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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3) - 재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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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3) - 재앙4

출애굽기 9:1-3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3-12

말씀내용
1. 세 재앙의 개관?악질, 독종, 그리고 우박
오늘 본문은 다섯번째 재앙에서 일곱번째 재앙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가축들에게 임한 악질과 사람과 짐승에게 임한 독종, 그리고 우박의 재앙이다. 이전의 재앙들이 개구리나 이, 파리와 같은 것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면 가축들에게 임한 악질(전염병)은 약간 그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이것도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Hathor라는 소 형상의 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을 이전에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점이 다르다. 사실, 나중에 이스라엘 회중이 소의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긴 것은 애굽에서 본 것을 행한 것이었다. 이 전염병으로 인하여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었다고 한 것은 애굽에 미친 경제적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것을 짐작케 한다(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고센 땅은 구별하셨다. 이어진 재앙은 인간에게까지 미치는 독종이었다. 아마 이것은 피부가 짓무르는 종기와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애굽 사람들 모두에게 그리고 짐승들에게까지 임했다. 그리고 일곱번째 재앙인 우박의 재앙에 대해서는 가장 길게 기록이 되어있다. 우박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 아모리 사람들과 전쟁을 벌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박으로 아모리 사람들을 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도우셨다(수 10). 그외 시편이나 선지서들에서도 우박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이 우박은 불덩이와 함께 섞여서 내렸으며(23, 24) 거대한 뇌성이 함께 했다(23, 28, 34). 이 우박은 애굽 개국 이래 최악의 것이었고, 모든 사람과 짐승 그리고 밭의 작물들과 나무들에 내려서, 삼과 보리가 다 상하게 했다. 이 정도 상황에서 애굽의 정치, 경제가 거의 마비되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지나친 상상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독종과 우박의 재앙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센 땅을 구별하셨다(26).

2. 바로의 신하들에게 임한 변화(11, 19)
우리는 일련의 재앙들을 겪는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신하들 그리고 바로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9장에서 우리는 특별히 바로의 신하들에게 일어난 마음의 변화를 주목하게 된다. 첫째로 보게 되는 것은 독종이 모든 애굽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그 독종이 바로의 술객들에게까지 임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었다. 마귀적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는 일은 가능하고 또 일어난다. 그들도 치명적인 질병을 고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개구리 재앙까지였다. 그들이 더 이상 모세와 아론을 흉내 낼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이는 하나님의 권능(손가락)이니이다”라고 바로에게 고했었다(8:19).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그 심판을 당하고 있다고 성경이 기록하는 것이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11).” 술객도 더 이상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술객들?마귀의 수하들?만이 아니라 결국 사단을 멸하심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계 20). 바로의 술객들에게까지 독종이 임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바로의 궁에 있는 바로 자신에게뿐 아니라, 바로의 신하들에게 인상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박의 재앙에 대한 경고가 주어졌을 때, 바로의 신하들 중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성경은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20). 그들은 모세의 경고를 따라서 자기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게 함으로써 해 받음을 면하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정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21)!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는 이들의 고집과 자존심은 가히 놀랄만한 수준이 아닌가? 자신들의 재산에 엄청난 피해가 갈 줄을 예상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과 생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건물 안으로 그들을 대피하게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죄인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 것인지를 본문처럼 잘 보여줄 수 있겠는가? 죽더라도, 완전한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하지 않는 죄인의 완고함을 본문은 보여준다.

3. 하나님의 의도(14~16)
하나님의 반복적인 학습 방법은 일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행동하는 이들을 만들어내었다. 왜 이들 뿐이겠는가? 출애굽할 때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었다. 타국인들도 있었다. 모세가 출애굽 광야여정에서 구스 여인을 취하였던 경우, 이 구스 여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출애굽한 타국인이었을 것이다(민 12). 이들이 12:38에 기록된 ‘중다한 잡족’의 존재이다. 이들 중에는 애굽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물론 이스라엘 자손과 같이 외국인으로서 종이 되었던 인종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박의 재앙을 주시기 전에 모세를 통해서 경고의 말씀을 주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게 된다. 하나님께서 온역으로 애굽을 치셨다면 다 죽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자손은 단번에 쉽게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고 의도하셨기 때문이다(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이루시지 않으시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재앙을 주셨다. 이로써 바로의 마음과 바로의 신하들의 마음 그리고 애굽 백성들로 하여금 “온 천하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 하심이다(14).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나리오도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 한 차례로 모든 것을 끝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심판의 싸인을 주시고, 실로 심판을 부분적으로, 단계적으로 행하신다. 그 의도는 여기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같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다(딤전 2:4). 사도 베드로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썼다(벧후 3:9).

하나님의 의도는 실로 전세계적이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애굽 사람에게만 임하고 끝난 사건도 아니었다. 여기서 일어난 재앙의 소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가나안의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간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여리고의 주민이었던 라합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사실을 보게 된다. 라합은 정탐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9~1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본질적으로 전세계적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시거나,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마 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끝과 온 세상에 복음이 증거됨으로써 하나님의 명성이 알려지고 인정되는 것이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셨다(마 24:14).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이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다가 올 진정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일들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벌어지는 무서운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더 이상 안전 지대가 없다고 할만큼 일어나는 대규모 테러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와 요한계시록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며, 핑계할 수 없게 하시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이 출애굽의 과정에서, 열 가지 재앙에서 효과가 있었다. 일부 바로의 신하들이 드디어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4. 바로의 전향적 태도: 거짓 회개(27, 34, 35)
그러나 성경은 바로의 마음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그는 우박과 불덩이가 자기 땅의 모든 작물을 훼손하자,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고백했다(27). 드디어 바로는 자기의 악과 죄를 인정했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의 회개는 거짓 회개였다. 모세는 그의 거짓 회개를 놀랍게 분별했다. 이렇게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는 바로 앞에서 모세는 “우박이 그치도록 기도하여 우박은 그치겠고 왕은 세상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29), 하지만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아노라(30)”고 말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조금은 더 익숙해졌다. 바로의 첫 번째 반응이 거절이었을 때 모세는 너무나 힘들어했었지만, 이제 거듭되는 재앙들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는 동안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의 조급함이라는 불신앙과 싸우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와 나의 시간표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함과 초조함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도리어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일하신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것을 배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영적인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회개하는 바로 앞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마치 초보 전도자가 복음을 들은 사람의 이런 전향적인 반응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하면서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왜 바로의 회개는 거짓 회개인가? 그의 회개는 첫째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거짓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카톨릭은 인간이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성을 인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구하지 않는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그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라는 사람 앞에서 그것을 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가보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악을 고백하게 만든다. 둘째로 바로의 회개는 모든 죄를 회개하는 회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거짓 회개이다. 그는 “이번은”이라고 말했다(27). 그럼, 이전에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의 마음이 단지 우박으로 인한 재앙을 막아보려는 계산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참된 회개는 심판의 두려움을 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께 자기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거래나 흥정이 아니다. 참된 회개는 어떤 한 대단한 사건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셋째로 바로의 회개는 죄악된 행위로부터 돌아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회개였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다. 회개는 ‘뉘우쳐 고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유창하게 고백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에,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했다. 회개의 진정성은 언제나 회개한 후, 그리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에 드러난다. 바로는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였다(34).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를 성경은 예리하게 설명한다. 비록 삼과 보리는 상했지만, 아직 자라지 않았던 밀과 나맥은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1~32). 우리는 이런 바로의 모습에서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들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말할 만큼 두려워하지만(6:15~16)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이다(계 9:20~21; 16:9,11). 바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집단적 반역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마지막 사실은 집단적 반역이다. 비록 일부 바로 궁의 신하들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바로 또한 전향적인 회개의 고백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범죄하고 마음을 완강케 하는데 있어서 바로와 신하가 일반이었다는 사실이다(34). 아무리 어떤 깨달음이 있었고, 두려움이 느껴져서 교회에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할 수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회개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여전히 버리운 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결코 안전한 일이 못 된다. 바로의 신하들은 마음이 열렸다가도, 바로의 완강하고 강퍅한 마음을 보면서 다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를 말씀하신다고 느낄 때, 강퍅한 사람들 틈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안전한 일이 아니다. 바로의 궁에서 일어나는 집단적인 반역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들은 더 용감하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6. 교훈과 적용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회개, 참된 회개의 자리로 가도록 만들었는가? 그때 당신은 그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기회를 삼았는가? 그리고 불신의 동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나아갔는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들로 볼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의 경고라는 생각을 하는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인정을 받으시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아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열정에 참여하여 당신의 삶을 드리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것 같은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당신의 시간표와 다르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더해주는가, 아니면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왔는가? 당신은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이 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참된 회개의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