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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8).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과 씨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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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8).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과 씨름하다

창세기 32:1-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2-30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야곱의 생애에서 28장의 벧엘 사건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였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성경 이야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주 인상적으로 뇌리에 박혀있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시에 많은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호기심어린 질문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방법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 순종 뒤에 따라오는 시험(1~23)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31:3).

A.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다(1~2).
이제 길르앗 산을 지나 하나님께서 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자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야곱을 환영해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야곱이 만나게 될 위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겠다고 하는 하나의 상징적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이 여기서 만난 천사들은 한 둘이 아니라 군대라고 표현해야 할만큼 많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군대가 과거에 만났던 위험?라반?으로부터 야곱을 지켜주었고, 앞으로 야곱이 만나게 될 모든 위험 특별히 에서로부터 야곱을 지켜줄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짧은 이 두 구절(1~2)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하나임과 같은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B. 시험: 모든 상황이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이 나의 반대편에 서신 것처럼 보인다(3~8).
그러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가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여 살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고난이 심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아니 더 많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야곱은 이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먼저 에서에게 사신들을 보냅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에서가 과연 자기에 대한 감정을 풀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전갈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신을 보내는 야곱의 마음 속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일이년이 아니라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장자권으로서의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집착은 이미 많이 사라졌고,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것을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야곱은 사신들에게 주는 메시지에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 칭하고 에서를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신들이 야곱에게 가져온 소식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를 그들은 가지고 왔습니다. 에서는 400명을 데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에서가 왜 이 400명을 데리고 왔는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야곱을 환영하고 주변민족들로부터 호위해주기 위해서라고 하기도하고(33:12), 야곱 스스로가 생각했듯이 야곱을 대적하기 위한 군대로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떻든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 했습니다(7). 즉각적으로 야곱이 취한 조치는 자기의 모든 혈육과 육축과 재산을 두 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라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심사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 귀향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추적을 당하여 혼이 났었지만 그 위기는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앞에는 400명의 군대를 거느린 에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시간의 연단을 통하여 견고한 믿음의 순종이 되게 하십니다. 순종하면 시험이 온다는 사실을 예상하셔야 합니다. 성도들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순종 이후에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 이후에 펼쳐지는 시험의 상황은 마치 외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의 반대편에 서계신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주시는 시험이었으며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시험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C. 야곱의 첫번째 기도(9~12)
야곱은 여기서 비로소 처음으로 기록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28장에서 야곱이 기도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수 있으나 거기서 야곱이 한 것은 사실 서원이었지,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야곱이 이전부터 이미 중생한 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제대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헤세드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무력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기도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무력함의 이유입니다. 마귀가 그런 신자를 건드리기 위해서 굳이 애를 써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당면한 두려움의 상황은 야곱으로 하여금 드디어 기도를 하게 합니다. 사람은 두려움 앞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다 좌절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까지 정말 깊게 제대로 기도를 해보지 않았던 야곱이 이제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않는 우리를 기도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i.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한다(9).
야곱은 하나님을 부르는데,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야곱이 언약의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실 때, 부모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방식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뚜렷한 원칙은 신앙이 전수되고 가르쳐지는 주된 수단과 환경은 목사와 교회가 아니라 부모와 가정이란 사실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배워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어머니), 저는 아직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저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가 섬기고 사랑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를 통해서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 하나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께 그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어떤 분께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ii. 자신의 합당치 않음을 인정한다(10).
자신의 합당치 않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기도자의 합당한 자격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자기가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기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 언제나 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입니다. ‘은총’은 바로 헤세드입니다. 진리는 에메트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참된 진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신실함(faithfulness)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무궁한 은혜를 야곱에게 베푸셨고 신실하셨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지난 20년의 삶을 통해서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왔던 야곱이 이제 크게 두 떼나 되는 많은 가족 그리고 종들과 가축들, 재산들을 가진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임을 그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지금 하나님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와 진리에 조금도 합당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헤세드와 에메트를 드리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럽지도 못했고, 신실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생각하게 합니다(눅 18:13).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iii.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9,12).
야곱이 하나님께 자신을 형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하는 이 기도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고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고향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하는 것이 9절입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주신 명령과 벧엘에서 주신 약속을 함께 상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또 기도를 마치면서 12절에서 벧엘에서 말씀하신 약속을 다시 한 번 주장합니다. 형 에서가 자기와 자기 처자를 치게 되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약속을 다시 주장합니다.

D. 야곱의 인간적 생각: 기도와 삶이 따로 갈 때(13~23)
아마 야곱은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적잖은 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도 밤을 거기서 보내면서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13).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고 난 후에, 야곱의 머릿속을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생각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야곱적인 생각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도 얼마든지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열심히 기도를 했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머리가 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삶이 얼마든지 따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얼마든지 이렇게 따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영적 교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은혜를 구하였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뭔가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날이 밝자, 야곱은 우선 자기의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해서 예물을 골라냅니다.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입니다(20). 야곱은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습니다.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려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물의 규모와 순서를 매우 심리적으로 배열하였습니다. 제1열에는 암염소 200, 제2열에는 수염소 20, 제3열 암양 200, 제4열 수양 20, 제5열 젖나는 약대 30과 그 새 끼, 제6열 암소 40, 제7열 황소 10, 제8열 암나귀 20과 그 새 끼 나귀 10이었다. 이런 예물의 긴 행렬을 보내면서 각 떼를 맡은 종들에게는 에서에게 할 말을 들려주었다. ‘이것은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입니다’(18).

그는 이렇게 인간적인 계획 속에 들어감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루 종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을 골라서 먼저 보내고 나서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열한 아들로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밤에 일어났다’는 표현은 야곱이 느끼던 두려운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보냈습니다. 가족들, 소유들…. 이제 그는 혼자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을 떠났던 때와 같이 그는 이제 혼자입니다.

2. 싸움을 거시는 하나님(24~32)
야곱의 기도와 삶이 달랐다는 것은 이야기가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야곱 안에서 하실 일이 많이 남아있으신 것입니다.

A. 준비: ‘홀로 남았더니’(24)
때는 여전히 밤입니다(22).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는 이삭에게는 거짓된 에서로서 남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홀로 남아있는 그는 그냥 야곱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시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많은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데에도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관계나 가까운 인간관계 혹은 우리의 소유 등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은 ‘홀로 남아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분명하게 만나시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를 외롭게 만드십니다. 모든 관계들로부터, 모든 소유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시고 우리를 혼자 있게 만드십니다. 그런 모든 것들과 결부되어 있는 나가 아니라 그냥 홀로 있는 나 자신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입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수식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 고독은 영적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고독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견딜 수 없이 고독한데도 도무지 고독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도움이나 보호나 재산이나 혈육이나 어떤 것으로부터도 떨어져서 홀로 남았습니다.

B. 밤에 찾아온 씨름군: 야곱이 씨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씨름하신다.
야곱은 지금 모든 처자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보내고 홀로 있습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 힘센 자가 야곱을 강하게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에 야곱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에서가 보낸 암살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는 의문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야곱을 심하게 붙잡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28,30). 그분은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님이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천사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언약의 사자’이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표현입니다(호 12:3~4).
호 12: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주목할 것이 있는데, 씨름을 거는 자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씨름군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씨름을 거셨고 그와 씨름을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외롭고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이런 싸움을 걸어오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야곱을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까지 데려가시기 위해서 씨름군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다’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다’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자기 힘이 완전히 깨어지기 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는다.
씨름은 3분 정도 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시작된 이 씨름이 다 끝났을 때는 ‘해가돋았다’고 했고(31) ‘날이 새도록’ 씨름하였다고 했으므로(24) 적어도 동트기 전의 새벽녁까지는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야곱이 이 낯선 씨름군과 씨름을 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영적인 기도의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씨름을 해야했습니다. 밤에 찾아온 씨름군은 강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모든 힘을 다 해서 이 씨름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 씨름군은 전능한 능력을 다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의 모든 능력의 한계 속에 계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기 힘들다고 느끼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러자 환도뼈가 빠지면서 순간 야곱은 씨름을 하는 모든 힘을 잃고 맙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였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자기 방식대로 자기 힘으로 씨름을 했습니다. 하지만 환도뼈가 위골된 후에는 단순히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무력하고 절름발이가 되어서 그는 절망적으로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이 더 이상 씨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육신의 힘으로 씨름하지 않고 그냥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이 완전히 깨어져서 자기 힘에 거는 모든 희망을 다 접기 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무력함과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환도뼈가 위골될 때까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고 그 축복을 간절히 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 힘으로 씨름을 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우리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별볼 일 없는 존재인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하시고 더 이상 내 힘으로 하는 씨름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놓지 않고 그 은혜와 축복을 간절히 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뜻에 굴복하게 하사 당신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 힘으로,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기 전까지 했던 씨름입니다. 그런 기도, 그런 신앙은 정말 꺾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힘과 자기 열심과 자기에게 있는 특별한 무엇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것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힘으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그 은혜와 축복을 간절히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이 그랬듯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고 신앙을, 기도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우고 있습니다. 목회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은 결코 머리로 알아서 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삶으로 배우는 지식입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배우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로 인하여 우리의 환도뼈가 위골될 때에만 배울 수 있는 진리입니다.

D. 절뚝거리는 승리자: 야곱이 이스라엘로.
환도뼈를 친 씨름군은 ‘날이 새려 하니’ 나를 놓으라고 말하지만 야곱은 놓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기를 이긴 씨름군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하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그 씨름군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놓아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씨름이 아니라 그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거의 매달려 있는 형국이라고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그 씨름군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야곱의 정체성, 지금까지 야곱이 짊어지고 살아왔던 야곱의 문제의 핵심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기의 정체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야곱은 이제 말합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고 자기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될 때 까지는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사깃군이요, 거짓말쟁이요, 남의 발뒷꿈치를 잡는 자였습니다. 그는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인 자입니다.

씨름군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줍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과 또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명령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많은 인간들과 경쟁을 해왔고 또 싸워서 이겨왔습니다.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희대의 속이는 자 라반도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 이겼는데 정작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이기고 얻은 것은 20년의 객지에서의 고생이었습니다. 라반을 이기고 얻은 것이 가족들과 가축들과 재산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자기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무엇이 이기는 것이고, 무엇이 지는 것인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로 얻는 승리는 절뚝거리는 승리였습니다. 자연적 힘으로가 아니라 영적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삶을 주신 승리였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고후 12:10). 야곱은 육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기도로 이 씨름을 이깁니다. 야곱이 자기 힘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인정할 때 야곱이 이기도록 져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믿음의 인내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힘이 다했을 때도 이 씨름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붙잡았습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3. 생각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을 정리하고 생각하고자 합니다.

A. 기도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무력함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는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기 전에도 거듭난 신자였을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기도하는 성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힘으로 성취를 하면서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의 인생에 면면히 드러나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씨름을 하기 전의 야곱의 삶은 기도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무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씨름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를 맛보기 까지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삶과는 결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야곱을 이 씨름의 현장으로 이끌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밤에 야곱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사 홀로 남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야곱을 얍복나루로 인도하여 내셨듯이 우리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B. 나는 자기 힘으로 싸우는가, 기도로 싸우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물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힘으로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기도로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자기 힘의 근원이라고 믿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깨어지는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이미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으셨습니까? 혹 그런 자리에 지금 계십니까? 정말 슬픈 것은 그런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힘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기도하지 않고 있는 셈이며, 조금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멋진 승리자, 조금도 상처가 없는 승리자가 아니라, 절뚝거리는 승리자가 되는 것이 성도들인 우리의 영광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삶의 소망이 끊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를 몸소 겪으시고 절뚝거리는 승리자, 상처입은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완전하게 굴복시키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잔인한 자비는 야곱에게가 아니고, 우리들에게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의 독생성자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하게 다 부어졌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성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목사는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께 묻는 저의 질문입니다. 상처투성이의 승리자는 사람의 관점으로는 진 것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긴 자입니다.

C. 지금 나의 씨름은 밤에 찾아온 씨름군과의 씨름이 아닌가?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처해계신 어려움은 그것이 고난의 상황이든, 두려움의 상황이든, 혹시 그 밤에 야곱을 찾아가셨던 그 씨름군과 씨름을 하는 상황은 아닐까? 이런 저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입니다. 야곱은 처음에 이 씨름군이 누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씨름군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름군은 날이 밝기 전에 물러갔습니다. 이 씨름은 처음에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씨름군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기 힘으로 열심으로 꺽이지 않으려고 지지 않으려고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지 못하고 그 축복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D.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씨름군은 떠나고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보고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하면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고 성경기자는 매우 의미있는 세밀한 묘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야곱은 이제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씨름이 여러분의 씨름이 되시길 바라고, 여러분이 아무 상처없는 승리자가 아니라 절뚝거리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을 이 자리까지 데리고 왔듯이 오늘 우리의 인생도 그 자리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