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출애굽기 강해 (8) -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

출애굽기 강해 (8) -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출애굽기 강해 (8) -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

출애굽기 5:22 ~ 6:1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1-08

말씀내용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 모든 사람들의 삶이 불편해지고 말았다. 모세는 절대로 만족할 수는 없는 삶이었기는 했지만, 지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익숙해진 목자의 삶을 접고 이제 고단한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동안의 삶이 절대로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모세란 인물이 나타난 후로는 그들의 고된 삶이 더 고되지기만 하였다. 심지어 바로 자신도 그동안 문제 없이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렸었는데, 조금은 신경쓰이는 존재가 나타나서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그 어느 사람도 예전의 삶에 안주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힘들어서 속은 다 상하였고 심지어 악이 바짝 바짝 타올라서 모세와 아론의 가슴 속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하였다. 아론은 그렇다 치고, 모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찾아갈 곳은 어디고, 찾아갈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순종과 결단이 고통과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정직하게 경고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니, 순종이 고통을 가져온다고 해도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가? 당신은 순종할 것인가?

1.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가 있다.
그렇다.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가 있다.

A. 모세의 이중의 실패: 종종 사역은 이런 낙심의 환경으로 가곤 한다.
모세는 지금 이중의 실패를 경험했다. 바로에게서 거절 당했고, 백성에게서 거절당했다. 그래도 이 일을 해야하는가? 백성들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을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종종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상황을 경험하곤 하였다. 모세 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또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주의 종들이 이런 일들을 경험했다. 복음을 원치 않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가져다주어야 했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때로 아니 종종 이런 낙심의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곤 한다.

B. 바울 사도의 빌립보 사역의 결과(행 16)
신약 시대에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리고 유럽으로 그들의 방향으로 돌리게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다. 환상 중에 바울 사도는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마게도냐 사람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마게도냐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마게도냐에 도착하여 첫 성 빌립보에 들어가서 그가 본 것은 활짝 열린 복음의 문이 아니었다. 그는 잡혀서 매을 실컷 맞고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뜻을 보았고 순종했지만, 그에게 당장 돌아온 것은 매질이었고, 투옥이었다.
C. 구원의 과정과 믿음의 여정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다.
바울과 같은 대사도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동일한 싸움이 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 대변하는 것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모습이다. 마귀는 결코 한 영혼도 손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하려고 한다면 여러분 자신에서 시작해서 그 영혼이 싸우는 영적 전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분이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것이 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미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서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지’라고 결심한 신자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마귀의 도전과 공격이 쉼없이 계속 된다. 무서운 일이다. 정말 어렵게 믿음의 순종을 했는데, 결국 일이 꼬여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가? 직장에서 믿음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돌아온 것은 불이익이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해보라. 어디 하나 쉬운 여정이 있는가? 왜 그런가? 그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라. 종종 순종이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2.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라.
모세가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갈 수 있고, 어디에다 자기의 속상함을 토로할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5:22). 여기서 모세가 잘못한 것과 잘한 것이 있음을 구분해야 한다.

A. 모세의 실패
i. 불평: 하나님께서 문제를 초래했다고 느낀다.
첫째로 그가 실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문제를 초래했다고 느끼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렇게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인지를 그는 묻는다.

ii. 초점: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지만,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성품은 보지 못한다.
결국 그가 초점을 맞춘 것이 무엇인가? 그는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지만,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실패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5:23). 자기는 순종했는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모세는 지금 당장 일어난 일만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 너머에, 그 배후에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지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초점은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B. 모세의 성공
하지만 우리가 이 대목에서 발견하는 것은 모세의 잘못 만이 아니다. 오히려 모세를 인정해 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
i. 자기 자신을 위한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모세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매여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정말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4:31). 비록 지금 그는 이스라엘 패장들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이 백성들이 혹독한 고생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사실, 모세의 이런 마음은 나중에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실 때,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는 한이 있어도 주의 백성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다.

ii.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갔다.
모세를 인정해주어야 할 부분은 그가 이 문제를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십장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형인 아론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 것 같지 않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일이 아닌가? 이스라엘의 패장들이 어려움이 닥치자 바로에게 달려가 호소한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일인가?

3. 하나님의 처방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처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질문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는 왜 이렇게 하셨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대시는 대신에, 모세를 부르실 때 이미 하셨던 말씀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A. 반복해서 주어지는 말씀(6: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실망과 낙심을 예방한다(3:19; 4:21).
우리는 보통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지하게 대답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그 대답 보다 더 근본적인 대답을 주시는 편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에서 하신 일은 이미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반복해서 하신 것이다(1). 강한 손을 더하실 때 바로가 백성을 놓아주게 되리라는 것이다(3:19, 4:21). 모세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가 묻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단번에 즉석에서 바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얻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모세의 낙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 찾아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우리가 종종 겪는 실망과 낙심을 예방한다. 당신이 겪는 모든 낙심과 실망의 상황들은 혹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서 실패했기 때문에 겪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

B. 하나님의 주권(6:2,6,7,8): “나는 여호와라”
두번째 하나님의 처방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라”고 계속해서 선언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가슴으로, 믿음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때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나는 여호와라”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짧은 본문에서 무려 4번이나 이것을 강조하여 선언하셨다. 무슨 의도이신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이기도 하고, “나를 알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권자이심을 모세는 기억해야 한다. 만일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다른 선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여가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비록 지금은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다른 선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라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선언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해석할 구절은 3절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으셨다는 뜻인가?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상들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 주권자요,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그들은 다 경험하고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될 것과 같은 정도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바로에게까지도 당신이 여호와이심을 완전하게 알게 하실 것이다.

C. 하나님의 언약(6:3~7): “I will…….”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리라”는 말씀을 3~7절에서 무려 7번을 하신다. 하나님은 1)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백성을 건져내실 것이고 2) 그 고역에서 건지실 것이며, 3) 편 팔과 큰 재앙으로 구속하실 것이고, 4)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고, 5)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또한 6)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7) 그 땅을 기업으로 삼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이루어주실 것들이다. 다시 하나님은 600여년 전에 맺으신 그 언약을 상기시켜면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의지를 보여주신다. 이 말씀을 통해서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의도가 무엇일까? 600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일하시고, 분주하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로 고통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흔들림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4. 마음이 상할 때에도 순종하라(6:9~13):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6:9).” 당신은 지금 마음이 상한 상태에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삶의 일상이 너무나 힘들고 지쳐서 그 모든 일에 대한 원망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모세를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이다. 마음이 상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삶이 너무나 고단해지게 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마음이 상할 때에도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이다.

A. 구제불능인 백성들(6:9): “I won’t…….”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하리라”는 7번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심지어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욱 상한 모세는 바로 앞에 다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지만, 인간은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이다. 죄인인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스스로 찾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환영하는 죄인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다 복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

B. 감사: 하나님께서 이기신다!(6:13).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기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이기신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찾아오셔서 그의 모든 저항하는 힘을 결박하시고, 그를 이기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저항을 결박하고 이기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 앞에 우리를 살려달라고 구하기에 이르는 것이고, 그분이 이기셨기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결국 어떻게 했는가? 그는 결국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전했다(13).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신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많은 고통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혹은 실수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순종이 고통을 가져올 때도 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라.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선하신 뜻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