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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6) - 첫 유월절의 그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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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6) - 첫 유월절의 그 피

출애굽기 12:1-1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4-30

말씀내용
우리는 본문에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건을 만난다.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했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가장 놀라운 구약의 예표적 묘사다.

1. 유월절의 어원과 사건의 근거
유월절(Passover)이란 말은 본문인 출애굽기 12:13, 27에서 나온 단어에서 왔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13).” 이 ‘넘어간다’는 것은 죽음과 심판을 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한 말씀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그것은 출애굽기 4:22~23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에게 할 말을 미리 알려주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모세가 당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였을까?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신 이 유월절의 무서운 심판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장자를 죽인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유월절 장자들의 죽임 사건이다(1:22). 우리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좀 더 세밀하게 유월절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별
하나님께서는 앞서 바로 앞에서 모세가 전한 말 속에서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을 구별하시겠다고 하셨다(11:7). 그러나 실상 이 구별은 앞에서 주어졌던 재앙들 속에서 구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앞의 재앙들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의 해가 미치지 않게 역사해주셨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애굽인의 구별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해주신다. 이를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것이 유월절의 규례다. 본문 1~20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어 백성에게 명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21~28절은 모세가 백성의 장로들에게 그 말을 전하였고 백성이 순종하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무엇인가? 유월절이 있는 그 달, 즉 아빕월(혹은 니산월?니산월은 바벨론 포로후에 바벨론의 명칭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을 해의 첫 달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구원의 사건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이다.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생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새 출발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성경은 바로 이 새로운 삶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나님의 두번째 지시는 어린 양을 취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달 열흘에 해야 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이런 준비가 미리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그 달 열흘에 어린 양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지시 자체도 유월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멸하지 않고 지나가시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사항이라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의 경중을 평가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어린 양은 각 사람에 한 마리가 아니라, 각 가정에 한 마리를 잡아야 했다. 만일 가정의 수가 어린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적다면 다른 가족과 합하여 한 마리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은 흠이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서 양이나 염소 다 무방했다. 세번째로 이스라엘 사람들은14일이 시작되는 저녁 해질 즈음에 이 예비된 어린 양을 잡아야 했다. 양의 피는 그릇에 담겨져서 우슬초 묶음을 담가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하셨다(12:7, 22). 22절에서는 특별히 우슬초 묶음으로 피를 찍어서 뿌리라고 했는데 우슬초는 언제나 정결의식에서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네번째는 그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는 것이다. 물론 쓴 나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겪은 고초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 식사에 있어서 추가적 사항은 그 고기를 아침까지 남기지 말고 만일 남았다면 불에 다 태우라는 것이다. 분명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이것은 그 고기의 거룩함 때문일 것이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밤에 식사할 때, 허리에 띠를 띠고(식사를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식사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밤에 그리고 식사 후에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과 같다.

3. 구별의 근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을 구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지만, 여기서는 이런 상세한 요구를 하시는 것인가? 과연 이 요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의 구별의 근거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아무 행한 일도 없이, 아무 원인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마,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그러나 이것이 정말 그런 것인가? 세례 요한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주님께서 지상에서 가르치셨던 그 때 유대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구원의 근거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내세우지 않았는가? 성경은 보다 분명하게 그들의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호한 구석이 없다. 그 구원의 근거는 피에 있었다. 이스라엘 집의 장자가 하나도 죽지 않고 해를 받지 않은 이유는 오직 그들이 잡은 어린 양의 피, 그들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피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재앙들로부터 아무 해도 받지 않은 이유, 근거는 오직 여기에 있다. 이 피 때문이다. 이 피의 능력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에, 어느 새 애굽에 동화되어서 애굽의 신들을 섬기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정착하여 숨을 거두면서 그의 유언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하나님의 심판이 죄에 대한 심판이라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도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에는 그 심판의 죽음이 임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심판을 위해서 애굽 온 땅을 지나가실 때, 이스라엘 집에서 보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그 집의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칠해진 피였다.

그날 밤 죽음이 모든 애굽의 장자들에게 미쳤다. 장자는 단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개념일 뿐이다. 이 심판은 하나의 예고편일 뿐이다. 마지막 심판은 이 비참한 예고편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스라엘도 이 심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러나 그들을 심판에서 면하게 한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을 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양을 잡으려고 하는 바로 그 시각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였다(고전 5:7). 첫 유월절에 이스라엘 집의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예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때 주목하신 표적은 사람의 선행이나 자기의, 인격이나 품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때 주목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신 표적은 오직 하나, 어린 양의 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어린 양의 피다. 그리고 이 어린 양의 피는 단순히 어린 양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예표다. 그래서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이것을 정확하게 지시한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어린 양을 언급할 때, 한 번도 복수로 사용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단수가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회중에게 잡으라고 하신 어린 양의 수효는 많았겠지만, 그날에 죽은 어린 양들은 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가 칠해진 이스라엘 집을 그냥 넘어가신 것은 그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의 집에는 이미 심판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어린 양에게 행해졌고, 그 어린 양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미 심판이 행해진 곳에 하나님은 이중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그 피에는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찬송할 때, 그들이 믿고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4. 피가 가진 물리적, 마술적 효력이 아니라, 피를 보는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피가 가진 어떤 물리적 혹은 마술적 효력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피의 능력은 그 자체에 있는 어떤 효력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첫 유월절을 지키는 상세한 규정들을 지시하셨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하고 들었겠는가? 그들은 서둘러 먹어야 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식사를 마치는대로, 애굽의 장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바로 430년이나 살던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으로 가게 될 것을 믿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어린 양, 피 바름, 식사들이었지만, 정작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지시사항을 따라서 행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믿음이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다. 약속대로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내실 것이다. 그들은 곧 떠날 것을 믿고 신을 신고 선 채로, 띠를 띠고 서둘러 식사를 해야 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이 모든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의식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믿음 밖에 없다.

5. 믿음은 피에 대한 미신적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믿음은 피에 대한 막연하고도 미신적인 믿음이 아니다. 유월절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한 단어를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27절에 ‘유월절 제사’라는 말이다. ‘여호와의(여호와께 바쳐진) 유월절 제사(희생)’이다. 이 말은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하나의 제사로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월절은 본질적으로 희생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피를 흘려야 할 경우,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그 동물이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진다는 개념 속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레 17).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다(레 17:11).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바로 레위기에 대한 설명이다. 죄의 속함(사함)은 죽음으로써만 해결되는데, 그 죽음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다 흘려짐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에 죄용서는 피흘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에 나타난 희생제사의 의미다. 자기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피, 그날 저녁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를 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피에 대한 미신적 믿음이 아니라, 나도 이 피가 없이는 애굽 사람들과 동일하게 죽음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이 피가 흘려지고 어린 양이 내 대신 죽음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유월절에 죽은 그 어린 양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바로 오실 메시야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단순히 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근거에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바라고 나아가는 믿음이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의 특성이다. 하나님께서 피를 볼 때에 넘어간다고 하셨듯이, 나도 피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가치와 능력을 아시듯이, 나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가치와 능력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기에 너무나도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알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곧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결코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하는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 피가 증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나는 그 사실을 전적으로 알고 신뢰한다”고 말이다.

6. 숨을 곳은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
오늘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그 피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어린 양의 피를 취하여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그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습니다. 내가 심판을 받아 피흘리고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주님께서 대신 서신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천국문에 이를 때, 천국문에 우리를 들여보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선행과 인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신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더러운 죄악들을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를 보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의 삶에, 당신의 의복에, 당신의 온 몸에, 당신의 심령에 발려져 있는가? 당신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옷을 씻은 사람인가? 숨을 곳은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밖에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면할 길은 그리스도의 피를 내 몸에 바르는 것 밖에는 없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