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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4) - 재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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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4) - 재앙5

출애굽기 10:1-29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3-19

말씀내용
1. 메뚜기와 흑암 재앙의 개요
오늘 우리는 10가지 재앙 가운데 여덟번째 메뚜기 재앙과 아홉번째 흑암 재앙을 보게 된다. 어쩌면 지리해 보이기도 하는 재앙을 계속 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거듭해서 밝혀주신다.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시려는 의도다(2). 당신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하나님의 의도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서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는 것이 영적인 지혜요, 분별력이다.

우리는 메뚜기 재앙의 경고에서 바로에게 물어진 두 개의 질문을 본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는 것이다(4). 두번째는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한 말이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7)?” 둘 다 바로의 고집에 대한 말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고집이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를 성경은 보여준다. 하나님에게 고집을 부리는 것은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 고집을 부리고 살아간다. 이미 애굽의 경제는 거덜났다. 우박은 애굽의 농작물을 다 휩쓸고 지나갔고 그 남은 것은 메뚜기들이 다 먹어치울 것이다. 바로의 신하들은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바로에게 묻는다. 그래서 바로의 신하들은 모세의 경고를 믿을 수 밖에 없었고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자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누가 갈 것인지를 물었다.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다는 대답에 바로는 남자 어른들만 가도록 허락했다(11). 이것은 전혀 허락이 아니었다. 바로의 의도가 무엇인가? 애굽 전역의 모든 농작물은 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고센 땅에는 조금의 해도 받지 않은 농작물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결국 메뚜기떼가 일어나서 남은 모든 농작물을 먹어 치웠을 때 바로는 다시 회개의 태도를 보였다(16~17). 모세는 정말 바로에게 신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의 회개는 역시 참된 회개는 아니었다.

이어서 하나님은 흑암의 재앙을 주셨다. 흑암은 다가올 장자들의 죽음과 바로와 그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게 될 죽음의 전주곡이다. 이것은 또한 태양을 숭배하는 애굽 사람들의 거짓 신에 대한 심판이었고, 바로가 태양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며 바로가 모든 애굽의 백성들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근원이라는 애굽 사람들의 거짓 신앙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여기서도 고센 땅을 구별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23).”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누가 참 하나님인가, 누가 참된 빛과 생명의 근원인가라고 물으시며 도전하시는 것이다. 바로는 다시 모세를 불러서 어린 아이들은 데리고 갈 것을 허락했지만 소와 양은 제외시켰다. 모세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고 결국 바로와 모세는 여기서 결별했다. 마지막으로 홍해에서 만나기까지 말이다. 바로는 다시 보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쫓아낼 때, 결국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와 회개의 기회에서 쫓겨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결국 죽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자신이 될 것임도 알지 못했다.

2.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신앙에 유익을 얻고 있는가, 해를 입고 있는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신앙에 유익을 얻고 있는가, 해를 입고 있는가?”이다. 바로는 분명히 신하들의 신앙을 방해하는 자였다. 하나님의 권능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바로의 술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바로의 신하들이 다 바로의 강퍅함과 그 영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에서 현저한 해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물론 바로 자신은 조금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도 이런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슬픈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신앙에 해를 미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대부분’이라고 했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고 있는 신앙의 악영향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다면 그는 그래도 은혜 받은 사람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직장에서 부하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자기의 가족과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자기 상사, 자신을 고용한 사람, 또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이 왜 없겠는가? 생각해보라. 그들은 당신을 인하여 유익을 얻고 있는가, 해를 받고 있는가?

3.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의미와 은혜의 필요
오늘 본문에서도 20절과 27절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히브리 용법의 원의미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무 통제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든 모르든 모든 사람에게 이런 외적 통제장치를 주신다. 이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 자체가 최고의 벌이고 심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외적 통제장치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자기 소욕대로 살 수 없게 하시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다. 바로가 그것을 보여주는 실물 교훈이다. 하나님이 놔두는 사람은 이렇게 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A. 우리가 욕심대로 살 수 없는 상황(보조장치)도 은혜다.
만일 우리가 욕심대로 살 수 있을만한 모든 환경적 요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체면 때문에 혹은 물질이 부족해서, 혹은 능력이 적어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교만이 하늘을 찌를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지지 않은 것은 은혜지, 형벌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시는 증거가 아니다. 이 사실을 당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 속에 적용해보라.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가?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죄성에 대해서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는 욕심대로, 원하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악하게 반응하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간섭하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다.

B.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도 은혜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매는 하나님의 징계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만을 징계하신다(히 12:5~11). 부모들이 왜 매를 대는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부모의 매는 이런 점에서 징계다. 그러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왜 매를 대겠는가? 만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 오히려 잘못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 가운데서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물어야 할 문제다.

C.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있다면, 그 말씀을 거부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실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은혜를 그치게 하신다면 우리는 바로와 똑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마음먹고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저주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내버려두신 것이 그의 강퍅함의 문제였다면, 오늘 우리가 강퍅하게 행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있다면 그것은 은혜를 받지 못하는 어떤 사람, 혹은 마음이 강퍅한 어떤 사람과 본성이 달라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사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고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괴롭게 하신다. 이것도 은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고 사는 자들이다.

4. 남이 아니라 자신을 생각하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가? 그 말씀은 바로가 아니고, 당신의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향하고 있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생각하라. 당신은 정녕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미치는 존재인가, 해를 미치는 존재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회개하라.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또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저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고 있는가? 이것이 당신의 삶 속에 풍성한 감사의 제목이 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