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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20). 나를 살리는 신실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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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20). 나를 살리는 신실한 말씀

시편 119:153-160, 출애굽기 3:7-9, 요한복음 5:.38-4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3-15

말씀내용
오늘 상고할 말씀은 시편 119편의 20번째 연(153-160절)입니다. 이 여덟 절은 모두 히브리어의 20번째 알파벳인 레쉬(ר)로 시작합니다. 20연의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19연과 유사합니다. 160절에서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라는 말씀은 152절의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성도들이 대적들로 인해 움츠러들 때 이 영원히 확고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를 살리소서”라는 간구가 세 번 반복됩니다(154,156,159). 이 말은 물리적 죽음에서 살려 달라는 간구라기 보다, 대적들로 인해 침체된 자신의 영적 상태를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침체된 영혼이 생기를 회복하고, 냉랭한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냉랭함의 상태에 오래 살아갈 수 없기에 절박하게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 절박함 속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사 자신을 도우실 것을 보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믿는 성도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153-154; 요 17:14; 딤후 3:12; 출 3:7,9; 히 4:15; 시 35:1-3)
성도에게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153절을 보지요.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53).” 시인에게는 고난이 여전한데, 이 고난은 시인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표입니다.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17:14). 경건하고자 살고자 하는 성도는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딤후 3:12).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고난을 주목하고 동정하시며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애굽기 3:7,9).” 이런 말씀을 기억할 때, 고난 속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보고 계심을 알고 구할 힘을 얻습니다. 더욱이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자신의 고난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시인이 취한 태도는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고난을 통해 자신 안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해야 마땅하고 지금 시인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 소송에서 중요한 것은 변호인의 실력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온갖 오해와 비방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시편 3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편 35:1–3).”
최고의 변호인이신 하나님께서 아무도 반박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변론을 하실 것을 알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변론 하나면 자신을 누르는 불의하고 부당한 비난과 오해로부터 자신의 영혼이 벗어날 것을 알기에 시인은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2.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155,150,151; 요 5:38-40)
하지만 악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고난 중의 성도는 그 말씀을 잊지 않으며 변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악인의 특징은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155절입니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155).”
성도와 악인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지만, 악인은 그 말씀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50-151절에서 악을 따르는 자들이 주의 법에서 멀지만,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주께서 가까이 계시는 사람임을 보았습니다(15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여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38–40).”
주님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주님께로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십니다. 성경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인데, 그들은 성경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주님께로 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적 만족을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지만,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 만족을 하면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의 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말씀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힘든 결혼생활에 지친 40대의 형제에게 “믿음으로 결혼생활을 지키십시오. 길어봤자 30-40년입니다.”라고 권면을 했던 일화를 전해줍니다. 슬프게도 그 사람은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주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의 관점으로 현재와 우리의 인생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 악인은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않지만,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속에서 주의 율법을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3. 많은 긍휼 대 많은 대적 (156-157; 고후 4:8; 1:4-7; 마 9:36; 시 103:13; 사 66:13; 민 23:23)
156절과 157절에서 시인은 두 가지 많은 것들을 대조시킵니다. 156절은 주의 긍휼이 많다고 말하고, 157절에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과 대적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대적이 아무리 많아도, 고난이 아무리 깊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보다 더 많고 넘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린도후서 4:8).”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의 위로가 더욱 넘치고(고후 1:4-7) 그 긍휼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태복음 9:36).” 여기서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깊고 여러분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다고 느껴질 때, 여러분은 이 두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편 103: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이사야 66:13).” 부모들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인지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심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과 같으며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과 같다고 한 표현을 이해한다면, 성도들은 이 두 구절로도 충분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나를 살리소서”라는 간구를 봅니다. 여러분은 이 간구에 얼마나 공감하세요? 그렇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참된 신자의 기도입니다. 빚쟁이들이 몰려오거나 경제적 파산의 위기 앞에서 누구나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지만, 이 간구의 의미는 침체되어 생기를 잃은 자신의 영혼을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참 신자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찰스 브리지스의 말입니다. “참신자와 명목상의 신자 간의 차이가 눈으로 보기에는 미미하게 보여도, 신적 감동 아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크게 불만을 느끼고 거듭 주님께 간구할 필요를 의식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간구하는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맺어진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이,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시인은 대적이 많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많은 대적들은 하나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많은 대적들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께 더욱 바짝 나아가게 되고 피난처와 도움이 되시는 구주께 자신을 드리게 되고 주님이 최고의 위로의 원천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핍박을 받을수록 더 번성하고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름을 받았던 발람이 한 말도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민수기 23:23).”


4. 역겨움과 사랑 (158-159; 겔 33:30-33; 사 29:13; 마 15:8-9)
158-159절은 성도의 마음의 양면을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158절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슬퍼하였다’는 표현은 ‘역겨웠다, 혐오스럽다, 불쾌했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이 역겨워 한 대상은 단지 불신자들이 아니라, 거짓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주의 말씀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역겨움을 느낀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시인은 저들은 어떻게 그토록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며 하나님께 불성실할 수 있단 말인가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등장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에스겔 33:30–33).” 그들은 에스겔에게 설교를 듣고 싶다고 했고, 설교를 잘 한다고 했지만,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냈지만, 실제로 그들은 사익을 추구하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여(사 29:13) 이런 위선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15:8–9).”
이런 위선과 거짓이 교회 안에 만들어내는 결과는 얼마나 무서운지요? J.C.라일의 말입니다. “공개적인 죄와 불신앙은 의심할 여지없이 수천 명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고백은 수만 명을 죽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거짓된 자들을 역겨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역겨움과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159)”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고백을 잘 보십시오. 시인은 자기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시라고 말하면서도,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향한 제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제 마음이 지금은 그렇게 활활 타오르고 있지 않으니 저를 살려주세요”하는 간구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향한 성도들의 근본적인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이 냉담하여 불타오르지 않을 순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이런 상태에 있는 신자들을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냉담함을 의식할 때마다 믿음으로 다시 살리심으로 받는 은혜를 구하여 뜨거운 마음을 갖는 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하루에 백 번이라도 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루에 백 번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짧은 20연에서 세 번이나 “나를 살리소서”라고 반복하여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심령의 부흥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 영혼이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뜨겁게 타오르게 하옵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열정을 회복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이런 부흥의 역사는 보통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5. 심령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 (160; 롬 8:1; 시 48:14)
끝으로 16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의롭고 영원토록 유효한 말씀인지를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160).” 20연의 결론입니다. ‘강령’은 ‘시작, 근원, 머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그리고 모든 말씀이 다 진리이고 의로우며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진리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말씀은 확고부동하고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특히 고난의 자리에서 의지할 만한 약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완전히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도의 모든 평안과 위로의 근거가 됩니다. 성도는 모든 고난 속에서도 그 약속의 말씀을 인하여 영광스러운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짓누르는 자책과 정죄감 속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유함을 얻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염려의 상황에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편 48:14).”는 말씀으로 평안과 위로를 되찾습니다. 시인은 “나를 살리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자기 심령의 부흥을 구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의 심령을 부흥케 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찰스 스펄전의 말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됩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말씀하신 순간부터 참이었고, 역사 전체에 걸쳐 참이었고, 우리가 믿은 순간부터 참이었고, 우리가 믿기 전부터 참이었습니다...성경은 창세기만큼이나 요한계시록만큼이나 참이며, 모세오경은 사복음서만큼이나 영감된 책입니다. 계시록이나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단 한 줄의 정오표도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후회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으며, 수정하거나 되돌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토록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과 위로를 누리십니까? 그 말씀이 자신의 심령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편임을 알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로 나아가십니까? 여러분은 냉랭하고 냉담한 심령의 상태에서 나를 살려 달라고 백 번이라도 간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찬송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의 3절 가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 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 말씀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성도의 심령을 살리는 열쇠가 주의 약속과 그 말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나를 살리소서”라고 구하고 또 구하십시다. 냉담한 심령의 상태로 이틀을 살지 마십시오. 구하는 자들을 주께서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살리는 신실한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