 질문들이 쉽게 넘겨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사역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역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주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이다. 그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을 때 던진 5가지 문제 제기 가운데 처음 두 개의 질문이었다. 11절에 “내가 누구관대?”라고 그는 묻는다. “내가 누구입니까?(Who am I)”하는 질문이다. “나는 내가 당신이 명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다. 두번째는 13절에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이것은 “저를 부르시고 저를 보내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Who are you)”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결국 모세가 묻는 것은 “내가 누구입니까?”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는 두 개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제 남은 40년의 인생을 하나님께 붙잡혀서 살아가야 하는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두 개의 질문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첫 머리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참되고 바른 지식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칼빈이 말한 이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통하여 주님을 믿고 섬기고자 한다면 오늘 이 본문이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시작은 늘 그럴 듯 할 수 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보여준 처음의 행동을 주목해보자.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했던 전형적인 대답이다. 이것은 “내가 주의 부르심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또 모세는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신을 벗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고대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근동지역에서는 종의 자세이고,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는 자세이다. 이것은 그가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고 순종하겠다는 태도이다. 시작은 매끄러웠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게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준과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것일까? 이런 섬김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온통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것이며, 자기 사랑, 자기의로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섬김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힐 뿐이다. 이것은 40년 전의 모세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순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고, 이로부터 깨달아 알게 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도 부족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말은 단지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전인격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물어야 한다. 혹시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3. 나를 아는 지식(11)
모세가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한 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표시였을까? 오히려 그의 자신감 결여와 목이 곧아 순종치 않으려는 태도의 중간 정도에서 드린 질문인 것 같다. 무엇이 그의 초기의 순종적 자세를 바꾸어 불순종의 태도로 나아가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내용이 모세에게 주어졌을 때였다. 어쩌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대했을 법한 내용은, “이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모세가 개입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하실 일을 하시지, 왜 모세를 보내시겠다고 하시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여겨진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그것도 부족하고 모나고 답답한 사람을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구원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부르심은 은혜다. 내가 헌신해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모세의 나이 40때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것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쓰시고자 하실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자기 능력의 유무에 의존하지 않게 되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 질문에 대해서 직선적으로 ‘너는 누구다’하는 식으로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대답하신다(12).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사건은 모세의 능력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명확한 선언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으로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는 출애굽의 역사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표적)는 어떤가? 이 증거는 모세가 출애굽을 이루고 이 산에까지 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야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증거(표적)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또 한 번의 도전이고 확증이다. “너는 지금 내가 주는 증거를 믿음으로 밖에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과를 통해서만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신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증거를 주신다. 이것이 “믿으면 보리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자기의 무게 중심을 바꿀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명심할 진리이다. 자신과 자기 능력을 의존하는 사역자와 성도들은 결국 무너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14)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다음 질문을 드린다.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하면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6). 15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도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에서 지적하셨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마 22:31,32).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다 결함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결함많은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왜 그런가?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그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그 은혜언약을 기억하시고 때가 차매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즉시 눈 앞에서 나타나는 증거를 가지고 살며 하나님을 섬긴 종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을 기뻐하셔서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모세는 이제 이 길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그들이 부름받았던 것과 같은 부르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또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이 되면서 중요한 본문을 상고하려고 한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또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답하라고 하셨다. 이 말이 사실상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의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현재와 미래 시제로 번역이 가능하다. 현재 시제로 번역하면 “I am who I am”이고 미래 시제로 번역하면 “I will be who I am”이 된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고 영원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고 존재의 원인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없어도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미래 시제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내 인격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네가 앞으로 미래에 경험하게 될 사건들을 통해서, 네 삶과 환경 속에서 알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의 인격 속에 항상 간섭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그의 미래에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세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삶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맛보고 살도록 네 미래와 삶에 간섭하고 역사하겠다”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맛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참으로 비참한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자리까지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실력을 믿고 잘난 줄 알고 살도록 허락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서 그것이 얼마나 헛된 삶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자기 사랑과 자기 신뢰에서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신뢰로 우리의 걸음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먈로 인생의 가장 큰 힘이요, 능력이며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5.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당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불붙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모세에게 현현하신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여호수아도 비록 모세를 통하여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여리고 가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고 신을 벗게 된다(수 5).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특별한 은헤의 쳬험이 있고 없고는 너무나 중요한 차이이다. 이것이 자기를 아는 지식을 결정하고,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사람의 사역의 내용과 열매를 결정한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것이 전부다. 당신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 어떤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이런 고백을 평생 가지고 살기를 소원하라.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제 평생에 그리고 미래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며 살게 하옵소서. 그것을 맛보고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혜의 근본임을 고백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