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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2). <하나님의 헤세드> 헤세드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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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2). <하나님의 헤세드> 헤세드의 승리

창세기 48:14-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1-27

말씀내용
이제 우리는 오늘까지 12주에 걸친 야곱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야곱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아들들 특별히 요셉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겹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37장부터 49장에 걸친 야곱의 노년을 다루면서 마무리하고, 이어서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 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상고할 예정입니다. 야곱의 생애 마지막을 상고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고집하고 살아왔던 야곱,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의 기회를 만나지만 거듭 자기 삶의 늪에 빠져들어가는 야곱의 삶을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의 생애 마지막에 가장 영광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생애는 청년기보다는 중년기가, 그리고 중년기 보다는 노년기가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인생을 상고하면서 저는 그 부제를 하나님의 헤세드라고 붙였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도 그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야곱의 생애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마지막 인생의 시기에 선 야곱의 삶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는 가장 놀랍게 나타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삶에 나타나는 두 가지 영역에 대해서 입니다.

1.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삶에 나타난 두 가지 영역
그 두 가지 영역은 교리적으로 말하면 칭의와 성화의 영역입니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서로가 부딛치는 영역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영역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이전의 가르침들을 통해서 이해하고 계시는 줄 압니다. 먼저 칭의의 영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성도를 완전한 위치에 이르게 하시는 사랑과 자비(시 103:10; 민 23:21):칭의(Justification)
그것은 성도를 완전한 위치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완전한 위치는 절대로 야곱이라는 인물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천국을 주시는데 합당한 자들이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대로 우리는 다 그릇 행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한 자들이며,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들이고,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야곱처럼, 믿는 것 같으나,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삶 속에 빠져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연약한 기질과 성품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끌고 가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 인생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헤세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야곱을 그의 삶의 있는 모습을 가지고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만일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과 범죄와 행위를 따라서 그를 다루셨다면 야곱은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그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성도의 완전한 자리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자리로 그를 이미 데려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인생이 그토록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복을 받게 되는 근거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인생 최대의 문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내 안에서 칭의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B. 비참하게 실패하는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사랑과 자비:성화(Sanctification)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인생에 나타난 두번째 영역은 성화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비참하게 실패하는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사람같으면 이렇게 기다려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끝까지 그의 인생을 참으시며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칭의도 그렇지만, 저는 성화의 영역에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느낍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인생들, 어쩌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싶은 의문이 드는 인생, 사람은 그를 참아줄 수 없지만, 길이 참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붙들어주시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시고, 그를 영화로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벧엘에서 그 정도 환상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으면 한 번에 변화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얍복 나루에서의 체험도 그렇습니다.

야곱의 노년까지 남아있는 그의 연약한 모습은 특별히 자식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는 라헬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식에 대해서도 라헬이 낳은 요셉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두드러졌습니다. 37:3을 보십시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아무리 편애를 해도 이렇게 편애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지만 연약한 모습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간다는 것은 장자 르우벤은 빌하를 범했고, 차자와 삼남인 시므온과 레위는 대학살극을 저질렀으며, 나머지 아들들 역시 노략질에 가담했었습니다. 인간 야곱이 이 자식들을 볼 때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요셉은 형들의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을 듯도 합니다. 나이가 어렸다는 것도 있고, 다른 형들과 늘 구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뒤에 드러나는 그의 영적 성품과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눈에 띄게 다른 아들들과 차별했다는 것은 결코 야곱의 성숙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결과를 낳을 정도 였기 때문입니다(37:4). 요셉을 잃은 후에도, 야곱은 그 대상을 베냐민으로 바꿔서 똑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보여줍니다(42:36,38). 정말 끈질기지요.

이런 연약함이 여전히 늙은 야곱에게 남아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참한 실패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헤세드는 계속해서 그를 붙잡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화의 은혜가 있습니다. 칭의는 은혜로 받고, 성화는 내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칭의도, 성화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에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인생에 만들어낸 변화
이제 야곱의 인생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그렇게 나타나서 결국은 효과가 있었는가, 야곱의 인생은 결국은 변화가 된 것인가, 하나님의 헤세드가 끈질기고 고집센 야곱을 이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헤세드는 종종 징계의 형식으로 나타났다(히 12:5~6,11).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종종 징계의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징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 12: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이것을 우리는 진노의 채찍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겪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질병이 징계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징계는 자녀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의 매를 드시는 것이며, 깨닫게 하시기 위한 의도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애에 이런 징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장한 하나님의 헤세드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서 20년의 세월을 밧단아람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에 대한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겜에 와서 그는 딸이 강간당하는 일과 이어지는 참담한 사건들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세겜에 잘못 정착한데 대한 징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건들은 이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입니다. 지난 주에 상고한 본문에 세 명의 죽음이 언급되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 그리고 이미 화해하고 바른 관계를 회복했던 아버지 이삭의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잃어버리는 것이고, 상실입니다. 최고의 상실입니다.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상실입니다. 야곱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징계 또는 헤세드는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야곱에게서 데려가심으로써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기의 모든 사랑을 아들 요셉에게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 마저도 데려가셨습니다. 죽음은 아니었지만, 아들들의 속임수?속임수는 야곱의 생애 끝까지 나타납니다?로 야곱의 마음 속에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잔인하게도 베냐민까지 데려가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 가야 했을 때 그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가지 못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야곱이 하는 말을 듣습니다.
창 42: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 42: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얼마나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입니까? 혹은 연약한 노인의 모습 그대로 아닙니까? 여기서 여러분은 성숙한 한 신앙인의 원숙함을 찾아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끝까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붙들고 놓지 못하며 집착해하는 연약한 모습인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진노의 차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진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야곱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닌가? 너무나 알아 듣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화가 나셔서 그를 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데려가시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나에게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가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진노의 차이는 나타나는 국면 자체로 본다면, 차이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실상은 너무나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진노하시지 않으십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다 물러갔다는 선언입니다. 그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남김없이 부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실 하나님의 진노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누구에게 남아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에게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심판날에 다 퍼부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C. 야곱의 모리아 산(43:14)
감사하게도 야곱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믿음의 승리가 나타난 절정을 묘사하려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모리아 산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도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아들들에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라고 내려놓는 장면입니다. 43:14을 보십시오.
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결국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버린 야곱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아들 베냐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자발적으로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삶은 출발부터 형 에서의 발을 움켜 잡았듯이, 움켜잡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내놓지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베냐민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리아 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인생에 만들어낸 놀라운 승리인 것입니다.

D. 다시 얻은 아들들(45:25~28): 요셉, 베냐민, 시므온.
이렇게 베냐민을 내려놓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베냐민 뿐 아니라 죽었던 요셉까지도 다시 살리셔서 야곱의 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물론 시므온은 여기 조연으로 등장을 하지만, 시므온도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에게로 돌려보내십니다. 야곱은 내려놓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치도록 야곱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내가 움켜쥐고 살면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살지만, 성경은 결코 그것이 행복한 삶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삶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그분의 손에 의탁하고 드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삶이며, 행복한 삶이며, 하나님의 의도하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이며, 우리는 다 그 청지기와 같이 그것들을 맡아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잘 사용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녀들도, 물질도, 경력도, 직업도, 비즈니스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 중 여러분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야곱, 계산에 밝은 사람, 손해보지 않는 사람 야곱이 이렇게 변화된 것을 보십시오.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의 승리인 것입니다.

E. 바로를 축복하는 야곱(47:7~10)
야곱은 요셉의 소식을 듣게 되고 요셉의 초청을 받아 모든 가속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애굽에 간 야곱은 요셉의 인도로 애굽의 통치자인 바로를 접견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제국의 통치자를 만나서 대하는 야곱의 태도를 보십시오. 너무나 당당한 하나님의 사자로서, 바로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바로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7:7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창 47: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날 때의 모습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그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해짐으로 그리고 자기의 자존심을 다 죽이므로 그는 쌍동이 형 에서 앞에서 7번이나 몸을 굽혀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 나아갔었습니다(33:3). 그러나 애굽의 통치자 바로 앞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놀랍게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축복을 받으려고만 하던 사람 야곱은 어느 새 남을 축복하는 인생을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당당하게 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의 인생에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F. 인생을 이해하는 야곱(47:7~10)
야곱은 또한 인생을 제대로 이해한 듯한 고백을 합니다. 바로에게 그가 하는 말입니다.
창 47: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자기가 산 인생이 나그네 길이었다고 하면서 자기 조상들도 다 나그네 길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대한 관점입니다. 야곱은 이제 알았습니다. 머리로 알던 것을 가슴으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 가나안도, 애굽도 아니란 사실을 그는 고백합니다. 자기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고향처럼 자기의 고향도 하늘에 있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렇게 놓지 못하고 움켜 잡으면서 성공하려고 했던 그의 인생은 그렇게 살도록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남는 것은 내가 내 나그네 길에서 만난 이들에게 베푼 것들이란 사실도 그는 나이 130이 되어서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입니다. 배울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시간표에 늦은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사실을 배우셨습니까?

3. 믿음의 승리
우리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을 이겼다는 사실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야곱 편에서 볼 때 믿음의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의지의 승리가 아니고 욕심이나 야망의 승리가 아닙니다. 야곱의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의 생애 특별히 노년에 가장 영광스럽고 멋진 두 장면을 볼 것입니다.

A.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야곱(47:28~31; 46:1~4).
첫번째 장면은 그의 죽음의 침상에서 요셉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어느새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리로 변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애굽에 와서 산지가 17년이 지났고 야곱의 나이는 147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창 48:10). 그는 임종의 순간을 맞이한 침상에서 그가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자신의 환도뼈에 대고 맹세를 하게 합니다.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야곱이 아들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향하려고 갈 때, 그가 브엘세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살던 곳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다고 했습니다(창 46:1). 그 때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창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그것은 야곱이 임종의 자리에 있기 전 17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제 적지 않은 이민 생활 그것도 아들 요셉의 덕택에 너무나도 안정적인?어쩌면 그의 인생 역정에서 가장 안정적인 17년을 보냈을 것입니다?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이미 애굽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야곱은 이제 자기의 아들들과 후손들이 이곳 애굽에서 번창하고 성공한 가문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만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17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기억합니다. 그 약속을 믿고서 말합니다. 나를 이곳에 장사하지 말고 가나안?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가서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의 생애에 가장 놀랍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이 분부는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살 곳이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결정하고 그의 인생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B. 믿음의 고백(48:15~16): 참 이스라엘의 고백
야곱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두번째 장면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장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입니다. 상세한 것은 후에 요셉의 생애를 강해할 때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상고할 것은 야곱이 애굽에서 자라났고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으로부터 난 두 손자를 특별히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먼저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했던 최고의 고백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위대한 할아버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제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실로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였고, 그의 평생에 하나님은 그를 떠난 적이 없으셨으며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은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였습니다. 여기서 사자라고 말한 것은 angel 혹은 messenger 를 뜻하는 말인데, 물론 피조물인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기에게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분은 야곱의 인생 최대 위기의 때에 사람의 모양, 천사처럼 오셔서 그에게 씨름을 걸어오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를 인생에 겪은 그 많은 모든 환난에서 자기를 건져주셨다는 사실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환난입니다. 한 번도 환난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지 않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만족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고백이 아닙니까? 야곱은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섬기던, 아버지가 섬기던 그 하나님이 자기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지금 임종의 침상에 이르기까지 길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환난에서 자기를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강조되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바로 양들을 치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기르신’이라는 단어는 바로 목양하다, 혹은 방목하다, 먹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끝까지 참으셔서 이 시간까지 먹이시고 목양해주신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무엇을 언급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히 11:21입니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49장이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이 장면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히브리서를 쓰는 기자는 야곱의 믿음의 승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믿음의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별히 야곱의 이 마지막 두 장면에서 야곱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7:29과 48:14을 각각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고백일 수 없습니다. 새 사람 이스라엘의 고백인 것입니다.

C. 믿음은 기다리는 것(창 49:18)
저는 여기에 또 하나의 장면을 추가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로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왜 그렇게 갑자기 외쳤는지 알 수 없는 한 마디 말을 하는 대목을 주목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아들 단을 축복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외칩니다. 창 49:18입니다.
창 49: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성경 학자들은 이 구절이 단을 축복하는 내용인지 아니면 이어지는 갓에 대한 축복을 시작하는 말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단이나 갓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아들들을 축복하다가 갑자기 그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자기의 믿음의 소망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미래의 일들을 특별히 아들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외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라고 말입니다. 단지 먼 훗날 자기 후손들이 애굽을 벗어나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돌아갈 날을 바라본 것일까요? 오히려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예언이자,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대한 그의 강렬한 의지와 소망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제 임종의 순간에 그는 주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도무지 기다림과는 거리가 있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때를 결정하기를 원했고 참지 못해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쟁취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비록 야곱은 그의 생애의 최후의 순간, 임종의 때이기는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믿음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아니, 야곱이 가진 믿음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 내내 보여주신 그분의 헤세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야말로 하나님의 헤세드의 승리의 전형입니다. 잘 늙어야 합니다. 자존심 지키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의 증거가 충만하고 믿음이 승리하는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ㅏ.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길 인생은 없다(빌 1:6)
야곱의 생애를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길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질긴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말은 정말 옳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 안에서 착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역사의 마지막 시간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더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아무리 질긴 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헤세드로 여러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의 일은 결코 완성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그분의 한없으신 헤세드, 언약의 사랑, 실패할 수 없는 자비하심과 은혜로 그리 하실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의 인생을 결국 믿음의 승리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를 동일한 헤세드로 찾아오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며 결국에는 우리에게 믿음의 승리를 안겨주실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