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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1). <하나님의 헤세드>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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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1). <하나님의 헤세드> 집으로

창세기 35:1-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1-20

말씀내용
‘집으로’라는 이 세 음절의 말이 우리에게 불러일으켜주는 향수가 있습니다. 괜히 돌아가야 할 것 같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거꾸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인생이 아닐까요? 야곱에게도 돌아가야할 집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집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다른 곳을 배회하면서 집에서 밖에는 얻을 수 없는 안정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지 않은가요? 정작 집에서 얻어야 할 안정을 엉뚱한 곳에서 얻으려고 하다가 쓰디쓴 비참한 결과를 종종 맛보는 것이 아닌가요? 탕자의 인생이 그랬듯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다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그렇습니다. 그는 참 오래 방황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옆에 계시지만, 그 옆에 계신 하나님께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만났다가도 또 헤어지고, 그리고는 멀어지고 하기를 여러 번 합니다. 이제 야곱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기서 시작합니다.

1. 야곱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되다.
오늘 본문은 이제 야곱의 인생에 황금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듯 합니다. 어떤 면에서 야곱 인생의 황금기인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자기 인생의 황금기를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35장은 짧다면 짧은 본문입니다마는, 야곱의 인생에서 매우 긴 시간을 차지하는 장입니다. 잠깐 야곱의 인생의 흐름과 그의 연대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게 될 때 그의 나이는 적어도 40이 넘었을 때였습니다(창 26:34). 그는 밧단아람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었다고 할 때 그의 나이가 60이 넘어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상고한 34장의 본문에서 그는 세겜에 적어도 약 10년 정도를 머물렀습니다. 그의 나이가 70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8절에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 나이가 180세였습니다. 그러면 이삭이 60세에 낳은 야곱의 나이는 120세입니다. 즉, 이 35장 본문이 야곱의 인생을 아무리 적어도 약 40년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결코 더 이상 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나이가 석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인생에 석양이 시작되었다면 어떤 점에서 황금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이 보는 인생에 대한 관점은 힘이 펄펄 나는 젊은 시절을 황금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극대화되는 중년기를 황금기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지속적으로 성화되어 마지막이 가까와 올수록, 그리고 우리 인생의 석양이 되어갈수록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 20: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이런 점에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결부하여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시간이 오기 전에 우리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떼어야 하고, 또 집으로 가야 합니다.

A. 하나님의 이름
지난 주일에 상고한 34장의 본문에는 특이하게도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35장의 본문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등장하시고 ‘하나님’이란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아마 가장 큰 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서 형식적으로, 명분으로만 가지고 살다가 이제 자기 인생에서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고, 하나님이 인생의 참 주인이 되시며,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면,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B. (영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황금기의 시작이다.
야곱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본문은 그것을 몇 가지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35장 본문은 야곱의 스토리가 드디어 기승전결의 본격적인 결부로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i. 벧엘(1)?영적 고향: 하나님과의 약속
첫번째로 그 집은 벧엘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창세기 28장의 벧엘 경험은 그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했던 경험을 제외한다면 최고의 영적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섬기던 분을 처음으로 자기의 하나님으로 제대로 만났던 경험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입니다. 그런 점에서 벧엘은 그에게는 영적 고향이었고 집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고 그 서원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미루고 살았던 그 서원을 이제 고통 속에서 그는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이자 자기의 영적 고향인 벧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지리적으로 벧엘이 세겜보다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올라가라’는 표현은 영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세겜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한 야곱의 인생이 이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으로써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ii. 헤브론(27)?아버지 이삭의 집(할아버지와 아버지)
두번째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이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은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죽음 후에 그녀의 매장지를 삼기 위해서 생전에 매입했던 유일한 땅이었습니다(창 23:2이하).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세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이제야 아버지가 계신 집, 헤브론으로 가는 것입니다. 약 30여년 전 아버지를 속이고 떠났던 아들이 이제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기록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가 아버지와 기쁨의 해후를 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iii. 에서(29, 창 36:6~7)
야곱은 33장에서 형 에서에게 곧 뒤따라서 세일로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35장은 그가 헤브론에서 형 에서를 만나고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함께 치루었다고 기록합니다(29절).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이어지는 36장에서는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의 소유가 피차에 많아져서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고 에서가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기록합니다(36:6~7). 결국 이삭 앞에서 그 쌍동이 형제는 만났을 것이고, 그 쉽지 않은 관계들은 어쩌면 처음으로 편안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2. 환난날에 만나는 하나님(1,3,7)

A. 축복: 넉넉한 삶인가, 버거운 삶인가?
인생에 많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은 참 넉넉하고 아무 걱정 없는 것 같고 여유있어 보입니다. 또 다른 인생은 사는 것 자체가 버거워보이고, 힘에 부치게 살아가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어떤 것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생입니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습니다마는, 너무나 넉넉하고 자신만만하게 살만한 인생이라면 그것을 우리는 결코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버겁고 안간힘을 써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다면 그 인생은 정말 축복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너무 쉬운 인생을 하나님께 구하지는 마십시오. 늘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내 힘을 초과하는 인생을 구하십시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야곱의 삶은 결코 그리 녹녹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았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믿음의 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B.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1).
그러면, 이제 우리는 본문의 흐름을 잠시 쫓아가 보려고 합니다. 세겜에서 딸 디나는 강간을 당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의 모든 남자를 다 죽이는 대학살 복수극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른 형제들 역시 학살 이후에 쫓아가서 노략질을 했습니다. 자기 인생이 뭔가 좀 자리를 잡아가는 듯 여겨졌고 조금 안정되는가 했는데 야곱의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상황 속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마 가장 행복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가 패배했다고 느낄 때, 우리가 혼자 남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참 성도에게 있어서 그 때보다 더 행복할 때는 없는 것입니다. 복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저는 이렇게도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그 환난날에만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야곱 곁에 계셨습니다. 세겜에 사는 동안 내내 그 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으셨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의 생각과 계획이 꽉 차 있는 동안에, 그리고 그 계획이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요? 자기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고 계속 부르시는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시고 찾으시는 음성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가장 예민해지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 인생이 곤고하게 될 때입니다. 즉, 환난날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부분이 강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과 3절과 7절을 각각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1절)이라고 했고, 또 야곱은 가족들에게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3절). 그리고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는데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라고 합니다(7절). 모두가 다 벧엘의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의 환난날에 만나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C. 환난날은 헌신과 성결을 새롭게 할 때다(2~4).
하나님께서 벧엘, 너의 영적 고향,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자, 절망 속에서 신음하던 야곱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솟아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유일한 원천입니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야곱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제 가족들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이 참담한 실패와 비극 속에서 자식들을 비난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야곱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말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헌신과 성결을 새롭게 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벧엘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헌신과 성결을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라고 그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세겜에서 보냈던 10여년 동안에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삶 속에 이방 신상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밧단아람을 출발할 때부터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가족의 신상인 드라빔을 도적질해서 나온 것을 성경은 이미 기록해주었습니다. 그런 이방의 문화 속에 있던 아내들과 자식들이 이방 신상들을 주변에서 더 불러모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제 야곱은 그 모든 삶의 더러운 것들을 청산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고 결단을 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결단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청산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가족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 그리고 귀에 있는 고리도 빼어서 야곱에게 가져왔습니다. 귀에 있는 고리는 당시 일반적으로 이방 신상을 만들 때 주로 드려서 만드는 재료였기 때문에 그런 연관성을 가지고 야곱에게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세겜을 떠나기 전에, 그것들을 그곳의 상수리 나무 아래 묻습니다. 이제 그는 벧엘의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볼 때 우리 인생은 어떤 때 거꾸로 반응하고 살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환난날에 야곱은 자신의 헌신과 성결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찾아오고 삶이 고단해지면 우리는 더 완악해지고, 더 기도하지 않고, 더 고단한 삶 자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삶을 고단하게 하심은 그 삶에 더 매달려서 이겨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고단한 삶 자체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라는 음성이 아닌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난날에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 것 같습니까?

D. 야곱의 초점이 사건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이동하다(7).
야곱은 30여년 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그곳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처음에 그곳에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을 만난 후, 그곳을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전체를 풀면 ‘하나님의 집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초점이 어떻게 변하고 있습니까?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었구나에서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이 계시구나로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의 깨달음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지금 그는 하나님 자신에게로 그의 초점이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자신을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것은 하나의 놀라운 체험 그 자체였다면,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E. 다시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다(10).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더는 야곱이라고 하지말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지를 다시 한 번 야곱에게 각성하게 해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는 더 이상 속이는 자, 사깃군, 남의 발목을 잡는 자가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이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삶을 사는 자, 하나님이 다스리는 자임을 기억해라. 너는 세겜에서 패배하고 살아갈 자가 아니야.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F. 하나님께서 언약을 갱신하시다(11~12).
그냥 이름만 바꾸어주시고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언약을 정확하게 야곱에게 말씀하시면서 그 언약을 갱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국민과 왕들이 야곱으로부터 날 것이며, 땅과 후손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 언약을 주시는 순간이야말로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절정이었다고 어떤 성경학자는 말합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얻어낸 축복, 그리고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셨던 축복이 정말 야곱의 것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렇게도 원했던 축복이 정말 야곱의 것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20년 동안 밧단아람에서, 그리고 비참한 실패로 끝난 10년의 세겜 생활을 통해서 그를 빚어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누구도 속일 필요가 없이 그 축복을 자기의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 이스라엘과 함께 말입니다. 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야곱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현(나타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게 거듭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이제 야곱에게 그렇게 나타나시고는 창세기에서 다시는 그렇게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한 시대가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던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요셉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주로 꿈을 통해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3.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다: 3명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
본문은 조금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으며 또 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세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 베냐민의 출생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A.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8)
본문에 기록된 첫번째 죽음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였던 드보라의 죽음입니다. 그녀가 언제 야곱의 일행과 함께 하기 시작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드보라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과 그 죽음이 언급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드보라의 죽음을 통해서 어머니 리브가의 죽음을 시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드보라는 어머니 리브가가 아브라함이 보낸 종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시집을 올 때 함께 온 유모였습니다(창 24:59). 야곱이 특별히 어머니 리브가와 가까왔던 관계를 생각할 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역시 야곱과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드보라를 벧엘 아래 상수리 나무 밑에 묻고는 통곡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통곡의 상수리 나무’를 의미하는 알론바굿이라고 한 것입니다.

B. 라헬의 죽음(19~20)
두번째 죽음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죽음입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은혜로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제는 늙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주신 언약의 말씀인,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늙은 야곱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벧엘을 떠나 에브랏(주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같은 곳이다)으로 가는 길에서 라헬은 산고를 겪다가 난산을 하게 되는데,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 고통의 아들’을 의미하는 베노니라고 이름을 주고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야곱의 인생에서 중요한 또 한 사람이 먼저 떠나게 됩니다.

C. 이삭의 죽음(28~29)
세번째는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여러 가지 연대 계산을 통해서 볼 때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인 헤브론으로 가서 상당한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삭이 180세에 죽었을 때 야곱의 나이가 120세였고, 야곱이 벧엘에 올라갔을 때 70대의 나이였다면, 야곱이 벧엘에서 얼마 간의 시간을 보내고 에브랏을 거쳐 에델 망대를 지나 헤브론에 이르렀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을 헤브론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본문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까지도 기록하면서 이 세 명의 죽음을 통해서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D. 베냐민의 출생(16~18)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한 사람의 출생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야곱의 막내 아들이고 열 두번째 아들 베냐민입니다. 이 이름은 아버지 야곱이 처음으로 자식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비록 어머니 라헬이 죽어가면서 그 아들에게 ‘내 고통의 아들’ 또는 ‘내 슬픔의 아들’이란 슬픈 이름을 주었지만, 야곱은 그 이름을 고쳐서 베냐민 곧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베냐민의 출생으로 드디어 야곱은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될 열 두 아들을 다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 나오게 될 것입니다.

4. 인생 회상: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나를 넘치도록 축복해주셨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인생에 석양에 가까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석양이 가까왔을 때 하게 되는 주요한 것은 회상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영혼의 고향이요 집인 벧엘로 가는 길에 자기의 걸어온 인생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지금 어느 자리에 있든지 여러분의 걸어온 인생을 회상해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에 대한 무엇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 야곱은 늙으신 아버지 이삭과 헤브론에서 함께 거한 얼마간의 시간동안 자기의 인생을 회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 이삭이 그 인생을 회상하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말입니다.

A. 비록 비극도 일어나지만(22)
우리가 오늘 살짝 지나친 구절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고 싶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리고 싶고 부인해 버리고 싶은 모든 현실을 다 보고 계시고 인정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다 정직하게 기록하고 조금도 우리 인생을 미화하고 꾸미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결코 현실을 외면하고 기뻐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구절이 바로 22절 앞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어떻게 이런 일이 또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현실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은 이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르우벤은 아마도 라헬이 죽은 후에 라헬의 시종이었고 야곱의 첩이 된 빌하가 자기 어머니 레아가 차지할 첫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거나 장자로서 아버지의 리더십에 도전을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르우벤은 이로 인하여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장자권은 이미 세겜 학살 사건의 주범인 시므온과 레위도 비껴가게 되고 결국 네째인 유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후에 야곱은 이 사건을 마지막 유언에서 준엄하게 다루게 됩니다(창 49:3~4).

야곱의 인생의 황금기에 비록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극적 사건이 야곱으로 하여금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헤세드를 누리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믿음의 삶에는 절대로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는 전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일로 인해서 신앙과 삶이 다 무너져 내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고 기뻐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능력입니다.

B. 약속의 성취(22b~26)?완성된 열 두 지파의 조상
하나님은 야곱의 노년에 베냐민을 주심으로써 약속을 성취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 명실공히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C. 하나님 품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다(히 11:14~16).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은 어디입니까? 야곱에게는 그의 영적 고향 벧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십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본향, 곧 돌아갈 집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살아 생전에 집으로 가는 일이 없는 자는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갈 집은 바로 하나님의 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십니까? 야곱은 적어도 자기가 돌아갈 영적 고향이며 영적인 집이 벧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벧엘은 그냥 장소가 아닙니다. 바로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의 품이 자기가 돌아갈 곳이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 영원한 집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 살아 생전에 영적인 고향, 그 집을 찾아 돌아간 일이 없는 자는 결코 죽어서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살아오신 삶과 걸어오신 길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나를 넘치도록 축복해주셨다’라고 고백하실 수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집으로 제대로 돌아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35장 내내 벧엘로 돌아가면서, 헤브론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헤브론에서 아버지 이삭과 함께 거하면서 이렇게 되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나를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야곱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코 여러분이 누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를 꺽을 수 없는 수준으로 여러분을 데려 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가 만들어내는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