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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7) - 무교절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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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7) - 무교절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

출애굽기 12:15-5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5-07

말씀내용
출애굽기 12장의 남은 본문은 우리에게 무교절 규례와 출애굽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것은 구약 광야교회의 탼생 스토리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기점으로 430년의 오랜 타향살이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출발한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냥 지나치기 쉽고 또 그렇게 해온 한 규례에 대해서 읽게 된다. 그것이 무교절의 규례이다. 유월절은 아는데, 무교절은 무엇인가? 유월절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 무교절을 여기서 명하셨는가? 그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시는가?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들이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상고하면서 살필 주제들이다.

1. 유월절과 무교절이 왜 연결되었는가?
무교절이 어떤 절기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이 무교절이 유월절과 연결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유월절이 1월 14일이면, 무교절은 14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이다. 종종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이름은 서로 혼용되어 왔다(눅 22:1). 이 두 절기는 분명히 그 의미상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하나의 절기와 같이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우리들에게 이것은 늘 낯선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무교절을 상고하기 전에, 유월절의 의미를 먼저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A. 유월절과 구원
유월절은 분명히 구원의 사건이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들을 보호하셨다. 여호와께서 어린 양의 피가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려진 모든 이스라엘 집을 넘어가셨다. 어린 양의 피를 인하여, 그 피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월절 의미의 중심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했다(고전 5:7). 이스라엘 백성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애굽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그들됨 때문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것은 단번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다. 결코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과정이라기 보다는 단번에 그리고 순간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다. 이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 구원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B. 무교절과 거룩한 백성의 ‘구원 그 이후’
무교절은 이날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유월절의 구원 사건과는 달리, 일주일 동안 행해져야 하는 절기로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절기였다. 유월절이 여호와께서 ‘넘어가셨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면 무교절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무교절은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 식사는 그 어떤 때의 식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긴장과 서두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날 잡은 유월절 어린 양을 가족들이 모여서 먹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와 함께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다(12:8). 그들은 쓴 나물을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노예 생활을 고역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이 쓴 나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그리스도 밖에 살던 시절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가 받아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대신 받아 마셔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이 쓴 나물의 의미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서 마셔주신 고난의 잔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없는 희락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신자는 늘 거기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으려 하며, 생각하려고 해도 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인 인식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얻는 유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신약 성경 서신서의 모든 가르침을 엄밀하고 정직하게 살펴보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 신자들의 삶의 가장 큰 능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가득하다. 바울 사도 자신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으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난을 기쁘게 감당할 힘을 얻었고, 또 그렇게 사는 비결을 디모데에게 가르쳤다.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가장 큰 유익임을 가르쳤다. 요한 사도의 서신서 뿐 아니라 계시록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주목한다.

유월절 식사의 무교병은 무슨 의미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 밤 빵을 부풀릴 수 있는 누룩을 사용해서 빵을 만들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12:33~34, 39). 그들은 급히 먹어야 했고, 그것은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칠하고 불에 구워서 먹는 것 하나로도 충분히 분주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밤에 먹을 빵은 유교병이 아니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이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들어가게 될 참이었다. 이것은 생각보다는 긴 여정이 될 것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먹을 당장의 음식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또한 상하지 않아야 했다(적어도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떡을 공급해주실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미처 떡을 준비하시지 못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무교절을 지키면서 백성들이 스스로 준비한 떡을 먹으라고 하신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이 무교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교회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이 있었다. 그것이 바울 사도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6~7).

바울 사도는 이 구절에서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이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음행인데, 이것은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부도덕한 죄악이 일어났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 사도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교훈을 구약에서 꺼내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교회가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나 무교절로 들어갔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후에, 누룩 없는 존재로서 모든 묵은 누룩을 다 내어버려야 했다. 여기서 누룩은 성경 전체가 전반적으로 강조하듯이, 죄와 악을 상징하고 있다. 유월절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누룩이 머물 자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음행의 사건을 바르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게 될 때, 이 적은(적어 보이는) 누룩이 어느 새 온 교회를 더럽히게 되고 말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유월절 그 날로 시작하여 일주일의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일주일 만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체가 다 무교절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 개인 신자에 해당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과 훨씬 더 깊은 관련을 가진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하는 목적을 가진 구원이다. 성화 없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칭의는 성화를 가져온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유월절은 무교절을 가져온다. 유월절이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설명한다면, 무교절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재, 성화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은 무교절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이 하나님께서 무교절 규례를 주시면서 누구든지 누룩 있는 것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고 무섭게 경고하신 이유다(12:15, 19). 그것은 어린 양의 희생을 무색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멸하는 것이다.

2. 절기: 신앙에 있어서 기억의 중요성
유월절과 무교절은 그 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자손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12:24, 25).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출애굽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이 태어나서 이 절기를 지킬 때, 그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면, 그 의미를 설명해 줄 것을 명령하셨다. 일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다. 이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구원하여 주신 그 위대한 은혜를 기렸고, 그에 따라서 살게 된 교회의 삶이 얼마나 세속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거룩한 곳,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신앙 생활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어떤 학자는 교회가 가진 가장 확실한 질병은 영적 기억상실증이라고 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기억할 수 있는 장치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많이 주셨다. 절기가 그 중 하나이다. 그들은 해마다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했고, 이 기억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었다.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새로운 세대들?출애굽을 실지로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도 그들의 출애굽을 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3.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노예집단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41, 51)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첫 유월절 그 밤에 서둘러서 애굽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들이 서두를 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때문이다. 그 밤에 바로는 자신의 장자를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들의 죽음이 모세의 경고대로 이루어진 것을 본 즉시, 모세와 아론을 급하게 불러서 나가라고 하면서, 자신을 축복해줄 것을 요구했다(12:31~32).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재촉하여 애굽에서 속히 내보내려고 하였다.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란 존재는 지금 그들에게 저주가 되고 있지 않은가? 왜 그런가? 그들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니”(창 12:3). 자신들이 함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던 존재들이 더 이상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이 상황은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하는대로 애굽 사람들은 물품을 공급해주었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애굽에서의 무상 종살이에 대한 대가를 한꺼번에 받은 것이다. 모세에게 약속하신대로만 아니었다(출 3:22).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였다(창 15:14). 이 모든 것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상의 이런 연유로 그 밤에 서둘러 애굽을 나와야 했다. 그 날이 바로 430년이 마치던 그 날이었다고 성경은 부연하고 있다(12:4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얼마나 정확한가!

이렇게 서둘러 나온 집단은 결코 노예들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성경은 특이한 단어로 이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군대’라는 말이다. 41절과 51절에 반복해서 사용되었다. 이 말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군대다. 이제부터 그들은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군대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 오랜 세월 훈련을 받은 후에야 군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직후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딤전 2:3).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치면서 바울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무장’을 명령하였다(엡 6). 왜냐햐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이다(엡 6:12). 구약과 신약은 철저하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어제의 노예들이 아니었다.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고 누룩 없는 거룩한 백성이 된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군대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교회의 신비가 있는데, 오합지졸인 듯 보이지만, 엄연한 하나님의 군대인 것이다.

4. 유월절이 하나님의 군대의 기초이고, 무교절은 하나님의 군대의 최고의 무기다.
이 하나님의 군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어떻게 모집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군대는 유월절을 지나 무교절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군대는 거듭남으로 가입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남자이기 때문에,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가입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거듭남으로 가입된다. 그리고 그 거듭남의 사건이 유월절로 표현되었다면 그 군대는 거룩함으로 유지되고 강화되고 전쟁을 치루는 군대다. 이것은 무교절로 표현되었다. 그 군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룩함이다. 그 군대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거룩함이다. 만일 그 군대가 거룩함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군대로 기능을 할 수 없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군대의 기초이고, 무교절은 하나님의 군대의 최고의 무기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이 하나님의 군대인 죠이선교교회를 세워가는데 따르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해야 하는가? 왜 이렇게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은 힘이 드는가? 광야 교회의 탄생 이야기를 읽어보라. 10번의 재앙이 광야 교회의 탄생의 배경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모세를 낙심하게 했고 백성들을 지치게 만드는 싸움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지만, 그것은 단번에 거저 얻은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엄청난 전쟁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가는 과정, 탄생하는 과정은 결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유월절을 지나서만 세워진다. 그것은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유월절이다. 그리고 교회는 무교절을 통해서 계속해서 영광스럽게 세워져 간다. 구원받은 사람들, 성화의 은혜를 입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는 영광스럽게 세워져가고,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 싸움을 감당하게 된다. 복음의 진리를 흐리게 하는 마귀의 모든 궤계를 이기게 된다.

광야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각하게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힘을 더하시고,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향한 한 없는 기도와 섬김과 싸움으로 우리를 더욱 사용해주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