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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 - 나쁜 상황이 악화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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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 - 나쁜 상황이 악화될 때

출애굽기 5:1-2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9-12-18

말씀내용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함께 하나님께 머리숙여 경배함으로써 모세의 마음은 믿음과 용기가 충만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가라앉지 않던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졌겠는가? 이제 그는 아론과 함께 바로의 왕궁으로 직행하였다(1). “그후에”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고 난 후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왕궁으로 간 것을 보여준다.

1. 모세와 아론이 보여주는 믿음의 용기: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모세와 아론이 여기서 보여주는 용기 백배의 모습과 신앙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지만, 신앙의 여정이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임을 모세는 배워야 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처음에는 듣지 않을 것임을 이미 말씀하셨다(3:18~20). 그러나 종종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뭔가 하나가 잘 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기운으로 나머지도 다 잘 될 것이라고, 우리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하게 가르친다. 우리 식으로 승승장구하는 것만이 신앙의 여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이런 장애물을 만나고야 만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당당하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고 말했다(1). 여기에는 이 세상의 왕권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의 담대함이 흐르고 있다. 모세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지금 한 왕 앞에 서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2. 바로의 태도: “여호와가 누구관대”(2)
바로의 태도는 결코 의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의 거절은 모세와 아론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로의 거절의 핵심은 이것이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것이다. 비록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백성을 보내라고 바로에게 명했지만, 바로 자신은 그가 복종해야 할 권위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그것이다(2).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싸우는 싸움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안다. 그분의 권위와 그 말씀 앞에서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비기독교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분의 말씀 앞에 왜 복종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는다. 자, 이제 모세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3. 관점: 바로와 모세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와 하나님의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가르쳐주시는 것은 이 싸움이 바로와 모세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도 종종 혼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비기독교인들과의 문제가 단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문제라고, 이 둘 사이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종종 이런 경우에 바로와 모세가 아니라, 바로와 하나님 사이의 싸움이라고 가르쳐준다. 아니 바로의 배후에 있는 마귀와 하나님 사이의 영적 전쟁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지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을 향한 우리의 감정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특별히 이 상황에서 바로는 물론 그 배후에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성경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이 바로 뱀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를 대표한다. 이것은 자기의 왕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바로와 천지의 창조주요 주재가 되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사이의 싸움이다. 모세는 이제 점점 그 사실을 깨달아가게 된다. 바로가 거절하는 것은 모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바로는 “네가 누구길래”라고 묻지 않는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묻는다. 그가 시비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다. 모세의 권위가 아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을 잘못 오해함으로써 말려들곤 하는 것을 본다.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분명히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요 15:18~19). 만일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사람에 대한 증오와 미움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4. 나쁜 상황이 더 악화될 때: 이스라엘 패장들이 보여주는 불신앙
모세 자신은 이제 시작이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시는 것을 배워갈 것이다. 비록 모세 자신도 엄청난 혼란을 겪지만 그는 하나님을 배워갈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바로는 교활했다. 바로는 단지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상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의 근원을 잘라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을 더욱 단단히 옥죄어서 다른 생각을 아예 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모세의 말이 그들을 선동하기 보다는 거짓말일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역을 감독하는 자들(간역자들)과 패장(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중간 관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리하도록 세운 십장들)에게 오늘부터 벽돌을 만들기 위해서 주어지던 지푸라기는 제공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얻어다가 벽돌을 만들되 할당량도 똑같이 채우라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자료는 당시 애굽이 신전을 제외하고는 다 지푸라기를 섞어서 만든 흙벽돌로 건축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던 당시에 지은 것을 알려진 건축물들 가운데서는 짚이 들어있지 않은 벽돌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여간 상황은 그전에도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 악화되었다. 이것은 단지 전망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서 느끼는 조건이 악화된 것을 말한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들고, 그들의 이전의 삶 자체가 더 좋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바로의 교활한 술책이었다.
A. 바로에게 호소하다(15).
결과는 뻔했다. 그런 고역에서 동일한 할당량을 채울 수 없었다. 이스라엘 노예들을 감독하는 감독자들은 이스라엘 출신 패장들을 때리면서 채우라고 요구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이스라엘 패장들에게는 매우 의아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대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래도 애굽인들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대단한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주인인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이 잘못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기들을 때리는 감독자들의 잘못을 바로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들은 자기들의 주인은 바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다고 말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주인은, 자기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자는 바로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명목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실제 주인은 바로였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바로에게 나아간 이유다. 그들은 바로를 오해하고 있다. 자기들의 주인은 자기들을 선대하는 자라는 오해가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근거가 무너지기에 그들은 적어도 바로는 좋은 분이라고 믿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잘못된 일의 책임은 자기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감독자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B.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다(21).
이스라엘 패장들의 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에게 호소한 것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고, 이것이 모세와 아론으로 말미암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로의 계산대로 모든 일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일이 과연 모세와 아론으로부터 비롯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인가? 또 지금의 이 악화된 상황을 만든 직접적인 존재는 하나님인가, 바로인가? 이들은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아니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바로의 왕궁에서 나와서 모세와 아론을 만난 이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 이것이야말로 상황이 악화될 때 우리가 보통 취하는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닌가? 우리는 이 일을 초래한 어떤 사람을 찾아내서 비난함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풀고 싶어한다. 그것은 부모일 수도, 자식일 수도, 혹은 배우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생각해보라. 과연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는 것은 합당한 반응인가?

5. 교훈과 적용
이 본문은 다른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 우리 역시 인생에서 상황이 좋지 않은데 더 악화되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이미 자신의 인내가 바닥이 나고 있는데,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상황 말이다. 이 때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신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며 또는 우리의 신앙이 지푸라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합당한 반응인가?

A. 나쁜 상황이 악화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스라엘 패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자기들의 편안함이었다. 자기들의 삶에 편안함을 주는 것은 선한 것이고, 편안함이 깨어지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이런 기준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서 보여준 삶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권세를 가진 분은 누구인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의 생사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입장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둘째로 어디서 비롯된 일인가를 생각하라. 언뜻 보면 모세와 아론에게서 비롯된 일이다. 그러나 더 깊게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려고 하심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악화된 상황을 초래한 직접적인 존재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이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가”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신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런 악화되는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자이거나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선한 의도?우리를 죄의 종에서 구원해주시고자 하시는?를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귀는 할 수 있는대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흔들려고 애를 쓴다. 바로가 지금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결론은 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귀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의 위기로 내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내가 바닥이 나는 상황의 악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말한다든지, 영적 조언을 준 어떤 사람을 향해서 비난을 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것은 아니다. 이만큼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신자이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B. 구원의 교리: 마귀는 싸움없이 영혼을 내어주지 않는다.
본문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해주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싸움은 바로 마귀와 죄의 종이던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중립의 상태에서 자유를 구가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다. 주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고(요 8:34), 믿기 전에는 모두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살았다(엡 2:2).” 마귀는 결코 한 영혼도 그냥 내어주는 법이 없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마귀가 결국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치시기 전에는 결코 한 영혼도 내어주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일어난 일도 동일한 일이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모세와 같이 이 싸움에 순종하여 나갈 것인가? 이 싸움은 모세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이 싸움을 감당하겠는가? 이것이 단지 자신의 편안함에 안주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부르셔서 그런 삶에 묶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다. 당신은 이 싸움에 끼어들겠는가?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4:01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