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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2) - 재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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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2) - 재앙3

출애굽기 8:16-32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3-05

말씀내용
1. 타락으로 말미암아 역전된 창조 질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재앙들에는 동물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인간은 이 동물들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애굽 바로의 권력도 이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애굽 사람들이 생각하던 인간의 문명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동물들을 등장하게 하심으로써 재앙을 주셨는가 하는 숨은 의도를 보게 된다. 앞서 이 모든 재앙은 애굽의 신들?애굽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겨서 숭배하던 존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언급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상이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동물을 포함하여 창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타락은 창조질서의 조화를 깨뜨려버렸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적대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고, 인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폰 라드의 말처럼, 인간은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새 자기들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자연세계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동물들의 형상들이었다.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우리가 곧 보게 될 모습이라면 이런 풍습이 어디에서 초래되었겠는가? 바로 애굽에서 그들이 본 대로 행한 일이었을 뿐이다.

2. 열 번의 재앙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다스려야 할 동물을 형상으로 만들어 신으로 섬김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창조 질서를 뒤집어놓았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서 그들이 섬기는 동물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때 얼마나 그들을 어떻게 괴롭힐 수 있으며 비참함을 더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동물이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부조화의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다. 하나님만이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든 애굽 사람들이 알아야 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신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그 신이 진정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나타나는 비참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배우게 하신다. 당신은 그 비참함을 맛보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거기에는 단지 동물들만이 아니라 돈도, 건강도, 시간도, 외모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오늘날 돈의, 건강의, 시간의, 외모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런 비참함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방식(1): 인생이 ‘혼돈’ 속에 빠지게 될 때
그것은 한 마디로 혼돈(chaos)이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자리에 있고, 다른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은 질서를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이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높일 때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오직 혼돈이고, 더 심한 혼돈으로 인도하는 혼돈일 뿐이다. 성경은 로마서 1장에서 이것을 지적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2~23, 25).”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관계가 뒤집히자 모든 것이 다 뒤집혀버렸다. 남녀의 관계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형제 간의 관계도 모든 것이 다 뒤집혔고 우리는 그런 혼돈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 혹은 우리 삶 속에서도 피하지 않고 일어난다. 이런 현상들이 예상치 못한 바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문제는 혼돈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이것이 혼돈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무감각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마음이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그리고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셨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롬 1:24, 26, 28)? 이럴 때 인간이 가진 지식과 부와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느 시대보다도 더 놀라운 과학의 성취와 지식을 가진 지금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헛된 신을 섬기고, 온갖 사술에 결박당함을 보여주며, 도덕적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 일련의 재앙들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들의 모습을 볼 때 오늘날 회개하지 않고 죄악 속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로마서 1:32은 이런 점에서 결코 생소할 수 없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깨닫게 되는 방식은 바로 이런 혼돈 속에 처해있을 때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이런 혼돈 속에서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이 혼돈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주실 때 의도하셨던 바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방식이 있다.

4.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방식(2): 전능자의 능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19)
애굽 사람들은 바로가 세상 만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재앙이 올 때마다 바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술사들을 통해서 모세가 행하는 이적을 따라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술사들은 처음에는 모세와 아론을 자기들과 같은 마술사로 여겼을 것이다. 술사들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고, 물을 피로 변하게도 하였으며, 개구리가 많아지게도 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한 것 처럼 이를 만들어내려고 하였지만, 할 수 없었다. 점점 그들은 자신들이 더 크신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술사들이 바로에게 고한 말이 그 증거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직역하면 손가락)이니이다(19).”
여기서 술사들이 말한 하나님은 엘로힘이다. 술사들이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알지 못했으며 구원하는 신앙에 이르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신다.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 인간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술사들은 그들에게 재앙을 더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은 알지 못했다(7:5).

5.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되도다!
똑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의 능력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하는 믿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비록 술사들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고 인정하고 바로에게 증거하기까지 했지만, 구원하는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의 영적 지각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하는데까지 데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았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드린 한 인물이 있다. 다윗이다.

A. “여호와, 우리 주여” (시 8)
그는 시편 8편에서 이렇게 찬송하고 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그는 이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세계를 바라보고 경탄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모든 창조계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해, 달 그리고 별들, 또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주의 새, 바다의 어족들은 인간이 섬길 신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다스림을 받을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다윗은 애굽의 술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았지만, 그는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성령의 영감으로 이 찬송시를 짓게 되었다. 그는 이 찬송시에서 ‘엘로힘’이라고 하는 대신, “여호와 우리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1).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구원하는 믿음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지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때이다. 모든 참된 구원의 지식은 우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고 예배하게 만든다.

B. 인간은 하나님과 흥정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술사들이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마음이 강퍅해서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파리의 재앙을 더하셨다. 이 재앙부터는 또 다른 하나님의 증거가 더해졌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이런 재앙이 전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2). 이로써 바로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더욱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바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이 지식의 성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쪽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의 태도가 참된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땅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제안했고(25), 그 다음에는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고 했다(28).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번복한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파리가 물러가자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과 흥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는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과 흥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의 관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과 흥정할 소지가 있다고 여기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대하고 살아가는가?

6. 하나님의 권능(손가락)이 가장 놀랍게 나타난 현장, 십자가
술사들이 본 것은 지팡이가 뱀으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고, 개구리 떼가 강에서 올라와 온 지면에 가득한 것이었으며, 온 지면의 티끌이 변하여 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손가락(권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재앙들 자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음란한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대답하셨다(마 12:39~40; 16:4; 눅 11:29~30). 주님께서 이로써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표적이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14). 주님께서 오직 한 가지,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 오셨다(요일 3:8).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마귀의 지혜를 비웃으시고 마귀의 머리를 짓밟으신 현장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범죄한 후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그 구원의 일을 행하셨고(창 3:15), 인류 역사 이래 이보다 더 놀랍게 하나님의 권능(손가락)이 나타난 현장은 없었다.

애굽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사건도 한편으로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저주가 퍼부어진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어내신 사건이다. 재앙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기회가 되었듯이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역사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 앞에 엎드리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선고한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있는가? 교회에 와서 앉아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권능(손가락)이 가장 놀랍게 나타난 이 사건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가?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는 그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하나의 사건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