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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5) - 재앙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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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5) - 재앙6

출애굽기 11:-1-10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4-23

말씀내용
오늘은 마지막 재앙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는 출 11장을 살피면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의 힘든 과정이 우리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주는가를 정리하려고 한다. 출애굽, 430년의 타향살이, 노예살이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시마 약속하신 땅으로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의도에서였다. 출애굽은 신약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신앙 생활에서 배워야 하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진리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쳐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신자가 가지는 가장 큰 싸움은 바로 죄와의 싸움이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로마서 6장과 7장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바울 사도는 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성도가 얼마나 고통을 당할 수 있는지, 그러나 성도는 그 모든 싸움에서 본질적으로 승리한 자인지를 보여준다.

1. 구약성경은 신약 교리의 역사적, 실제적 예화들이다.
먼저 로마서 6:1~11을 읽어보자. 이 구절에서 설명하는 죄에 대한 죽음은 신자의 근본적인 위치, 신분을 설명해주는 단어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신자들은 죄와의 싸움에서 종종 지고 괴로워하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죄가 얼마나 치열하게 신자들을 찾아오고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가를 보여준다. 그 말씀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가 바로 출애굽기이다. 구약성경은 신약 교리의 역사적, 실제적 예화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치신다.

2. 죄의 세력에서 자유를 얻는 것은 쉬운 싸움이 아니다.
모세가 처음에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는 완강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떠들었다. 그에게서 조금의 설득도, 두려움도, 떨림도 발견할 수 없었다.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서 첫 번째 이적인 애굽 사람들의 젖줄이라고 할 나일강이 피로 변케 되는 재앙으로부터 태양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로에 대한 상징적 심판을 의미하는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앙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다 바로의 밑에서 종 노릇하던 자들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 죄의 종이었다고 선언한다(롬 6:6; 요 8:34). 죄에서 놓임을 얻는다는 것, 죄의 주인인 마귀의 세력에서 놓임을 얻는다는 것, 구원의 사건은 결코 무혈 입성하는 전쟁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저 얻는 구원의 교리가 너무나 많이 오해된 나머지 값싼 은혜, 싸구려 구원을 양산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성경은 어느 한 곳에서도 구원의 은혜가 거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도의 구원에 대한 최고의 역사적, 실제적 예인 출애굽 사건도 어린양의 피흘림, 그리고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을 통해서야 주어졌다. 우리가 알듯이 바로는 비록 장자들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었지만, 다시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어리석은 신화를 버리라. 출애굽이 피흘림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되었다면, 우리의 영적 구원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서,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성취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이것이 복음이다)를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성경적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알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실로 분명하게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런 죄의 세력과의 싸움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자신에게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또, 여러분 자신의 삶 속에서 여전히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 실존한다는 것과 그 싸움을 싸우고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슬픈 사실은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가진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우리의 신앙은 끈질기게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요구한다.
우리의 신앙은 끈질기게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요구한다. 신자에게는 이런 싸움이 있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설명한다(롬 6:2). 하지만 이 말은 죄 자체가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죄는 살아있고, 강력하며, 설득력 있는 거짓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사는데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 육신도 죽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 안에 있는 죄(혹은 죄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생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흠도 점도 없는 의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끈질기게 방해하는 죄의 세력과의 싸움을 요구한다. 이 싸움은 도덕적인 양심의 괴로움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신자 안에 존재하는 죄의 세력의 전쟁이다. 이 싸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는 싸움이다.

그러기에, 실제적인 면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전제는 이런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잘 해보려고 결심을 한다면, 그 결심을 지키고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옆에서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잘 하도록,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변 환경들이 받쳐주지 않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내 속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다. 안팎으로 할 수만 있다면 마귀는 우리의 신앙 생활 자체를 흔들고 넘어뜨리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바로가 어떻게 행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감찰하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실 것을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알렸을 때 그들은 믿었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출 4:29~31). 그러나 바로는 더 혹독한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이르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고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쉬운 것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쉬운 것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죄와 그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우리가 죄의 종이었다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거저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신 게 고작 이런 것인가라고 말이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탄탄대로로 형통과 성공이 가득하고, 갈등과 고난은 존재하지도 않고 다 비껴가는 그런 삶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신앙 생활을 잘 하려고 하면, 그리고 당신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만큼 당신을 넘어뜨리려는 존재, 당신의 영적 부요함을 깨뜨려버리려는 존재가 당신의 안과 밖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는 한 번의 재앙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나라의 경제가 다 거덜날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항복하지 않았다. 열 번의 재앙으로 자기의 장자를 잃어버릴 때까지 그는 버텼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는 추격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았다.

4. 어떻게 싸울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출애굽기의 본문들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고소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마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바로가 보여주는 특징들은 무엇인가?

A.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다.
주님께서는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 마귀는 거짓으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세상을 미혹하게 해서 멸망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계 12:9). 많은 사람들이 영적 싸움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그것이 능력의 싸움(Power encounter)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을 받아야 하고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야말로 마귀가 온 교회에 퍼뜨리고 싶어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인 삶 속에서 죄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도 무슨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이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것은 진리로 이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요 8:32).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능력이나 특별한 은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진리야말로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대적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무기이다. 사단의 능력은 거짓말에 있고 신자의 능력은 진리를 아는데 있다. 우리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바로는 모세가 한 말을 거짓말이라고 단정했고, 그 거짓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출 5:9).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것을 읽고 듣고 배울 때,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귀에 속삭인다. “그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말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은 목사님이 현실을 잘 몰라서 하는 말씀”이라고 일축해버린다.

사단이 하는 것 중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거짓에 근거한 협박이다. 바로가 이스라엘백성에게 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지푸라기를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던 수효대로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채찍질도 했다. 이것은 더한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마귀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행한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에 비유했다(벧전 5:8). 마귀는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도록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면서 신자들을 위협한다. 때로는 이상한 꿈으로, 때로는 불길한 생각으로 말이다. 이런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더 큰 소리를 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단지 진리로 이런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믿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호된 위협과 거짓말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발벗고 나서서 바로와 싸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은 일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 6:6~8)”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만이 요구되었고, 그들은 진리를 믿음으로써 바로의 모든 거짓 어린 협박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타협안을 제시하곤 한다. 이것이 바로가 보여준 시도들이다. 그는 어린애들은 두고 가라고 제안했고, 가축들은 놓고 가라고 제안했다.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모세는 그와 타협하기를 거절했다. 이것도 역시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대로 믿는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적당히 물을 타고 섞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을 요구한다. 믿지 않는 말씀에 어떻게 복종하겠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B. 십자가가 승리의 근원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확인해야만 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우리가 어떤 진리를 믿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낙심이 될 때, 우울증이 찾아올 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두려움이 찾아올 때, 염려가 차오를 때...이런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상황,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각각의 진리는 어떤 것들인가? 어떤 성경 구절들을 각각의 상황에 맞게 외워야 하는가? 물론이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진리를 기억해내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는 말씀에 있다(고전 15:3,4).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 모든 죄와 그 형벌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주님께서 그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죄 자체가 되셨다(고후 5:21). 그러나 주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셨을 때에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승천하셨을 때도 죄가 없으셨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해계신다. 바울 사도는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고 선언한다(엡 2:4~5). 이것이 복음이다.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으려고 애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에 믿는 우리도 그날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이 일어난 사실을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마귀와 죄에 대하여 싸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은 비참하고 열매 없는 삶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바로의 거짓말과 협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다는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실제적인 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5. 교훈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A. 승리의 열쇠는 행위가 아니라 신분에 있다: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
첫째는 승리의 열쇠가 행위가 아니라 신분에 있다는 것이다. 보라. 이스라엘의 해방에 있어서 행위자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여기서 구원의 행위를 하시는 분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한 가지 소중한 진리는 승리가 주어지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행위 때문이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과 구별되고, 그들이 해방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선함이나 그들의 공적이나 그들의 성실함 때문이 아니다. 오늘 본문의 5~7절을 보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곡성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이나 짐승에게 아무 해도 없을 것이며 개가 혀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시는 분”임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출 11:7). 이스라엘의 구원의 이유와 원인은 단지 그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입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야 한다.

B. 우리의 몫은 행위 이전에 믿음이다: 백성들이 해야 하는 몫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몫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몫은 우선적으로 이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능력을 받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행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여러분이 낙심이 될 때, 우울증이 찾아올 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두려움이 찾아올 때, 염려가 차오를 때…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처음에는 애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신반의하면서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별하시면서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요구된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래서 마지막 재앙이 이르렀을 때,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출 12:28). 요구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나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