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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9). <하나님의 헤세드> 두 사람: 야곱과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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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9). <하나님의 헤세드> 두 사람: 야곱과 이스라엘

창세기 33:1-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1-06

말씀내용
씨름을 걸어오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다라고 하고는 이후에 아브람이라는 옛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야곱의 경우는 매우 색다른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야곱이란 이름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 33장부터 50장까지 이스라엘이란 이름보다 야곱이란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로 살필 이야기입니다.

1. 변화된 삶1: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다
동이 터오고 씨름을 끝낸 야곱은 다리를 절면서 앞으로 진행합니다. 멀리서 형 에서와 400명의 무리가 보입니다. 야곱은 순간 자기의 가족들을 다시 배열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일인 것 같습니다. 두 여종과 두 아내의 자식들을 각각 어머니들에게 붙여서 두 여종과 자식들이 앞서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레아와 자식들,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이 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맨 앞서 나아갑니다. 비록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냈지만, 또 그랬기에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에서와 400인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겁이 났던 것은 그가 가족들을 배열하는데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형 에서와의 거리는 가까와집니다. 가까와질수록 야곱은 7번을 땅에 굽히며 나아갔습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땅에 납작히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데 그 자체가 복종하고 경배하는 행위였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을 성경은 4절에서 여러 동사를 통해서 극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에서는 절면서 다가오는 동생 야곱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를 끌어안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함께 사는 동안에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을 어긋맞기고는 동생와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목을 놓아 웁니다. 여기 ‘피차 우니라’라고 된 말은 일반적으로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사용된 마지막 단어를 제외하면 전부 다 에서가 주도적으로 하는 행동들입니다. 성경은 이 구절을 통해서 에서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서의 적대감?에서가 야곱에게 가졌던 감정은 미워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를 죽이기로 결심을 했었습니다, 창 27:41?이 이제 변하여 용서의 감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감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서 이루어내신 은혜로운 결과를 지금 야곱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상황을 예비해놓으셨는가를 야곱에게 알게 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변화된 삶2: 야곱이 자존심을 내려놓다.
이렇게 용서가 이루어지는 대목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야곱의 변화입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챈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태도와 말들은 분명히 야곱이 변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야곱이 씨름을 걸어오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밝힌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기까지 우리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나아가면서 땅에 몸을 일곱 번이나 굽혔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야곱의 두려움 더 나아가서는 불신앙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종래의 야곱에게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성향임은 분명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본문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향하여 무려 6번이나 ‘내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자기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였으며 형이 자기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생각이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아버지 이삭은 실제로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될 것이고 야곱의 어미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창 27:29). 야곱은 또 실제로 하나님이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그를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또 20년의 나그네 인생을 통하여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비하면 훨씬 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된 야곱이 왜 형 에서에게 이렇게 ‘나의 주’라고 부르면서 최대한의 예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물으신 것은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분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발견하셨습니까? 야곱은 자기이름을 말했습니다. ‘나는 남의 발목을 잡는 자입니다’, ‘나는 사깃군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살아남는 자입니다’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지요.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저의 이름은 자존심입니다’라고 대답하셔야 할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요?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이름, 자기의 정체를 밝혔을 때, 비로소 그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자유의 시작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야곱은 남들과 경쟁하고 싸우고 다투어서 뭔가를 쟁취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이제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령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야곱을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야곱 자신이 뭔가를 얻기 위해서 남을 넘어뜨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의 발꿈치를 잡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똑바로 세우고 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의 변화입니다.

형 에서 앞에서, 그것도 자기를 섬기게 될 사람인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 야곱은 스스럼 없이 7번이나 땅에 절을 하면서 나아갔고, 자기 입으로 6번이나 ‘주’라고 부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야곱의 변화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용서하는 형 에서를 보면서 이렇게 유명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10절). 이것은 결코 아첨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실제로 형의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형 안에서 이루고 계신 놀라운 은혜를 본 것입니다. 야곱에게 시퍼렇게 살아있던 자존심이 다 무너져 있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이것은 형 에서의 힘 앞에서의 굴욕이라기 보다는 야곱의 겸손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자기가 버둥거리고 자기를 지킴으로써 자기가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명예와 존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코 자존심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합당치 않음을 제대로 발견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야곱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인생에 이런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이스라엘 안에 있는 야곱
그러나 우리는 본문 안에서 미묘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 야곱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A.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받도록 강권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아니었다.
첫째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예물을 받을 것을 강권하는 장면입니다. 에서는 이미 앞서 보내준 것들이 모두 형에게 주는 예물이라는 것을 야곱으로부터 듣고나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예물을 사양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강권하여 결국 예물을 에서에게 주게 됩니다. 성경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을 할 수 있는 대목이기는 합니다마는,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다기 보다는 형 에서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대 동방의 풍습으로 볼 때, 예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적대감이 완전히 끝났고 이제는 상대를 공격하기 보다는 보호하고 도와주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강권하여 예물을 받게 한 것은 에서의 용서가 나중에 취소될 수 없도록 완전히 도장을 찍는 상징적 행위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대 동방에서는 결코 적으로부터 예물을 받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에서의 용서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새 사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옛 사람 야곱의 증거의 약한 면이라면 우리는 이제 보다 더 강력한 증거를 만나게 됩니다.

B. 야곱이 에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이스라엘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야곱적 성향이었다.
동생 야곱으로부터 예물을 받은 에서는 이제 동생을 에스코트하여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12절). 그러나 야곱은 형과 떨어지기를 바라고, 사정을 설명한 후, 천천히 형이 있는 곳 세일로 가서 형을 만나겠다고 말합니다(13~14절).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종들을 좀 남겨두겠다고 제안하자, 야곱은 그것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야곱의 마음에는 형이 사는 세일로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들었던 롯과의 이야기를 기억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야곱은 형 에서가 사는 세일 땅으로 가지 않고 반대편을 향하여 가서 숙곳에 정착을 하고 또 거기서 더 가서 세겜에 완전히 정착을 하게 됩니다. 세겜에서는 땅을 매입하여 거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야곱은 거기서 상당히 만족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를 용서한 형 앞에서 자기의 뜻을 밝히지 못하고 순간을 거짓말을 함으로써 모면을 하려고 하는 행위는 분명히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한 것은 불신앙과 불순종이었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야곱의 모습은 그가 벧엘로 가지 않았던 것이라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물론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벧엘로 돌아가라고 하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먼저 돌아가야 할 곳이 벧엘이었다는 암시는 성경 몇 군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31:13에서 야곱이 아내들에게 자기에게 나타나서 지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또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여 그 가정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창 35:1). 또 야곱 자신은 오래 전 벧엘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서원을 한 바 있습니다.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 28:21~22). 제가 이전에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때,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드렸습니다:
“야곱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전’이 의미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야곱은 여기서 이 돌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은혜의 장소로 삼겠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창 35:7).”
이렇게 볼 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지만, 벧엘로 가서 서원을 이행하는 것을 하지 않은 채, 세겜에서 땅을 매입하여 정착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후에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4. 교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아무리 큰 체험을 해도 성장은 시간을 요구한다.
야곱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이름을 받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고, 야곱이란 인물의 영원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즉, 야곱이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후에도 계속 야곱이라는 이름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과 함께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라고 가르쳐주시고 선언해주시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이, 우리의 죄된 본성이 남아서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그 속에는 죄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이런 깊은 죄의식 속에서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때에는 내가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이렇게 비참한 죄의식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것은 내가 다름아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정말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이 맞다면, 정말 그가 하나님께 환도뼈를 맞고 그분을 전심으로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낸 사람이 맞다면 어떻게 여전히 야곱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체험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져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어가는 인생의 과정을 한 순간으로 대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체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길고 긴 성화의 과정을 대신해주는 체험은 없습니다.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확신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체험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런 은혜의 체험을 구하셔야 하는 것은 마땅한 성도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깊은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성의 요소가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더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라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B.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사실 화해입니다. 20년 묵은 에서의 적대감이 용서로 변화된 현장을 우리는 읽었습니다. 무엇이 에서로 하여금 동생 야곱을 용서하게 만들었을까요? 성경은 20년 동안에 에서에게 있었던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창세기 36장에서 특별히 에서와 그의 자손에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볼 때, 에서 역시 많은 재산을 가진 부유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36:6~7). 이것은 오늘 본문, 9절에서도 발견됩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에서는 동생에게 다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축복을 자기에게 주어지는 풍성한 소유로 인하여 다소 위로를 얻얻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에서가 동생 야곱을 향하여 적대감을 풀고 용서하는 이 감격적인 장면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서 약속을 지키시고 에서 안에서 역사하여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 에서의 적대감을 용서의 마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 일은 야곱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야곱이 했던 것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이었고(창 32:11),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할 때 구했던 축복에 이 두려움의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했을지라도 그가 상상하는 최고의 결과 이상을 허락하여 주신 셈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관계를 놓고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적잖은 위로와 소망을 전해주는 말씀이 아닙니까? 야곱이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런 은혜를 많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C. 신앙은 매일 매순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이다(고전 9:27)
마지막으로, 신앙은 한 순간의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매 순간 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배웁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체험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에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요? 여러분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피할 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 31:19 “주를 두려워 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우리는 인생의 모든 순간 순간 마다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