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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1) - 재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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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1) - 재앙2

출애굽기 8:1-1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2-26

말씀내용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일을 살피면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영적 전쟁이라는 차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재앙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관심 뿐 아니라 바로의 마음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재앙의 패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열 가지 재앙의 어떤 패턴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A. 애굽의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모든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띄고 있다. 개구리 재앙도 마찬가지다. 애굽 사람들은 헤켓(Heqet)이라고 불리우는 개구리 형상의 여신을 숭배했었다. 이 신은 다산을 가져다 주는 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개구리의 편재를 통해서 그 신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그리고 그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거짓 신들의 정체를 밝히시고 그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심을 보이신다. 그러나 어떤 신보다도 사실 바로 자신이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모든 재앙들은 신으로 여겨지는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B. 5분류
이 열 재앙을 여러 형식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이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특별히 5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Umberto Cassuto). 처음 나일 강을 피로 변케 한 것과 개구리 재앙은 모두 나일 강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로 이와 파리는 모두 곤충이다. 세번째 악질과 독종은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 네번째 우박과 메뚜기는 농작물을 거두어가신 재앙들이다. 마지막으로 흑암과 장자의 죽음은 죄의 상태와 결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C. 3분류
이런 분류 외에도 3종류로 분류할 수도 있는데, 처음 나일 강을 피로 변케 한 재앙(1번)과 파리의 재앙(4번), 우박의 재앙(7번)이 첫 그룹에 속하는데 이 재앙들을 주실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에게 나아가라고 명하셨다(7:15; 8:20; 9:13). 주로 그 장소는(적어도 앞의 두 번은) 바로의 궁이 아니라 나일 강이었다. 두번째 그룹은 개구리 재앙(2번)과 악질(5번) 그리고 메뚜기 재앙(8번)이다. 이것들을 주실 때에는 모세는 바로의 궁에 나아가서 바로를 만났다(8:1~3; 9:1; 10:1). 세번째 그룹은 이 재앙(3번), 독종의 재앙(6번)과 흑암의 재앙(9번) 그리고 마지막 장자의 죽음의 재앙(10번)이다. 이 네 개의 재앙들은 바로를 대면하여 경고함이 없이 임했다(8:16; 9:8; 10:21). 이것들은 마지막 재앙을 제외하면 3개의 재앙이 계속 반복해서 같은 패턴으로 일어난 것을 관찰한 것이다.

D. 특징들
이 재앙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재앙들이 가지는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Joseph Free는 그 특징들을 이렇게 말했다.

i. 강도와 질서(intensification and orderliness)
이 열 개의 재앙들은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 재앙들은 그 강도에 있어서나 질서에 있어서 상당한 체계와 패턴을 가지고 주어졌다. 이것은 무질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순차적으로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계시의 차원에서 진행된 사건들이었다.

ii. 예고(Prediction)
이 재앙들은 갑자기 아무 예고 없이 일어난 것들이 아니다. 비록 3분류 방법에서 세번째 그룹의 네 재앙들은 바로에게 경고 없이 일어났지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심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고를 통해서 재앙들이 임했다는 사실은 이 재앙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심판의 사건들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iii. 구별(discrimination)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들을 주실 때, 모두에게 동일하게 그 심판을 주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네번째 재앙인 파리 재앙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은 그 재앙으로부터 제외시킨다고 언급하셨다(8:22).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을 분명하게 세상과 구별하신다. 이 사건은 종말의 대환란과 관련하여 겁을 집어먹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사건들이 그저 자연재해에 불과했다면 어떻게 번번이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땅만이 거기서 제외될 수 있었겠는가?

iv. 도덕성(moral purpose)
이 재앙들은 모두 도덕적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려 깊은 독자라면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들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와 백성들을 교훈하시고 그들의 무분별하게 섬기는 헛된 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이 열 가지 재앙들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패턴 그리고 특징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2. 바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죄인의 반응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 본문을 통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의 마음이다. 바로를 통해서 성경이 보여주는 죄인의 반응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이처럼 반응하는 면이 있지 않은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참된 믿음이고 아닌지를 보여주는 부정적, 혹은 반면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이다.

A. 회개 없는 기도(8): 문제는 개구리가 아니라 죄다.
첫째로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로의 심령의 가장 죄된 모습은 ‘회개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바로는 개구리가 너무나 많아지자,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렀다(8). 그리고 개구리를 떠나게 여호와께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바로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문제는 개구리가 아니라 바로의 죄다. 바로가 보여주는 것은 전형적인 영적 무지의 특징이다. 영적 무지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영적으로 눈이 감겨 있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개구리가 문제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개구리를 통해서 그의 심령을 보게 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여호와께 기도를 요청하지만, 그의 기도는 회개가 없는 간청에 불과한 것이다. 회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특징이다. 여러분의 기도의 삶을 생각해보라.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회개하는가? 여러분의 죄를 보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가는가? 아니면 여러분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문제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바로가 구하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개구리를 좀 없애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가?

B.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할 때(8)
바로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이제 불과 두번째 재앙을 경험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는 모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했다. 바로가 처음에 모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그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고 했다(5:2).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가 모른다고 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세에게 기도해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처음에 이렇게 덧붙였었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그가 지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백성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했을 때, 그는 그 이야기를 거짓말로 간주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적어도 바로가 아는 것은 그것이 장난이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면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대로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은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은 자기 백성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다. 그 예배는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자녀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탄이며 감격이고 감사이며 찬송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죄인의 반응일 뿐이다. 바로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바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에도 이런 심령의 상태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당신의 심령의 상태는 어떠한가? 어쩌면 우리는 바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맛보지 않았다면 우리의 그 모든 지식은 결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결코 우리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서지 못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다.

C. ‘내일’이란 말이 반영하는 죄성(10)
모세는 특이하게도 바로에게 질문을 했다. “어느 때에 개구리가 없어지게 되기를 바라는가?” 매우 특이한 질문이 아닌가? 지금 당장 개구리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데 모세가 왜 이 질문을 한 것인가? 성경은 한 군데도 버릴 것, 의미없이 반복적으로 쓰여진 것이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바로의 대답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였겠는가? “지금 당장!”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로는 달랐다. 그는 “내일이니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한 바로의 마음 상태를 Philip Ryken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극심한 재난 속에서도 바로는 어떻게해서든지 개구리들이 스스로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즉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뭔가 어떻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조차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조차도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인간이 죽게 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쉽게 나아오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쳐준다. 극한 상황을 만난 인간이 모두 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던가? 그런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왜 그런가? 바로와 같은 심령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반드시 극한 상황에 이르러야만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언젠가 내 인생 가운데서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될 때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요, 구원의 때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D. ‘상황’에 좌우되는 심령의 죄악된 상태(15)
바로는 또한 상황에 좌우되는 심령의 소유자였다. 이것처럼 간사한 것이 있는가? 일단 개구리가 없어지자, 바로는 ‘숨을 통할 수 있게 되었다’(15). 극한 상황이 풀려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가? 그렇게 전에 없이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다가 문제의 상황이 종료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옛 생활로 돌아가버린 적은 없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극한 상황 속에서 그토록 간절해졌던 심령이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일까? 도대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바로의 마음이 왜 진정한 변화에 이르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요는 이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심령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인가와 상관없이 참으로 회개한 심령은 결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심령은 아무리 철야를 하고 금식을 했다고 하더라도 옛 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심령이 변화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의 상태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3. 교훈과 적용: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과 성도의 변화된 심령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심령에 관한 교훈이다. 개구리를 보지 말고 당신의 심령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구리가 문제가 아니고 당신의 심령이 문제다. 우리 삶에 개구리(눈에 보이는 문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개구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깊게 보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피상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도 피상적으로 밖에는 알 수 없다. 당신이 성경이 가르치는 심령의 상태에 대한 여러 교훈을 참되게 받아 자신을 점검할 수 있다면, 또한 당신은 다른 형제들의 심령을 돌볼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도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