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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0). <하나님의 헤세드>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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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0). <하나님의 헤세드>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울 때

창세기 33:18~34: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1-13

말씀내용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 이스라엘을 받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으며 명실공히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족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 인생에 원치 않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을 뒤덮을 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묻습니다. 성경은 매우 현실적인 책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니 훨씬 더 깊은 내면의 문제들을 섬세하게 다루는 책입니다. 야곱은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생은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식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자면 그의 삶 어느 구석 하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사람의 전형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야곱의 이런 모습과 훨씬 더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체 실패하지 않으며, 멋진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왠지 많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전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승리가 그 사람 자신의 잘남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우리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슬픔과 아픔, 비극과 놀람을 대변하는 모습입니다.

한 가지 오늘 본문인 34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먹구름이 낄 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묻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렇지요. “하나님은 그 때 어디 계셨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그 때에도 여러분의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하고 계셨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힘든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그분의 헤세드로 찾아와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삶의 어두운 시절이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1. 잘못된 정착과 지연(33:18~20)
문제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야곱이 가야할 곳으로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상고한 바와 같이, 그는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또 형 에서에게는 형이 있는 세일로 곧 따라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 그리고 형과의 약속을 파기한 채, 지금 세겜이란 곳에 와서 정착을 하였습니다. 그는 장막을 치고 거기서 그곳의 유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땅을 매입하였습니다. 거기서 정착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아마 요한복음 4장에서 말하는 ‘야곱의 우물’은 바로 이곳에서 야곱이 판 우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뿐 아니라 야곱은 거기서 단을 쌓았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능하시다’란 뜻입니다. 야곱이 단을 쌓았다는 사실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마는, 그가 왜 여기서 단을 쌓았는가 하는 이유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시 아비 집으로 돌아온 것,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땅에 돌아온 것에 대한 기념의 의미가 있는 제단이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집에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벧엘로 가지도 않았고(그는 20년 전에 거기서 하나님을 기념하겠다고 서원했었는데 말입니다, 28:22), 세일로도 가지 않았으며 물론 아버지 이삭이 아직 살아있는 헤브론으로도 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아마도 그가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은 이미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가 죽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아버지와는 감정적으로 늘 거리가 있었던 야곱에게 있어서, 중재자인 어머니 없이 아버지 이삭을 만나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야곱은 자기가 지켜야 할 약속들을 무시한 채, 그냥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종 예배가 우리의 불안한 양심을 붙잡아주는 수단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정도가 되면 우리의 영혼에 뭔가 심각한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여간, 야곱이 세겜에 정착한 것은 잘못된 정착이었습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는가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을 거기서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디나는 야곱의 자녀 중 맨 마지막인 요셉의 바로 위에 난 딸입니다. 요셉을 낳고 야곱은 라반에게 이제 떠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때가 14년의 신부 값을 다 하였을 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6년 더 일하고 나서 라반의 집을 떠나 나올 때 요셉은 기껏 예닐곱살 정도된 어린 아이였을 것입니다. 디나도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디나가 동네에 나가서 강간을 당하였다고 할 때, 대략 10년을 전후하여 살았던 것으로 봅니다. 꽤 긴 시간을 야곱은 세겜에서 살았습니다. 잘못된 정착이었을 뿐 아니라, 잘못된 지연이기도 하였습니다.

A. 우리가 사는 장소는 우리의 신앙을 반영할 수 있다: 신앙/사명 vs. 경제/학군
여러분, 우리가 어디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종종 우리의 신앙을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사는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대개는 있습니다. 그냥 떠밀려가는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장소를 결정할 때, 여러분에게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신앙이나 사명입니까, 아니면 경제적 이유와 자녀들의 학군의 문제입니까? 우리가 사는 장소를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저 사람에게는 신앙이 중요하구나 라고 보는 이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면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정착해서 산 것은 결코 신앙적인 혹은 영적인 이유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에서와 거리를 두고 살기를 원하였거나, 거기에 좋은 목초지가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오랜 유목민의 삶에서 좀 벗어나 정착해서 살고 싶은 욕구였기 때문일 껏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가 어느 것이었던지 야곱은 결코 신앙적이고 영적인 이유에서 세겜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덜 영적인 동기에서 세겜에 정착했을 때, 그의 자녀들은 덜 정직한 태도로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잘못된 정착이 나은 잘못된 결과요, 댓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러분이 거처를 정하실 때에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십시오. 내가 살 곳에 좋은 교회가 있는가? 나의 자녀들이 영적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곳인가?(디나의 경우에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길 수 있는 어떤 가능한 일이 있는가? 주님이 내가 여기 있기를 원하시는가? 이곳이 내가 주님을 최고로 잘 섬길 수 있는 곳인가?

B.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 정체성(히 11:9~10, 13~16)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기억할 것은 우리의 정체성은 나그네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사는 것은 나그네로 사는 것이고, 임시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 영원한 처소는 여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와서도 여전히 장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자기가 나그네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려고 생각했던데에는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는 점에서의 비신앙적 요소가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적잖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양식과 태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가며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점에서 증거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교회 다닌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의 정체성이며, 그 정체성은 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구석 구석, 생활양식과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그렇게 살았던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던) 한 성을 예배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히 11:16).

2. 성도의 가정에 일어난 참극(34:1~29)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이 치신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악평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잘못된 정착을 했습니다마는, 그것에 대한 벌로써 하나님께서 딸인 디나를 치셔서 그녀가 강간을 당하게 하셨고, 아들들의 살인극이 일어나게 하셨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을 마치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복수의 칼을 가는 이방 신화의 신들처럼 매우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의 잘못에 대하여 이런 식의 즉각적이고 잔인한 벌을 내린다면 결코 좋은 부모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계속해서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력을 동원해서 우리를 막으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자유의지를 통하여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배우게 하셔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야곱 가정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그런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할 것, 믿는 자의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별히 디나의 강간당한 사건이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을 행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34:7).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쓴 것을 주목하십시오.

A. 강간(34:1~2): 우리가 사는 세상의 좋은 이웃들?
일의 발단은 야곱의 딸 디나가 동네에서 추장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디나는 아들만 많은 야곱 집안의 아마도 외동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경이 디나 외에 다른 딸의 출생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디나 만이 이 사건에서 언급이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외모에 신경을 쓸만한 나이인 열예닐곱살 정도되었을 디나는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추장인 세겜의 눈에 들었고 세겜은 힘으로 디나를 강간하였습니다. 아무도 자기 집안에서 이런 비슷한 일도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 야곱의 집안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도의 집안을 피해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런 원치 않는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집안을 언제나 피해서 불신자의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곱은 전날까지만 해도 추장 세겜에 대해서나 그곳의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가 사는 세겜이라는 곳에 사는 좋은 이웃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가해자는 바로 추장인 세겜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좋은 세상에 좋은 이웃들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좋은 이웃들일 수 있습니다마는, 그들이 분명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안심하고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어떤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으며, 장성한 자녀들도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안전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야곱이 세겜에 정착한 것은 경제적 이유나 학군의 이유로 볼 때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B. 협상(34:3~17)
세겜은 디나를 강간하고 나서 디나를 버리지 않고 그녀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자기의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연모하여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나서는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다윗의 아들 암논 보다는 훨씬 나은 자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겜은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의 집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한 마디도 그들이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디나를 얻기 위한 협상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세겜에서 소수자이며, 약자인 야곱의 집안에 대한 강자의 처신이었습니다.

i. 아버지의 침묵(34:5): 아버지의 무책임, 비겁함, 분주함…..
오늘 본문에서 가장 슬픈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태도입니다. 야곱은 디나의 강간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아무 행동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들들이 들에서 돌아오기까지 그냥 잠잠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디나가 자기가 사랑하지 않은 여인인 레아의 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마치 이것을 지지하는 듯이 ‘레아가 야곱에게 나은 딸 디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자기가 사랑한 여인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아들들로부터 들었을 때 야곱이 보인 반응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창 37: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물론 아들은 죽었다는 소식이었고, 디나는 강간 당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5절에 쓰인 ‘잠잠하였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마치 모르는 척 하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넘기려 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말 딸 디나의 강간 사건을 아버지 야곱이 그렇게 다루려고 했다면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크게 실망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세겜에 거하는 10여년의 세월은 야곱에게 있어서 영적 암흑기요, 하나님의 침묵기였으며, 영혼의 깊고도 어두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정말 비겁하게 행동합니다. 야곱은 뒤로 물러섰고 야곱을 대신하여 들에서 돌아온 레아의 오빠들이 협상테이블에 앉은 듯 합니다.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또 그것을 가리려고 분주한 척 하는 그런 지극히 수동적인 야곱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거나 결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야곱과 같은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아버지들로 인하여 많은 자녀들이 그리고 부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앞에서 말한대로 그가 영적으로 너무나 빈곤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성격의 결함 같은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한 야곱의 실패를 보여주는 부분이고, 이것은 아버지로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야곱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한 한 부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ii. 야곱의 아들들의 속임(34:13): 언약의 표시를 더럽게 팔아넘기는 아들들
수동적인 아버지 야곱과 대조적으로 야곱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습니다(34:7). 아버지를 대신하여 협상테이블에 앉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차자와 삼남이며 또 디나의 친오빠들(한 엄마에서 나온)인 시므온과 레위였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어떤 댓가든지 치루겠다고 하는 세겜과 하몰에게 속여서 말했습니다. “너희 중 모든 남자가 다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주겠다”고 말입니다(34:14~17). 협상은 해결되었습니다. 세겜과 하몰이 볼 때, 이것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고 잃을 것이 없는 협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속셈은 야곱의 집안이 그들 중에 거하고 이렇게 섞이다 보면 야곱의 재산도 다 그들의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4:23).

야곱의 아들들이 한 일은 결국 속인 일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온갖 속임수로 가득하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곱 자신은 속이는 자였고 또 속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그 아들들이 그곳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이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시로 주신 것을 더러운 방식으로 팔아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속이는 일에 종교를 팔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인 할례는 세겜과 그곳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경제 증식의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나와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는 것을 비즈니스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도록 하는 예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표시인 세례를 그런 자들에게 쉽게 베푼다면 그것은 교회가 행하는 배교행위와 다른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C. 학살과 노략질(34:25~29): 타락한 교회의 실상
속임수에 따라온 것은 잔인한 학살극이었고 노략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무서운 이야기는 범죄하는 것이 결코 이 세상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세겜은 디나를 강간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두 아들은 디나의 일을 갚기 위해서 세겜의 모든 남자(이 모든 남자들은 디나의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를 다 죽였습니다. 세겜의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삼일이 되어 고통이 심할 때에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을 습격하여 칼로 모든 남자를 다 죽이는 대학살극을 저질렀습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다른 모든 형제들은 그 죽음의 도시로 달려가서 탐욕스럽게 노략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죄악은 세겜 보다도 더 큰 악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금도 감하지 않고 사실대로 써내려간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게 될 때 세상과 다를 바 없으며 세상보다도 더 무서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 야곱의 실패: 아들들을 비난하는 아버지(34:30; 49:5~7)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야곱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집안에 벌어진 상상 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대면하면서 야곱은 두려웠습니다. 30절을 봅니다.
창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기껏 야곱이 꺼낸 말은 자식들의 범죄에 대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지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연민에 깊이 빠져서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는 지극히 자기 본위적인 자기 중심성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말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살인과 탐욕을 무시합니다. 모든 것이 ‘나’와 ‘나의 안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나는’ ‘나를’, ‘나를, 그리고 ‘나와 내 집이’….나의 연속입니다. ‘잘 좀 살아보려고 했더니 너희가 다 망쳐놓았어’하는 비난입니다. 이런 비겁한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말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창 34:31)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딸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야곱의 비난은 여기서 그저 자기연민에 빠져서 한 비겁한 비난에 불과했지만, 후에 야곱은 자신의 유언에서 이 일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언급합니다(창 49:5~7). 비록 지금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야곱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4. 교훈: 성도의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울 때
이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의 인생에도 먹구름이 드리울 때가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분명한 체험 그리고 오랜 세월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도 인생에 먹구름이 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결정, 잘못된 삶의 지속을 하나님께서 막으시기를 원하셔서 어느 때 우리 인생에 먹구름이 끼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시는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보는 때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보게 하시는 기회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치시는 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불러주시는 은혜의 노래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A. 인간적인 안정의 시도가 초래한 영적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야곱은 인간적인 생각에서(결코 신앙적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안정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동안의 타향살이는 늘 불안의 연속이었고 자신이 과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도 불확실하였습니다.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단을 쌓은 후에는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살아도 될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는 안정을 추구하여 세겜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께 이 일을 여쭈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안정의 시도는 결코 영적인 판단이 아니었고 이것은 비참한 영적 실패를 초래했습니다. 영적인 실패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가정적으로도 비참한 결과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이야기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난다고 하여도,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그 때에 어디에 계셨느냐구요? 그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또 내가 지금 힘든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영적 실패, 영적 파산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B. 그래서 거기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현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현존한다’고 말입니다. 비록 34장이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야곱의 삶을 찾아오셨던 은혜의 하나님은 결코 야곱을 떠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고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헤세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아멘.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07:03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